타인의 닻

제2장 _ 상담

by 노하윤

P : 안녕하세요? 정말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D : 예, 그간 어떻게 지냈어요?

P : 뭐, 거의 같습니다. 어쩌면 좀 바빴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선생님께선 별일 없으셨나요?

D : 요즘 내원 환자가 많이 늘었네요.

P : 어쩌면 좋은 일이네요. 그나저나 일단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점은 아쉽게 됐습니다. 그렇게 된 건 지난 방문 때 말씀드렸다시피…… 일이 좀 생겨서요. 그래도 전보다 그리 심하지 않아서, 솔직히 살만했습니다. 요즘은 전처럼 우울하지도 않아요. 그냥 별 감흥 없이 사는 것 같아요. 좀 지루한 게 흠이라면 흠이지요.

D : 네, 좋은 신호네요. 앞으로 필요할 때 언제든 상담하시면서 경과를 지켜보시면 좋겠어요. 혹시 모르니 계속 지켜보도록 하죠.

P : 감사합니다. 오면서 든 생각인데요, 선생님께 치료를 받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아요. 그간엔 불평불만만 잔뜩 쏟아놨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잔뜩 쏟아내고 나면 스스로 왜 그런 생각을 하고, 또 말을 했었는지, 끊임없이 돌아보더란 말입니다.

D : 아주 좋네요. 계속하시죠.

P : 감사합니다. 지금껏 이 천방지축인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기억하고 느끼며, 상상과 욕망, 판단과 논리, 그리고 믿음으로 뒤섞여 있는 걸 봐요. 그런데 그것들이 죄다 역겨운 것뿐인 거죠. 아니면 너저분하거나요. 마치 버려진 집에 있는 귀신 들린 것 같은 서랍장 말이죠. 거기엔 안 쓰는 필기구며 잊힌 메모지 같은 게 섞여 있는 것처럼, 이 정신머리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물론 그게 잘못된 건 아닐지 몰라요. 원래 그 모양일 수도 있죠. 오히려 그 작은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초점이 너무 흐리멍덩했던 것일지도 몰라요.

D : 네.

P :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제 안에서 휘몰아치는 생각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정말 나로부터 생겨난 생각일까 하고요. 절 자극하는 짜증 나는 것들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을 때마다, 이 모든 생각이 내 생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남탓하는 거겠죠? 하지만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그(버러지 같은)것들을 다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거든요. 아, 물론 지금도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일단 저 자신이 일종의 ‘감각하는 기계’ 같은 거로 생각한 지 쫌 됐어요. 지나치게 기능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결국 자기원인으로만 그따위 생각들을 했다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요. 생각엔 형식이 있잖아요? 그것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 혹은 받아들인 세계를 제 안에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거죠. 그런데 일단 그렇게 세워지면 일종의 완장을 차는 거예요. 사람이 도구를 만들었지만, 이후엔 도구에 맞춰지는 것처럼요. 제 거북목을 보세요. 그 완장질은 제가 뭘 판단할 때 권능을 떨칩니다. 우리가 선입견이니 편견이니 하는 거 있죠? 무슨 스마트폰 자동완성기능처럼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단 말이죠. 정말이지 판단을 유보하고 무지를 묵묵히 견디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D : ‘판단’이요? 어떤 판단 말씀이죠?

P : 네. 그것은 생각의 조각입니다. 이를테면 오면서 벚꽃이 핀 걸 봤는데요, 그걸 보며 ‘저 꽃은 아름답다’고 떠올릴 때, 그건 막연하고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감각과 기억과 가치가 응축된 하나의 판단입니다. 우리의 말이나 글로 표현할 때 먼저 있는 거죠. 그건 생각의 기본 단위이고요. 그 나타난 형식을 두고 명제라고도 하죠. 그런데 그런 판단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전 세상에 대한 뭔가를 만든 셈입니다. 일종의 색안경 같은 거예요. 관념이라는 거죠. 눈으로 본 풍경, 귀로 들은 말, 마음속으로 그려본 장면들, 이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구닥다리 같은 생각들 위에 있어요. 그러나 그게 제 세계인 거죠.

D : 말씀하신 것 중에 처음엔 세상이라 했다가 나중엔 세계라 하시는데, 다른 건가요?

P : 네, 뭐 저는 그렇게 씁니다. 애초에 뭘 구별하자고 말을 쓰는 거잖아요? 제 밖에 있는 걸 그냥 세상이라 부르는 겁니다. ‘실체’니 ‘물자체’니 하는 것보단 낫죠. 젠체하는 게 적성은 아니라서요. 아무튼 그 판단은 분명 세상을 반영하지만 분명 가설적이에요. 가령 길에서 누군가를 마주쳤는데 평소 일면식이 있던 사람이란 말이죠. 근데 그 사람을 보면서 대뜸 ‘저 인간은 나를 싫어할 것이다’라고 느낄 때가 있어요. 실제로 그 사람이 절 싫어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허술한 생각을 저는 진지하게 믿을 수 있고, 심지어 그 판단으로 구체적인 행동까지 감행할 수도 있죠. 그런데 그런 생각들은 정말이지 믿음의 영역이었어요. 그래요. 저는 세상의 진면목에 상관없이 마음속에서 지멋대로 만들어져 누적된 일군의 판단을 믿음이라고 불렀어요. 거기엔 논리도 필요 없어요. 제가 그걸 모른답시고 남겨뒀다가 그 개자식들이 제 뒤통수를 치면 안 되지 않겠어요?

D : 흠…….

P : 물론 이런 생각을 지금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노골적인 이야기들을 하면서 저도 자신을 많이 돌아봐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대체 어디서 하겠어요? 그러나 선생님께서도 아시듯 지난 몇 년간 약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었지요. 그런데 제 생각들에 어떤 단단한 바닥 같은 게 있는데, 그런 걸 캐내서 들여다보면 속에서 뭔가가 끊임없이 바뀌더라구요. 다행이죠.

D : 좋은 태도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통상적으로도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P : 그렇죠? 자신을 관찰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관찰은 참을성을 참 많이 요하는 짓이에요. 절 들여다보는 경우는 더하죠. 자신이 만족스러운 사람들이라면 별 쓸모를 못 느끼겠지만, 뭐 저 같은 사람은 안 할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꽃의 개화시기를 여러 해 관찰해 그 규칙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앎’으로 간주하죠. 그 정당성은 그 사실이 반복해서 나타난 경험과, 그것의 객관적 공통성을 지지하는 방법적 타당성으로 승인되겠죠? 그런데 이 짓거리에도 한계가 있어요. 저에 대한 것이라고 해서 모든 걸 알 수는 없더라고요. 모르는 부분은 그냥 견뎌야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제 정신은 앎과 믿음이 뒤섞여 있어요. 그리고 때론 그 경계가 불분명해요. 믿음을 아는 것으로 단정할 때도 있고, 앎을 믿음처럼 의심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 애매모호함이야말로 제 정신의 모양이고 우리 개성의 뿌리가 아닐까요? 아시겠지만 전 규범과 제 개성의 관계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어요. 되는대로 살아도 아무도 뭐라 안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는 안 그렇더라구요? 정말 짜증 나는 일이 아닌가요? 그런데 결국 제가 세상이 정립한 규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런 기억들이 저도 똑같은 짓을 하게 만드네요. 남들을 손가락질하고 비웃고 무시하면서 법을 존경하는 거죠. 은근히 재밌어요. 제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잔소리를 하던 인간들이 왜 그랬는지 알겠더랍니다. 그 천박한 우월감을 조곤조곤 찢어버리고 수치에 빠뜨려 자살시켜버렸어야 하는데 아쉽네요. 뭐, 늘 조율하며 살 수는 없죠. 저 자신의 주관대로 사는 일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도 언제나 불완전한 세계를 사는 셈이죠. 그러니 이따위 생각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이 뭔가를 겪어서 하는 생각인지, 아니면 뭔가 필요해서 마음으로 만들어낸 것인지를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지만 현실은 늘 그대로였어요. 반성하는 인간은 이렇게 만들어졌지만, 그게 이렇게 허구헌 날마다 자책하고 시름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D : 그러니까, 평상시에 죄책감에 많이 시달리시나요?

P : 죄책감은 양날의 검이에요. 제 시선은 완전치 못해요. 이 세상에 대해서든 저 자신에 대해서든 마찬가지예요. 제가 어릴 때 분명 아주 나쁜 씨앗들이 심어진 게 분명해요. 그것들이 함부로 자라 이젠 뿌리 뽑기 어려워진 거죠. 저 어린왕자가 그토록 밤잠 설치며 두려워한 그 나무 같은 거죠. 더 이상 여린 손으로 뽑을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어요. 결국 이제 와서 고생이잖아요? 이 나이 먹고 옹이 진 두 손으로 마음에 도끼질을 하자니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살고 있잖아요? 하기야 덕분에 그 잡초가 얼마나 무성한지 이제 좀 알겠더군요. 전부 뽑아서 불질러버릴 게 너무 많아서, 어쩔 땐 제가 우울해서 그런지 와닿지 않아요. 대저 사람이라면 으레 겪기 마련인 일인 줄 알며 살았죠. 항상 세상이 적대적인 느낌 속에서 살았어요. 나를 쉬이 모욕하고 조롱하며 착취한다고 생각했기에 제 모든 악의와 악행이 정당하다고 믿어왔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돼 버렸죠.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더러운 위선자들이에요. 그들이 자의식 하나 없이, 얼마나 무감각하고 자연스럽게 그따위로 굴었는지 잘 알죠. 그 피해를 결국 누가 봤죠? 그 덕에 제 안에 그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사정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그 씨앗은 너무도 작고 가벼워서 어디서든 그리고 어떻게든 붙어와 싹틀 수 있다는 겁니다. 처음엔 여리고 얌전해 보였겠죠? 교육이 잘된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어요. 물론 부끄러움을 적당히 느끼는 게 필요하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그 부끄러움을 자연스레 해소해서 자신을 저주하지 않을 수 있을 때만 괜찮은 거 아닐까요? 왜 제가 그것들 면상에 침을 뱉게까지 만드는 걸까요? 하긴 아이에게 수치를 안기는 것만큼 효과적인 행실 교정법도 없죠. 대가를 치를 각오만 되어 있다면요. 결국 겁에 질려서 벌벌 떨게 될 거면서 말이죠. 칼과 먹으로 문신을 새기듯 저 자신을 스스로 혐오하게 만들고는 남몰래 감탄했겠죠? 구제불능이 이제야 말을 잘 듣는다고요. 그러니 성급하고 바쁜 어른들이 매를 약이라 하는 거죠. 한 번만 더 그러면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겠다고 겁박하는 게 가장 잘 먹힙니다. 당장은요. 그렇게 허공에 고정된 수치심은 어느새 한 사람이 실존하는 좌표가 되어 그 이후의 삶까지 똥색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제가 좀 흥분한 것 같네요. 뭐 요지는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도 최선을 다했겠지만 많이, 아주 많이 부족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뭐 이젠 저도 그 문제를 고민해야 할 만큼 나이를 먹어버렸는걸요. 이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좀 더 건전한 방향을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D : 건전한 방향이란 뭐죠?

P : 별 건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남 흉을 보는 것 같아도, 대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며 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유익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봐야죠. 주변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만 하더군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고민할 의지가 없다고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건 좀 아니고요. 운이 좋을 뿐인 줄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하기보다는 저라도 그런 허물을 줄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싶어요. 예컨대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가 혼자서 그 부끄러움을 건전하게, 그리고 도덕적으로 승화시키긴 어렵죠. 승화를 시킨다는 걸 성찰을 통한 극복이라 말할 수 있다면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요? 그냥 잊어버리는 거죠. 지나간 과거 취급하는 겁니다. 편리하고 제법 안전하죠. 그러니 처벌받는 자아를 과거로 폐기하려는 자아분열이 일어나요. 물론 이런 건 전부 제 사견입니다. 다만 스스로 분석했을 때 그랬고, 그 효과인 기투나 보복, 회피 반응이 남들에게도 일관되게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나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강화라는 본능이 작동하는 거죠. 아이는 자신을 처벌받게 한 자신의 면면을 진지하게 숙고할 여유와 역량이 없어요. 그래서 그저 기억 속에 있는 자신의 못난 모습을 하나의 표상으로 삼아 축출하려고 분투하는 거죠. 바로 그렇게 첫 자기혐오가 시작되는 겁니다.

D : 혹시 말씀하신 것 중에 보복이랑 기투는 어떤 의미로 쓰신 거죠?

P : 아, 그건 제가 자기혐오에 의한 세 가지 반응이라 정리한 겁니다. 본질적으로 혐오감은 대상과의 이격을 욕망합니다. 방법에 상관없이요. 증오심이 이격을 바라진 않습니다. 때론 미치도록 미운 대상과 계속 붙어있는 경우도 있잖아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요. 그런데 혐오감은 어떠한 경우든 결국 대상과의 이격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혐오한다면 이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게 가능하려면 일단 자신에 관한 어떤 이미지가 있어야 할 거예요. 막연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게 나다’라고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규정한 바가 있겠죠.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일어나는 반응을 세 가지로 보았어요. 일단 방금처럼 말씀드린 ‘잊어버리기’가 회피 반응의 전형이구요. 기투는 본래 실존주의자들의 개념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그쪽 전공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사전적 정의 내에서 규약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신을 내던지는 존재 방식”을 말하는데요, 그냥 자기를 극복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말하는 겁니다. 자기 계발 같은 거 말이죠. 회피와 기투는 의식의 차원에서만 구분될 겁니다. 겉으로 보기엔 잊어버리고 극복한 건지, 잊지 않고 극복한 건지 구분할 수 있겠어요? 근데 가장 문제 되는 건 보복입니다. 이게 무얼 향한 보복인지 물으실 수도 있는데, 그냥 자신의 제거하고픈 이미지에 대한 처벌 의지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현재의 모든 불운과 불행을 자신에게 귀결시킬 때, 그걸 또한 처벌하는 것도 자신이어야 하니까요. 응보주의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그런 상태를 야기한 제삼자가 자꾸 떠오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대상도 함께 혼내주고 싶지 않겠어요? 그래서 보복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 연상되는 타인에 대해서 함께 일어날 수 있어요. 그렇게 일어나는 일이 증오범죄인 거죠. 일종의 남 탓이지만 주체가 실체로 고통받는 까닭은 그 자신 때문인 거예요. 그러나 그 결과는 천천히 나타나죠. 그 축출하고 싶은 면이 왜, 어디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아요. 고려할 수 있을 정도라면 이미 스스로 극복했겠죠. 그래서 그러한 내적 마녀사냥은 그저 자신을 과거의 어떤 특성에서 떼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거예요. 그것이 연상케 하는 모든 것들까지 연루되어 함께 검열하는 거죠. 처음에 아이를 함부로 가르치는 어른들은 나쁜 버릇이 교정됐다고 좋아라 하겠죠? 자신들이 뭔 짓을 한 줄도 모른 채요. 아, 근데 가만히 보면, 그런 어른들도 대개 똑같아요. 그러니 그건 일종의 자가복제인 셈이죠. 그러므로 아이는 그저 자신의 성격 일부를 검열하고 축출한 게 아니에요. 그 당시와 연루된 모든 사실과 그 맥락, 그 속에 공존하는 타자까지 축출하는 거죠. 그런데 어른의 태도가 항상 공정하고 일관된 것마저도 아니죠. 사실 그러긴 쉽지 않아요. 성인군자 발끝에도 못 닿는 사람이 대부분인 게 당연하니까요. 그렇지만 아이는 여러 모순을 만나며 자아가 사분오열하는 거죠. 결국 과거의 맥락을 끊어내고 오염된 자기를 배제하기 위한 끝없는 노고에 시달리거나 아주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거죠……. 저도 그런 자기혐오에 깊이 빠져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과정이 꼭 가정교육을 잘못 받아서는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이유는 아주 많아요. 꼭 어른들 때문도 아니라는 거죠. 이 수혈된 미움의 서사는 보기보다 복잡해요. 사실 어른들의 태도도 대개 자기혐오의 일종으로 보이는 게 태반이에요. 그들도 결국 바쁜 일상에 쫓겨 자신을 기르는 데 실패한 겁니다. 그래서 원래는 이웃들끼리 지지해 주는 공동체가 정말 중요한데, 아시겠지만 요즘이 그런 때는 아니잖아요? 그 어른들도 한때는 저 같은 아이였을 겁니다. 그 얼개를 가만히 보면 연민을 안 느낄 수가 없어요. 자기부정이 타자와 세계에 대한 부정까지 함축하는 겁니다.

D : 네. 어릴 때 생긴 트라우마가 성인이 돼서도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무의식에 남아서 가정폭력이나 불안장애 등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P : 무의식이라는 말은 참 편리한 것 같아요. 전 항상 그 말이 뭘 뜻하는지 감이 잘 안 와요. 심리학자가 아니니까요. 저 같은 사람은 그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들여다볼 뿐이에요. 허물을 줄이려고 하는 공부는 정말 끝이 없죠. 말 그대로예요. 하지만 제 안에 깊이 깔린 바닥의 힘과 영향력은 매사 느끼고 있어요. 언제부턴가 저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는 감각에 시달렸어요. 그 생각을 반증할 객관적 증거가 점차 제 하루에서 일소되어 버리는 악순환을 경험했고요. 그건 세계가 적개심을 가지고 분노하는 폭력 그 자체라는 실감입니다. 세상은 나를 미워하고, 어쩌면 그럴만하다고 그릇된 수긍을 하는 거예요. 저도 그 생각이 부조리하다는 걸 알아요. 그러나 머리 한구석에서 그따위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러니 제 세계에는 ‘악하고 믿을 수 없는 타인’, 혹은 ‘방식이 부적절함에도 사랑해서라 주장하는 타인’을 상정하기 훨씬 쉬워요. 왜냐하면 우선 저 자신이 그 모양이니까요. 세계는 일관성을 상실한 것들로 표상합니다. 그런데 그건 혐오스럽게 저 자신에게 붙어있는 허물을 벗겨내는 과정이 두서없이 투사된 것이었어요. 그래서 자기혐오에 빠지면 현재의 자아상을 초극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해요. 극단적으로 술을 마실 때도 있고요. 무언가에 중독되기 너무 쉬운 것도 있죠. 어제의 나를 오늘로부터 소외시키려 과거라는 불구덩이에 현재의 자신을 던져버리고 피어난 힘으로, 다시 미래로 도피하듯 자신을 내던지는 불안한 추격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이를 두고 자기 자신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고 지적하면 안 됩니다. 이는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여유가 없는 편에 가깝죠. 결국 오랫동안 피해망상에 시달렸습니다. 아시다시피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세계관에 집착하고서 놓고 싶지 않아요. 참 이상한 노릇이죠. 자신에 대한 악평을 스스로 수용하려고 제게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멍청이나 사기꾼으로 만들었어야 할까요? 하긴 그들이 실은 적대적이고 악의에 찬 사람들이라야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때문이겠죠. 즉 자기혐오와 증오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런 믿음은 다시 그다음 행위의 토대가 돼요. 그렇게 자신에 대한 일관된 인식을 유지하면서 세계를 판정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판단 누적이라 부를 수 있겠죠? 복잡한 일도 아니에요. 사실 자연스럽게 꾸준히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옛날엔 체계적으로 저를 왜곡하고 세상에서 소외시키는 것이 왠지 더 편했어요. 뭐, 편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러웠다고 말해야겠죠? 뭔가 자신에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것처럼 여겼거든요. 심지어 겸양의 일종으로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실은 순전히 실망하기 싫어 기대도 안 하는 태도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순교자 서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세요? 세상사를 억압받는 이의 서사로, 적대관계 속에서 상처 입은 영혼의 참회를 위한 끝없는 고행으로 여기는 입장이 되면 벗어나기 어려워요.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마음속 풍경이 내 입가와 시선에 비쳐 현실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죠. 이미 잠재적 적대자로 상정된 타인들도 절 좋게 봐줄 수 없었을 것이고요. 결국 서로 진짜 미워하는 일만 늘어나는 겁니다. 그저 개인적인 불운으로 생각해도 됐을 텐데. 왜 삶의 저변을 이루는 법칙이라 추상하여 세상을 악의 소굴이라 단정했을까요? 요즘 뉴스에서 서로를 찌르고 죽이는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나네요. 옛사람들 말마따나 모른다는 사실 혹은 단정할 게 아니라는 사실을 견지하고 감내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그냥 머리로 알고 있는 정도로는 부족해요. 제 근본적인 관점과 태도가 되어야죠. 그러나 정신없이 살면서 변화를 직면한 입장에, 남과 나를 단정하지 않기가 쉽지 않아요. 판단을 유보하기보단 허술한 가설이라도 세우는 게 훨씬 안심이 되는 거죠. 사실 선입견은 쓸모가 많아요. 대비할 수 있잖아요? 지인들은 물론 가족과 친척들이 날 무시하며 ‘틀려먹은 놈’ 취급한다고 여기는 원흉이었지만요.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아도 이미 꼬투리를 잡을 생각뿐이니 대화가 통하지 않게 돼요. 그러니 그들이 오히려 피해자인 경우가 많았어요. 제게 집요한 괴롭힘과 학대, 모욕을 당한 이도 있어요. 제가 스스로 지워버리고 싶은 어떤 그림, 그 그림에는 제 일부가 들어있어요. 그것이 투사된 사람도 내 주변에서 치워버리거나 제거하고 싶은 충동이 자꾸 생겨요. 예전엔 그 상황을 냉정히 살펴볼 수 없었어요. 너무 바빴거든요. 왜 싫은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죠. 아니 그럴 필요를 못 느낀 거예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나를 수식하는 세계에 관한 뒤집히고 타락한 결벽증임을, 철없고 비겁한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자책만 할 뿐 사랑하는 게 없는 삶에 죄는 항상 다시 문을 두드려요. 그렇지만 그 버르장머리를 언제나 엄밀하고 객관적인 태도라 자부하는 오만이 내 손짓과 발짓, 내 혓바닥과 눈빛으로 내 세계와 잇는 다리가 되면요, 그 현실과 판단을 일치시키기 위해 자신이 딱 그 정도인 사람으로 스스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 생각들은 결국 일상에서 남들을 배제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이었어요. 저 자신과 일상을 통제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라고 할까요? 세상은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라며 자신 외의 모든 것을 배척하여 깨끗하고 안전한 왕국에 살고 싶어 하는 옹졸함이죠. 겉보기엔 타인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것들을 몰각하며 자신을 노예 삼는 짓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는 그 외양만으로 알 수 없어요. 저를 수식하는 것은 언제나 자의식의 외부로부터 오니까요. 개성 자체도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적 맥락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기애에 관한 여러 슴슴한 조언들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라고 함부로 말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은 해봤을까요? 전 양심상 그럴 수 없어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에 이미 일련의 무언가를 제 서사로 헤치고 묶는 해석이 뒤따르기 마련이죠. 그건 언제나 절 둘러싼 세계에 기대어 이루어져요. 예를 들어 제가 누구인지 말할 때, 보통은 ‘나는 어디에 사는 누구’ 라거나 ‘나는 어떤 일을 하는 누구’라 하잖아요? ‘어디에’나 ‘무엇을’ 같은 외부 요소들은 절대 빠지지 않아요. 저를 말하는 일은 실제로는 세계를 빌리는 일인 것이죠. 만일 누가 갑자기 제게 누구냐고 물을 때, 미치거나 화가 난 게 아닌 한 ‘나는 나’라는 식으로 답하지는 겁니다. 설령 재귀적으로 답했다 해도, 그 말속에조차 여전히 ‘일정한 맥락 속의 나’를 은근히 포함하고 있는 셈이고요. 따라서 저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 곧 제가 속한 세계를 기술(記述)하는 일이 돼버립니다. 요컨대 ‘나’라는 건 세계와 분리된 채로 홀로 선명히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해석되고 규정되며 관계 맺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나 이건 세계가 제 자의에 갇힌다는 말은 아니에요. 제가 세계와 연루되어 있다는 뜻이죠.

D : 그렇군요. 네. 뭐,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약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혹시 방문이 어렵더라도 연락을 하시면 화상으로도 상담이 가능하니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P :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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