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닻

제5장 _ 춘(椿) (Ⅰ)

by 노하윤

“하여간 상상을 너무 많이 하게 만드는 인간은 결국 해롭다니까.” 멀어진 사람을 떠올리다 후배를 앞에 두고 대뜸 혼잣말했다.

소화도 안 되던 덧없는 인연을 씹어 뱉은 셈이다. 후배는 점잖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맘 같지는 않다고 위로했다. 살다 보면 갑자기 많은 이들과 멀어질 때가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런 한 해를 간신히 보낸 뒤 한동안 그렇게 괜한 말을 흘리곤 했다. 후회인지 불평인지 그립고 아쉬운 건지 헷갈렸다.

대반동 앞바다 물비늘을 눈이 닳도록 함께 보던 이와 몌별한 채 8개월이 훌쩍 지나고, 벌써 봄이 찾아왔다. 멀어진 한 사람은 빈말을 던지고서 연락이 없었다. 그래도 어느새 제법 후련해져 나도 속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목포 같은 곳은 뭘 잊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도 은근히 예쁜 구석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땐 유달산의 마루며 골이며 벚꽃이 안 핀 데가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은 목포시 대반동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한 카페였다. 영산강 하구는 평화광장에서 목포대교까지 이어져 도시 전부를 떠받친다. 대반동은 서해로 빠져나가는 끝자락으로 목포대교가 훤히 내다보인다. 두 개 층 아래로 아담한 인조 해변이 펼쳐져 있다. 발코니가 바다에서 부는 봄바람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통유리창 너머로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사진을 찍는 젊은 연인들이 흔히 보인다. 한 쌍 연인이 내 시야를 가린 채 난간에 기대어 함께 사진을 찍는다. 앳돼 보이는 여자의 눈빛이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날리며 뒤에서 어색하게 웃던 남자의 얼굴을 간질였다.

목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게 지어진 카페들은 죄다 북적였다. 대반동까지 이르는 길은 목포 IC를 건너 1번 국도를 따라 북항을 거친다. 목포대교를 앞두고 유달산 방면으로 진입하기 직전까지 쇠락하는 중소도시의 삭은 젓갈 같은 건물들이 줄짓는다. 그래도 내가 찾은 곳은 목포에서 전망이 좋은 곳 중 으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식전에 가니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언제나 한산할 줄만 알았던 내가 순진했다. 하기야 한결같아서 뭘 어쩌겠는가? 뭐라도 새것 같으면 나쁠 게 없는 동네다. 그래도 그 후줄근한 동네엔 묘한 낭만이 있다. 자신만의 작업을 하기엔 참 좋은 곳이다. 날씨가 좋아서 대교 너머로 주변 섬들이 또렷했다. 수심이 얕고 파도가 억세지 않아서 바다가 과히 번쩍거린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목포가 부산처럼 거침없는 수평선을 마주 보고 있다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곳은 한반도 서남해안 맨 끝이 아니다. 체감과 달리 서해에 속하고 앞바다는 여러 섬으로 막혀있다. 그보다 위도가 낮은 지역도 전남에 여럿이다. 진도, 해남, 강진, 장흥, 고흥, 여수, 순천, 광양이 연이어 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싼 큼지막한 섬만 해도 압해도, 율도, 달리도 고하도가 있고, 하구 건너편은 영암이다. 카페 창가 쪽에 앉으면 고하도까지 연결된 케이블카가 보인다.

덕분에 목포항은 그럴듯한 국제 항만이라기 보단 파편화된 섬들을 묶는 허브(HUB)에 가깝다. 목포는 그 잘게 찢어진 조각들 한가운데에 있다. 목포항을 나서는 배들은 각각의 섬들에 금방 닿는다. 그리고 곧장 다시 돌아온다. 도시에겐 가까이 사는 이웃사촌들이 너무 많은 격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그곳에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을 관찰하고 숙고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빛이 사방에 부딪혀 산란(散亂)하다가 내 눈에 들어오면 마침내 분별력이 제 기능을 다하듯, 그곳에서 내 정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보일 듯 말 듯 바다 안개 건너에 박힌 섬들은, 닿을 순 없지만 시선에 머무는 사람들과의 일상에 관한 은유다.

카페 안이 점점 시끌벅적해지니 시린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후배랑 근황을 물으며 인조 해변을 잠깐 거닐다가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목포항 쪽으로 차를 몰아 목포역을 거치며 대성동을 지났다. 멀리 언덕처럼 솟은 곳 제일 높은 곳에 산정동 성당이 하얗게 우뚝 서 있었다. 그 완만한 골고다에서 가장 위엄 있는 곳이다. 그 성당 대성전 문 앞에 오르면 근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내게로 오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그 다스림은 온화하니, 너희 자신만의 휴식을 얻으리라.’ 성당 주위가 낮고 오래된 집들로 오밀조밀 채워져 있다.

내가 목포에 간 이유는 오랫동안 뵙지 못한 주치의를 만나 뵙기 위함이었다. 상경하기 직전까지도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약물치료는 중단한 상태였지만 상담 치료는 계속 받았었다. 그러나 상경 후 한 번도 진료를 본 적이 없어 혹여나 하는 마음에 방문했다. 사실 그다지 심각하다 생각지는 않았다. 거의 5년 넘게 치료를 받았기에 그 병에 관해 제법 알았기 때문이다. 난 식사를 마치고 후배에게 볼 일이 있다고 헤어진 뒤 의원으로 차를 몰았다.

우울증은 내게 시간에 관한 특유의 관점을 주었다. 사실 지난봄은 내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지독히도 떠나지 않았다. 그 체류하던 계절은 공허하고 고통스러운 감옥이 되어 나 자신이 무의미하고 혐오스럽다 속삭이듯 선명한 대비만 보여주었다. 저기 벚나무 아래엔 그리 손님이 많은데 나는 돌아보는 사람 하나 없이 버거운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느낌이다. 봄과의 불편한 동거는 계속된다. 자꾸만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 부정적인 확신에 기름을 부었다.

사실 그 병으로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남에게 업혀 다닐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던 까닭일까? 심지어 지금도 우울증을 하소연하는 게 나약한 자기연민으로 여길 때가 있다. 분명 나만 그러리라 생각지 않는다. 나이 든 편견일지 모른다. 강인한 의지만 있으면 훌훌 털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우울증은 무슨 영적 타락 따위가 아니다. 근면함에 대한 도덕적 반항도 아닌 신체적 병변일 뿐이다. 그런 편견을 가졌던 한 지인은 내게 나약해지지 말 것을 늘 주문하며 본인도 타이레놀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이야말로 병원에 먼저 가봐야 할 사람이었다. 자신을 계속 괴롭히더니 시꺼멓게 죽은 낯빛과 동태눈으로 망령처럼 사는 걸 그 자신만 몰랐다.

나도 분명 그런 고행중독에 시달렸었다. 그러나 정신질환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몇 번 겪어보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 상습적인 무기력증이나 인지기능 장애 탓에 일이나 공부는 물론, 일상생활도 어려워지면서 헤어날 길이 없어진다. 나도 그 후로 의지박약을 함부로 손가락질하는 게 외람된 짓임이 안다.

삶에 대한 건전한 관점을 갖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에 대한 둔감함은 일상을 사는 데 확실히 쓸모 있다. 복잡한 생각 없이 남이 시키는 일에 충실하며 살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통장도 두둑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는 요소들이 미세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들, 취하지 않았을 결과들이 모여 몸과 마음을 망친다.

내가 처음 느낀 불편함이란 고작 활자가 잘 안 보인다는 정도였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 여느 때처럼 자료를 읽다가 견딜 수 없이 불편했다.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잔뜩 예민해져 여러 자잘한 문제에 집착했다. 분명 인지기능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 결론 내렸다. 그때처럼 화가 났던 적도 많지 않았다. 무얼 향해 화가 난 건지도 몰랐다. 왜인지는 몰라도 일을 못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당장에 학교를 나서서 목포 시내 정신과를 찾았다.

목포시 하당동은 영산강 하굿둑이 보이는 평화광장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격자로 구획된 곳이라 어딜 가나 일자로 뻗은 도로를 만난다. 방문한 병원에선 교차로 건너로 스타벅스가 보였다. 도로는 그리 넓지도 않은데 유달리 웃자란 가로수만 빽빽하다. 지금도 그곳을 지나면 그때와 같은 모양의 그늘 밑을 지날 수 있다.

이동하던 중 처음 내원한 날이 떠올랐다. 아주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초여름을 막 넘겼지만 상쾌했다. 가로수로 채워진 도로 위에 무성해진 어린잎들 사이가 별빛처럼 반짝이고, 난 그늘진 아래에서 걸어 다니는 허수아비 같았다.

첫 상담 때 이야기를 한참 듣던 의사 선생님은 간단한 우울증 진단 테스트를 권했다. 사실 정신과가 처음이 아니었고 그 테스트도 해본 적도 있었다. 예상과 달랐던 것은 우울증 정도가 다소 심각하다는 정도였다. 선생님께선 대강 다른 사람에게 끌려오기 직전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약을 먹었다. 처음엔 쌀알만 한 알약이 뭐 대단한가 싶었다. 그러나 약을 먹으면 확실히 인지기능과 집중력이 좋아지고 부정적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예전에 온갖 잡생각으로 시름하던 것이 덜해지니 금방 나을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그러나 뿌리 뽑기는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증상이나 조금 나아질 뿐이었다.

형식적인 의미의 치료는 특별할 게 없다. 상담받는 동안 내 얘기를 열심히 늘어놓고는 쌀알만 한 약을 챙겨 먹는 게 전부다. 처음에 받은 녹차색 알약은 입에 넣을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약물과 대중매체에 나오는 무성의한 조언들, 무슨 말인지 당최 와닿지도 않는 자기애의 설교들로 고해(苦海) 위를 표류하길 멈출 수 있을까? 다만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제야 신경 쓰였다. 항상 우울감과 울분에 가득 차 있는 내 안의 아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명이 밝아오며 어둠 속에서 타르처럼 들끓던 시궁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들도 처음엔 평범하고 온건한 생각과 감정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환기도 되지 않게 꽉 막힌 그곳에서 점차 곰팡내를 피워가며 뒤섞이고 짓눌리다, 마침내 짓물러 흘러내리는 고름 덩어리가 되었다. 이는 실제로 인간사에 편재(遍在)된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나처럼 어떤 상황에 이른 즈음에야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매일 거울을 보며 느끼는 불편함, 혹은 불쾌함의 실체가 단지 낯설어서가 아니라는 확신으로 굳는 순간이다. 세계와 나를 가르는 그 사이에 더러운 양말을 쑤셔 넣어놓아 완충제로 썼던 과거들이 바야흐로 수술대에 오른 셈이다.

거울 속 자신과의 관계는 세계의 이름이다. 그 얼굴을 보자. 거기에 누가 혹은 무엇이 있는가? 가족이나 친구, 연인을 보았을 때처럼 편안하고 친근하며 어여쁘다면 당신의 에덴을 나서며 아담처럼 세상 만물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리라. “나는 모든 것들 위로 비치는 빛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나아갔다 다시 돌아온다.” 다만 공허한 낙관은 안 된다. 이유가 있어야 한다. 머리에 애써 꽃을 피운다고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다. 무늬만 긍정으로는 영혼의 겨울을 데울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너무도 철없던 나는 그 거울과 별로 친하지 않았던 부류였다. 그 따위 행실로 여러 장을 깨 먹으며 금이 간 세계를 살았었다. 그 파편을 하나하나 다시 붙여나가며 무엇을 배운 걸까? 그것들을 다 붙이고 나서 돌이켜보니, 이는 얽어서 흉 진 나를 만나는 일상이 괜찮아지는 과정이었다.

이 문둥이의 살을 째기 위해 처음 내원한 날은 그지없이 화창했다. 그런 화창함은 나 같은 사람들에겐 일종의 적의(敵意)다. 모든 밝은 것들은 내 삶을 조롱하는 대비가 된다. 이는 주관적 문제를 미봉하려 쌓아놓은 지식의 베일을 찢어버린다. 그러고는 도끼눈을 감추려고 냉철함과 이성을 애써 신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가면극에 불과하다.

어쩌면 거의 항상 우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치료를 받기 이전엔 알 수 없는 적개심이 자꾸만 날 살아있게 했다. 이를 위화감 없이 품고 살 수 있었던 까닭은 우습게도 나 같은 사람이 세간에 흔했기 때문이다. 즉 내 짧은 소견으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울분의 이성(理性)이야말로 다수의 심상(心狀)이다.

그 뿌리를 뭐라 불러야 하는가? 끊임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기억들, 그리고 생각과 감정 탓에 자아가 무언가와 유리돼 버린 것일까? 경험은 나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도식이 어쩔 수 없이 중심과 원주의 그것처럼 나타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관성의 그림자가 그만큼 짙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런 주관성이 벗어날 길 없는 현실이라면 내가 그 벽면을 더 정성스럽고 사려 깊게 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아이는 손에 쥔 크레용을 멋대로 써버렸고, 여태껏 아무도 그걸 말리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주변과 특별히 관계가 안 좋았거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 상황이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나 자신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타성을 이기는 자의가 없어서 남들이 눌러놓은 대로 살았던 게 아닐까? 심심치 않게 자살하면 편해질 거란 생각을 하거나 내 머리에 총을 쏘는 상상에 빠지는 게 왜 그리 자연스러웠을까? 그것은 서로를 바라보며 남몰래 죽어 사라지길 바라는 남들의 마음도 내 세계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치유는 과거를 쪼개고 파헤치는 일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 아무나 초대할 순 없었다. 어쩌면 그런 일을 누군가와 의논하는 일 자체가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조금 위험했다. 자신을 억지로 고립시키고 통제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변인의 도움 없이 극복하려는 게 단순히 교만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여기엔 남들에게도 으레 보이는 허세, 부끄러움과 괜히 홀로 감당하려는 무모함이 깔려있다. 대신 그 과정은 단지 마음의 병을 극복하는 일이 아닌 일종의 탐구였다.

이 복잡하게 얽힌 존재의 병리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은 물론 이웃한 사람들 마음에도 비슷한 갈등의 씨앗이 뿌려져 있음을.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작지만 조건만 적당하면 크게 자라나 그 자신은 물론, 남들의 삶에까지 칙칙한 어둠을 드리운다.

돌아보면 늘 편집증적이었다. 기원은 알기 어렵지만 그런 피해망상은 대개 아주 체계적이어서 스스로 극복하기 어렵다. 이는 사람이란 본래 자신의 세계나 상황을 조리(條理) 있게 설명하려는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사실처럼 드러나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본능이 작동한다. 객관적인 타당성을 검증하기도 이전에 머리에 서린 그물과도 같은 그것이 나의 술어가 되어 삶을 조형한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것은 견디기 힘들다. 잘 모르는 것을 그저 그 상태대로 내버려 두느니 잘못된 전제라도 함부로 끌어다 쓰는 나쁜 버릇이다. 가설적 판단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 어차피 모든 걸 검증할 수는 없다. 타자는 제멋대로 도래한다. 그렇지만 나는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타인의 악의를 추정한다.

어렸던 나는 어떤 계기로 인간관계의 본질이 적대감이라 믿으며 스스로 피해자라 단정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부족한 탓으로 생각하는 한편에선 남몰래 보복의 정의를 옹호한다. 처음엔 책임감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잘못된 전제를 원용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처음엔 내 탓이라 자책하며 겸양을 떨었지만, 점점 그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터이다. 이는 자기 책임을 재귀적으로 요구할 때 전제한 역량이 자기 비하를 통해 부정되면서, 결국 처음의 책임까지 부정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고 나는 결론을 유보하기 어렵다. 그 순간들에 쫓기다 보면 내가 한 판단과 성급히 내려버린 결정들로 덩어리 져서 내 안을 부정적 가설로 세워진 세계관으로 채운다. 그러므로 난 그렇게 어질러진 실존의 얼개를 좀 더 작게 분석하고 해체해야 했다. 나를 어떻게 해석할지, 세계를 뭐라 규정할지, 고로 나와 세계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다시 정해야 했다. 왜냐하면 진실이 무엇이든 나는 내게 떠오른 세계에 반응하고 그에 맞춰 변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상담을 마지막으로 치료를 마무리 지었다. 물론 언제든 그 병이 재발할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전과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시금 서울로의 기나긴 운행이 남아있었다. 나는 마침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있을 모교를 떠올렸다. 그곳 주변에 매일 같이 드나들던 카페가 있다. 안 그래도 커피가 간절해서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작가의 이전글타인의 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