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_ 춘(椿) (Ⅱ)
봄볕에 관해 연구하던 그림쟁이의 수채화 같은 교정이 승달산을 배경으로 조금씩 드러났다. 수줍음이 많은 그는 이곳저곳 사람이 거닐도록 캔버스를 군데군데 비워두었다. 그 공백으로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듯하다. 나도 교정에 대충 차를 세우고 그 소심한 구석구석을 따라 거닐었다.
살과 닿을 만큼 가까운 꽃들이 포근해 보인다. 모교의 소박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입구에서 중심부 분수대가 있는 광장까지 주욱 이어지는 벚나무와 주변의 잔디밭, 그리고 군데군데 튤립까지 화사하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채 브로치에 눈이 가듯 그 붉은 차림새에 자꾸 눈이 간다. 학교는 담을 대신해 플라타너스와 메타세쿼이아를 심었다. 잔디밭은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로 북적인다. 반팔 차림 한 학생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려니 내 얼이 한눈을 팔며 한 걸음 느리게 따라온다. 늘어선 강의동엔 희한한 색감이 더해진다. 줄줄이 파도치듯 길을 따라 붉게 몰려온다. 주말이라 그런가? 교정을 거니는 사람은 여럿이지만 봄기운은 한 가지다. 대체로 평온하고 상기되어 보인다. 한 몸 같은 그 공간 속을 두둥실 떠다니는 이들 사이로 헤엄친다.
봄바람이 제법 거셌다. 학교는 승달산을 병풍처럼 둘렀는데, 그 엄혹한 성격에 매번 바람을 머금고는 거칠게 토해내기 십상이다. 그곳의 지난겨울은 바람의 소굴이 되어 잔뜩 움츠리게 하는 힘으로 고립을 위로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꽃잎을 털어내는 풍경으로 바뀌어 가볍고 사뿐히 뛰노는 아이들의 발아래로 쏟아져 내리며 분홍 카펫을 놓는다.
이 계절의 꽃눈을 보며 닫힌 겨울의 마음에 이제는 됐다며 바람을 들인다. 커다란 벚나무가 꽃잎을 사방에 털어댄다. 내 걸음이 절로 멈추고 쓸려 내리는 꽃잎이 물비늘처럼 반짝인다. 복락을 빌어 이곳까지 잘도 왔구나. 녹지 않을 것 같던 마음도 언젠가는 녹는구나.
저 반짝이는 작은 거울들은 무엇을 비추고 있을까? 소소한 사연을 적어만 뒀다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나 보다. 매달렸다 풀려나 끝내 추락하는 여정에 단 한 번의 바람만 불었을 뿐인데. 공연스레 처연해지는 마음의 귀밑머리를 그것들이 무수히 간지럽힌다. 내 상상을 자극하며 그 끌어당기는 힘을 느껴보라 한다.
그들도 나처럼 중력에 끌려 자신의 근원과 멀어지며, 떨어져 발과 바퀴에 밟히며 남들의 웃음 띤 그늘에 놓여있다. 그 웃음은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매년 있을 봄날은 어차피 한두 달도 못 되어 다 변하고 없을 터다. 요즘은 여름이 이르다.
삶이란 얼마나 관점에 종속되는지 모른다. 사물의 개념을 다루는 그 조리개의 임의성은 도저히 거스를 수 없다. 그러니 닥치는 대로 지식을 주워 삼켜 마치 어르고 달래듯 이 제멋대로인 주관을 다스려야 한다. 이성은 합리를 인식하도록 저 상류로 나를 이끌지만, 문제는 내가 어디 서 있냐에 따라 상류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점차 우울감 전체가 세계와 나의 관계에 관한 실존적 병리 안에 있음을 체감했다. 즉 어떤 착오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와 이 세계에 관한 해석의 오류, 그리고 섣부른 자기규정으로 나를 소나무 껍질처럼 흉하게, 거칠고 투박한 모습으로 찌그러뜨려 놓는 것이다. 너무도 오랜 시간 세계에 대한 나를 끊임없이 무어라 판정한 결과, 마치 그 껍질이 나무의 성장과 더불어 층을 더하며 두꺼워지듯 그 병리적 감정도 내 모든 구석구석에 서려버린 것이 아닐까?
경험은 앎의 소중한 자산이지만 믿음은 태도로 드러나며 경험의 색채도 바꿔버린다. 그 태도 때문에 경험이 왜곡되지만, 그것은 다시 사실로서 앎의 먹이가 되어 결국 삶의 뱃머리를 이상한 쪽으로 흘려보낸다. 그래서 내가 어떤 걸 믿고 있는지 그 얼개를 세심히 살피지 않고서 배우고 익히는 데만 천착한 것은 분명 실수였다. 기준이 될 믿음과 가치관을 바로 세워 스스로 세계를 변별하기 위한 상수가 되어야 했건만, 나야말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변수가 되어버렸다.
시간은 범주이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안팎을 나누는 얇은 경계는 다시 안쪽으로 끝없이 분열하며 불가분의 현재로 수렴한다. 그리고 그 종단에 ‘나’라는 의식이 있다. 정신은 그 경계를 타고 넘나들며 사계절을 의미 지운다.
계절의 속성으로부터 의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린다. 닫아걸라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그것의 소리가 닫힌 사람의 상처를 강제로 열고 헤집는다. 나 같은 이들에겐 그 벌어진 상처에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리 열려있는 사람은 아픔 없이 그 경계를 넘을 수 있었을 것이다.
범주는 지성의 밥줄이다. 분별력의 근육이 커지는 데 필요하니까. 그러나 그것은 또한 섬세한 감성의 탈을 쓰고 있다. 의미를 가리키는 손끝의 예민함만이 그것의 적절함을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냉정함을 함부로 믿다가 지나치게 무던해진 사람은 결국 세계의 의미도 몰각해 버린다.
그때의 부정적 감정, 특히 자신에 대한 그런 감정들이 내게 다가오는 미래에 속한 것들을 부정적으로 선취하며 끝없이 긴장하게 만들던 지난날. 앞으로 이런저런 역경과 수치스러운 고통이 따를 것이라며 미리 준비하려 몸은 발악한다.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생각 다발이 내 몸이 취할 반응을 반복적으로 엮어내면서 몸의 모양마저도 마음 따라 변해간다.
내가 자기 자신을 혐오함으로써 끊임없이 회피하고 기투하다가 종국에 보복으로 이어질 그 순환에 매이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세계와 나의 관계에 대한 평범하고 단순한 문장들이 날 그렇게까지 무너뜨릴지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다.
모교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가려던 카페로 들어섰다. 사장님은 여전하셨다. 난 간단히 안부를 여쭙고 자리를 잡았다. 드립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내가 커피의 매력을 처음 깨달은 곳도 그곳이다. 좋은 커피는 늘 향이 젊다. 항상 맛을 앞지르며 비강을 가득 채운다. 혀의 가장자리로 묘한 달달함이 남는다.
오랜만에 카페 안을 보니 작았던 공간이 한층 넓어 보인다. 사람이 날로 줄어든다고 하던데 그날은 더 그래 보였다. 점심때는 잠깐 복작였단다. 그러나 교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마저 빠져나가니 그리 한산해졌다. 쇠락하는 지역이었다. 나는 사장님과 단둘이 카페를 차지하고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 학교에서 10년도 더 있었으니 대화의 경중이 두서없었다. 날씨가 좋다는 이야기, 근황과 안부를 묻는 이야기, 사람이 줄었다는 이야기, 저 잘되던 가계가 매물로 나오다니 놀랄 일이라는 이야기. 그리고서 좀 전까지 학교 안을 둘러봤는데 꽃들이 예쁘더라는 이야기. 여행계획은 있으신지 등등.
사장님을 뵐 적마다 같은 생각이 든다. 세상의 발전을 견인하는 두 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려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대개 건전한 사람들은 제 몸의 건실함보다 사랑하는 이들의 안녕에 몰두한다.
마음의 시간이 이제는 빠르게 흐른다. 늦봄에 둘러싸인 작은 창에 기대어 나는 밖을 본다. 벚나무의 화경(畫境)이 빠르게 지워지고 비워진 자리에 파릇한 새순이 올라온다.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는 벌써 풍성하다. 아직 어린잎들에 햇살을 받아서 말랑말랑한 연둣빛 물이 올라오는 계조(階調)도 어여쁘다.
나무에게 세계가 메아리친다. 계절이 바뀌면 가장 먼저 몸을 흔들고, 바람결이 달라지면 잎의 결도 따라 바뀐다. 나무는 자기 안에 계절을 들인다. 어쩌면 그 모습도 나의 그림자일까? 사건은 지나가지만 감정을 남기고, 그것은 다시 흔적이 되어 생각으로 굳는다. 그러다 문득 내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파문처럼 일상을 구석구석 흔들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무는 제 자리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도 세상의 가장 먼 바람과도 닿는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온기를 느끼고, 가지는 저마다 방향을 달리 한 채 구름과 햇빛을 더듬는다. 어떨 땐 옆의 나무에 기대어 자라고, 어떤 잎은 바람이 스쳐 간 방향을 기억하며 떨린다. 그렇게 나무에 세계가 담긴다.
『장자』에는 8천 년을 살았다는 춘(椿)이라는 나무가 나온다. 장주의 우화에는 ‘쓸모없는 나무’에 대한 비유가 자주 언급된다. 그 나무들은 거의 항상 크기만 할 뿐 재목(材木)으로 쓰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장주는 그런 점이야말로 나무 자신에게 가장 유익하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난 제아무리 비유라도 적절한 말일지 의문이다. 재목(材木)으로 못 쓸 거면 땔감으로 쓰면 안 되는가? 살아남기에 관한 억지가 아닐까?
저 밖의 나무들은 하나하나가 내 마음속에 춘(椿)으로 자라고 있다. 다만 그것들은 장자의 말대로 쓸모가 없어서 생존하는 게 아니다. 그 나무의 잎이 특별히 독한 냄새가 나거나 그 재질이 엉망인 것도 아니다. ‘문을 짜면 수액이 흐르고, 그릇을 만들면 곧 썩고, 배를 만들면 가라앉는’ 정도도 분명 아니다.
전에 한 절에 들러 중정을 차지한 거대한 나무가 금줄에 감겨 우뚝 서 있는 걸 보았다. 과연 오래된 흔적이 가득했다. 웅장했지만 줄기 아래쪽부터 이리저리 갈라지고 패여서 볼품이 없었고, 잎은 그저 평범했다. 아마 그의 꽃도 평범할 것이며, 열매는 적어도 다람쥐나 바구미에게만 유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사실 그의 쓸모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시대를 통찰하고 있어서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그렇게 오래 살아있는 이유는 그저 이웃들이 그의 존재(存在)를 기꺼워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어떤 나무도 완전히 쓸모없긴 불가능하다. 하물며 장작으로라도 못 쓸까? 그에게 난 구멍에는 새나 다람쥐의 둥지가 있을 것이고, 그의 무성한 가지 사이에도 새들이 둥지를 틀었을 것이다. 그의 잎이 아무리 독해도 그것을 먹는 애벌레가 배를 채우고서 여름이면 멋지게 우화 할 것이다. 또한 더운 여름에는 매미와 풍뎅이가 그의 수액에 취할 것이다.
뿌리 사이에는 구멍을 파고 살아가는 두더지와 너구리 가족이 있을 것이고,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곳을 지나가는 동물들과 사람이 비와 벼락을 피하러 찾아들 것이다. 여름엔 그늘이 되고, 가을엔 푸르고 맑은 하늘을 즐기러 찾아온 가족들의 행복한 시간을 뜻하리라. 혹은 어느 한가한 사람이 낮잠을 자러 오고, 겨울엔 연인들의 사진 속에서 한자리 차지할 것이다.
그가 존재함을 기껍게 여기는 이들이 그의 세계를 채우고 있으므로 그는 실제로 존재한다. 만일 그를 값비싼 땅을 차지한 성가신 존재라 불평하는 사람들 틈에 있었다면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실존은 그에게 허용된 가치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8천 번의 봄과 가을은 그의 존재감을 긍정한 타자들이 함께 이룬 시간이다.
춘(椿)도 처음엔 작은 씨앗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겨자씨만 한 존재가 그저 우연히 양지바른 언덕에 떨어져 좋은 흙에 뿌리를 내리며 홍수와 가뭄, 싹을 먹는 짐승들의 위협을 피하며 자라난 것이다. 그에게 가장 큰 행운은 그저 불운이 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살아남을지는 어쩌면 강하고 약함의 여부에도 무관하다.
춘(椿)이 웬만한 사람보다 크게 자랐을 때 땔나무를 베러 온 나무꾼의 눈에 띄지 않은 것도 천운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주변에 지어진 집주인이 병풍 삼을 나무를 바란 것도 행운이었으리라.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집주인도 떠나고 빈집은 스러져 곧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춘(椿)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러나 그땐 제법 웅장해진 그였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그의 앞에 묫자리를 썼다. 언덕배기 아래로 완만히 뉘어진 경사에 묘가 생기자 춘(椿)이 그 뒤를 지키게 되었다. 그는 가지를 펼쳐 언덕 아래를 굽어보는 묘의 뒤편을 가려주었다. 그렇게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 성묘하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봉분은 낮아지고 관은 그의 뿌리에 닿아 부서졌다.
어느덧 그의 크기는 산을 굽어볼 만큼 커졌다. 이를 귀하게 여긴 사람들이 그를 사당나무로 모시면서 다시 영겁 같은 시간을 살게 되었으리라. 그는 사방으로 뿌리와 가지를 뻗는다. 사방으로 빛줄기가 뻗어나가듯 그의 존재감도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의 뿌리는 땅속 사방으로 거침없이 뻗어가며 흙 속에 구멍을 내고 물을 빨아들인다. 덕분에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이 생겼다.
그의 가지도 거침없이 하늘로 뻗어나간다. 그의 가지 끝엔 잎과 꽃, 열매가 자란다. 새들과 날벌레들이 그의 품을 찾는다. 그러든 말든 뻗어나가는 가지와 잎은 태양을 좇는다. 삶의 의지와 생물의 기능은 연루되어 있다. 사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나 뿌리에 속한 그 어떤 것도 새들이나 벌레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만든 그늘은 단지 그 자리에 그가 존재함으로써 생긴 것이지 그의 곁을 지나는 누군가의 쉼터가 되려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저 자기 본위대로 자리함으로써 연루된 것들이 그를 그대로 있으라고 한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춘(椿)을 마땅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다. 그가 쓸모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존재하는 게 그의 근본적인 쓸모이기 때문이다.
나는 춘(椿)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 속에서 실존하는 두 가지 방식을 생각한다. 하나는 주변을 향해 완전히 열려 존재하는 것이다. 춘(椿)은 사방으로 뿌리와 가지를 뻗어 세계를 그대로 맞아들인다. 물론 그의 실제 의사랑은 상관없을 수 있다. 그저 나무이므로 나무의 전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경우는 주변과 단절하거나 언제든지 숨을 수 있는 폐쇄된 자리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궁전 같은 집일 수도 있고, 권위나 지체 높은 신분일 수도 있다. 단순히 주변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한 게 아니다. 자기 본위로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다. 다만 세계와 연루된 실존을 의식적으로 열심히 부정하며 사는 건 다르다. 우리의 모습은 어디쯤 있을까? 우린 어떤 전형을 따르는가? 춘(椿)처럼 사방으로 자신을 열어 펼치는가? 아니면 사방에서 자신을 거두고 닫아거는가?
춘(椿)이 끝없이 뻗어나가며 자신에게 담긴 세계라는 그늘을 드리운다. 나에게도 그러한 세계가 담긴다. 내가 향했던 모든 시선, 들려왔던 모든 소리, 감각으로 남는 흔적 하나하나가 어느새 내 안의 풍경이 되고, 감정이 되고, 생각이 된다. 세계는 바깥에 있는 게 아니다.
도심의 경계에 두루 심어진 나무들도 그들의 운명대로 그늘을 만들어간다. 그들은 심은 사람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자기대로 서 있다. 뻔하고 단조로운 것은 심고 가꾸어 누리는 사람들의 생각이지 나무 자체가 아니다. 사물의 효용은 얼마나 임의적인지. 쓸모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별개로 계절마다 속한 것들은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사람은 경험의 가지를 쳐내고 남은 것들로 자기 자신을 구성한다. 그 과정이 타당하든 부당하든 결국은 삶이라는 텃밭을 넓혀가게 만든다. 거기서는 채소도 과일도 얻는다. 결국 그럴듯한 인생관이란 아이들이 질색하는 강장제 같은 것이다. 그래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유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데 큰 위로가 된다.
그런데 해석엔 표준이 필요하다. 특히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부여하는 의의는 특히 자의적이다. 이는 나쁘게 말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단 한순간이라도 주관성의 경계를 제대로 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다. 우리가 소통을 통해 방법과 형식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객관성은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담보되는 것이지 이웃에게 물어보고 동의를 구해서 확보되는 게 아니다.
나의 창에 균열처럼 자라난 저 나무의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어느새 내 발밑이다. 그로부터 길게 늘어져 볕을 향해 뻗은 가지 끝까지 눈으로 더듬거린다. 그것은 자신만의 기묘한 모양을 취했다. 어쩔 땐 내가 뿌리를 두고 있는 흙이 정말 나의 것인지 타인의 것이었는지 헷갈리곤 한다. 어쩌면 나의 고유함이란 이웃들을 온전히 비추고 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필연성이다.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연이나 실수, 착오가 아니라 이미 세계의 구성에 참여하고 위치한다는 뜻이다.
벚꽃의 낙화는 가지 끝에서 톡 떨어져 봄바람의 결을 따라 활공하며 가슴에 떨어지는 작은 거울들, 빛을 받아 허공을 물비늘처럼 채워 그들이 떨어진 자리에 새순이 남았어도 괜히 찾아드는 안타까움. 그러나 발을 떼고 눈을 들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웃들은 다 잊어버린 듯 초연해 보인다. 내 착각인가? 머리를 흔든다.
목포로의 짧은 여정이 몸과 마음을 뭔가로 채웠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그저 몸에 닿는 모든 것이라 해두자. 그것들이 내 안을 헤집는다. 내 안에 또 다른 세계를 잉태시키는 것일까? 향기와 감촉, 정경이 면면히 외면치 못하도록 나를 과거에서 잡아 뜯는다. 내 저항은 그저 소심히 움츠리는 정도다. 그 순간 내가 알던 나는 어디로 가버렸나. 수치스러움은 식어버린 커피의 검은 표면에서 방황한다.
옛일은 공간에 서사로 겹겹이 드리우는 회상, 일곱 평 남짓한 그곳에서 한 개 테이블을 차지하고서 두런두런 작은 목소리와 드문드문 잔이 닿는 소리가 그것의 일부가 되어 목구멍을 넘어간다. 깃털 같은 이야기로 채워진 독백 같은 대화가 오간다.
갑자기 떠나간 사람들이 드물게 떠오른다. 예전엔 수없이 마음으로 고백했다.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서 그들이 떠나갔다고.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마음의 무게만큼 우리를 가깝게 해 줄 중력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꽃잎처럼 가벼운 그들에겐 추락이나 매한가지인 줄도 모르고 가여운 날갯짓으로 도망쳐버린 이들을 왜 그렇게 원망했을까?
사실 이런 희미하고 거창한 추상이야말로 우리처럼 맥락 있는 존재들이 교훈을 얻는 방법이다. 다만 사람의 추상에 개성 넘치는 색조를 더하거나 구석에 조그맣게 주석을 다는 일을 신중히 하고 싶다. 잘못했다간 나이를 먹어가며 사는 일을 단정하고 재단하려는 강렬한 욕망에 어린것들을 함부로 가위질할지 모르니.
전북 군산에서 새만금을 지날 즈음이면 슬슬 풍경에 눈이 가기 시작한다. 라디오도 켜지 않아 노면에서 올라오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런 방식은 의외로 졸음운전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다. 외면할 수 없는 것만 조심히 건져 올리는 감각의 편식이 되레 졸음을 깨운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는 단지 공간이 변한다는 것만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봄이라는 시간을 이 지상의 표층에 점점이 드러나는 흔적 없이 실감하기 어렵다는 것도 보여준다. 분홍과 노랑, 연둣빛 계조는 상경하며 점차 삭막해진다.
서울은 벚꽃이 조금 늦었다. 그래도 만발한 정경이 눈에 띄자 그제야 비로소 이 계절이 내게도 도착한 기분이다. 계절은 내가 익숙해서 지나쳐버리는 곳곳을 채울 때 도래한다. 그러므로 봄꽃도 일상의 터전에 피어나 나를 실감케 한 이 순간에야 내 봄을 알리는 것이다.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부터 벚꽃은 조금씩 시차를 두고 피어왔다. 그런데 어떤 나무는 진작 만발하여 꽃비를 뿌리는데 어떤 나무는 가지에 아직도 꽃망울을 움켜쥐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놓인 것들이 어찌 이토록 각자의 리듬을 가지는가?
봄이 막바지인 어느 늦은 오후, 집 근처 하천 산책로를 혼자서 걸었다. 물가 말라붙은 진흙 위엔 떨어진 꽃잎들이 볼품없이 널려 있다. 우린 변화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이런 감상들을 경시한다. 그러나 그 너머의 사계도 주어진 것들에서 뽑아낸 가장 크고 좋은 감상일 뿐이다. 종종 물이 들었다 나가면 그것들도 떠올랐다 가라앉거나 하천으로 흘러간다. 실은 모든 게 새롭지만, 짧은 감흥 뒤로 함부로 익숙하게 느껴버린다.
과거를 망각으로 떼어놓는 현재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말라붙은 땅에 붙었다가 함께 바스러지는 붙들린 영혼들은 그 힘에 꼿꼿이 수직으로 서서 살아있는 나무들과 대조를 이룬다. 꽃과 나무가 몌별하는 이 계절마다 누가 붙들고 누가 떠나는지를 낙관 없이 묻는다. 기억에서 겨를 골라내려 애쓴다.
세계는 참으로 진정하고 온전하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완벽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모두에게 숙명의 길이 놓여있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나 같은 사람은 그저 나와 연루된 타자들이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게 곁에서 지지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모두가 각자의 늪을 힘겹게 건너가고 있기에 그런 태도가 흔해지긴 어렵다. 내 이웃들은 대부분 어쩔 땐 가슴까지도 오는 그 숨 막히는 늪에서 진흙을 뒤집어쓴 채 중력에 저항하며 힘겹게 나아가고 있다. 얼굴에 잔뜩 묻은 그 진흙이 곧 그들의 사회적 낯이며 굴레이다. 주변에는 같은 뻘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이 받는 압력은 상당한 것이다.
그 불멸의 영혼들 중 어떤 이들은 고행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신이 얼마나 필연적인 존재인지 잊어버릴 만큼 눈이 멀어버렸다. 서로의 모습을 그려주는 이 일에 회의감을 느껴 점점 더 서로의 초상화에 장난을 치고 있다. 때로는 장난을 넘어 그것을 모독함으로써 자기의 존재감을 앞세우려 한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문제는 서로에게 너무 신경 쓰느라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다움을 망각하고 실존에 관한 책임을 남에게 떠넘긴 결과다. 그렇게 개인은 고독하게 부유하고 사회는 가치가 공유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파편화된 정체성으로 썩어가는 시체로 되어가는 듯하다. 어쩌면 이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의 폐색이라기보다 자신을 돌보지 못한 대가가 아닐까?
내게 올해의 봄은 지난해와 달랐다. 벌어져서 덧날 상처 없이 이미 열려있었기에 봄의 미소가 조소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봄의 범주가 내게로 고스란히 스며들어도 그 무게에 찌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이 더 이상 버겁지 않았다. 즉 봄철의 일상이 이제는 끊임없이 나를 조롱하고 폄훼하는 표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내 일상은 어떻게든 변했는데 세계 자체는 여전히 일관하여 지속하고 있다. 그 표면에 어떤 흠집도 나지 않았다면 대체 전과는 뭐가 어떻게 달라진 것일까? 아마 그것은 내 범주의 모양이, 계절의 모양이, 세계의 모양이 달라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분명 어느 순간 갑작스레 이루어진 변화가 아니다. 그저 발견이 급작스러울 뿐이다. 어느 날 봄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바뀌어버린 모든 것에 화들짝 놀라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며 깊이 탄식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에 포섭된 타자도 변하지 않았다. 즉 내가 생각을 긍정적으로 한다고 해도 실제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세계가 내 권능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망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뭔가가 변했다면 같은 세상에 대한 내 해석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 해석은 그런 질문들에 답을 주었다. 내게 잉태된 세계는 무엇인가? 무얼 의미하는가? 혹은 그 세계가 나를 어떻게 기술(記述)하는가?
그건 나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해석이다. 내가 거닐었던 모교를 다시 떠올려본다. 사실 바로 그곳에서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 그러니 전까지는 그곳에 대한 느낌이 좋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단지 추억으로 희석되어서가 아니라 나와 그곳의, 혹은 그곳에서의 경험과의 관계가, 나아가 내 세계의 한 부분인 그 공간과 그것에 속한 타자의 의미가 재해석됐을 뿐이다. 자의적 낙관에서 벗어나 현실에 속한 관계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며, 내가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시공의 무게를 그대로 느끼는 과정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자신에게 연루된 것들을 한 가닥 한 가닥 살펴보자. 그것은 유쾌한 연결과 불쾌한 연결이 뒤엉킨 실타래이며, 나 자신으로부터 의미를 얻은 것들이 되레 나의 의미를 선언하는 장(場)이다. 이것이 단지 계속되는 부정적 감정이나 생각, 혹은 신경전달물질의 교란만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감과 의미를 부정하는 습관의 화신이 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자기부정으로 현상을 해석하는 짓은 실존적 이율배반을 극단적으로 해결하게 만든다.
치료를 마친 지금은 일상이 제법 가볍다. 올해 봄은 소소하게 내게도 웃음 짓고 있었다. 어쩌면 전에도 늘 웃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 초대에 응하지 않고서 내 입장만 완고하게 지키면서 좀처럼 경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특수한 자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어제로부터 섣부르게 넘겨받은 짐을 제대로 풀어보지도 않고 내일로 떠넘겨버린 게으름 탓이다. 그러고 보면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값어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죽어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은 대가로.
나를 구속하던 마음의 짐과 작별하고서 그 경계를 넘어선 데는 확고하고 넓은 시야를 얻은 덕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가결한 것은 자신이 감응하는 세계를 마주하고서 균형 잡힌 시야를 가질 때까지 관찰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이 세상에 얼마나 오롯이 존재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은 시공을 가로지르며 세계의 이치를 탐색하며 끝없이 뿌리와 가지를 뻗는다. 그러면 거기에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하늘의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면 그들에게 아직 우리가 닿지 못한 하늘의 비밀을 주워들을지도 모른다. 또한 땅속으로 뻗은 뿌리를 통해 두더지나 지렁이가 들려줄 본질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인류는 예컨대 칸트와 같은 이들 덕분에 우리의 이성이 개념의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우리의 근원을 쉼 없이 찾아 헤맨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이 가상에 불과해도 우리는 그것을 좇아 이 세계의 시초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우리의 본성에 대해 실체 없는 허상을 좇는 것이라 조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직하고 견지할 만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일관되고 선량하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영원불멸을 좇을 줄 아는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원인이다. 그것은 결코 덧없는 허상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축한 세계의 의미야말로 밑그림뿐이던 우주를 우리의 힘으로 얼마나 아름답게 칠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어쩌면 각자의 삶은 자신이 부여한 의미만을 갖는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개인의 실존을 중심으로 펼쳐진 세계에 대한 주권을 내포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영원불멸의 신화를 써나가는 사제(司祭)이자 사가(史家)이다. 그리고 사실 그것만이 우리가 어우러진 우주에 대한 보편적 이해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로부터 난 ‘봄’의 진정한 일부가 된 셈이다. 이제는 겉돌며 부유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동화 속 주인공처럼 홀가분하게 웃고 있는. 여전히 묻곤 한다. 나는 지금 봄의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안에 있는가? 늦게나마 반성해서 다행이다. 덕분에 올해 봄은 조금 더 훌쩍 지나갔다. 홀가분히 오늘을 보낸다. 사뿐히 한 발 앞서가 돌아봐 인사한다. 수고했다. 지난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