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어린이날이 제정된 지 35년 만에 어린이헌장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에,자연보호 헌장은 1979년에 선포되었다. 관련 기념비도 잇달아 건립되었다.
흔히 기념은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기리기에, 그 과거를 잊지 말자는 데서 출발한다. 때로는 시대변화에 따라 재해석되기도 하나, 기억하고 이어받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데 "헌장의 선포"는 곧 널리 알리어 앞으로 이렇게 이행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다 보니 헌장의 기념은 우리 의식을 환기시키고 행동을 촉구하게 된다. 자칫 훈계조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헌장의 기념물은 어떠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공감하고 동반하는 공동체 의식을 북돋우어줘야 한다. 당연히 사회적 정당성을 전제로 한다.
이런 관점에서 몇 헌장 선포 기념 풍경을 찾아보자.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1957년 어린이의 복지증진을 위한어린이헌장이 선포되면서, 이 헌장비가 건립되었다.
지금은 서울 어린이대공원 내 알림판처럼 자리하였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헌장 전문을 새긴 가로 1.8m와 세로 1.25m의 석판에 거친 화강석으로 테두리 하고 두 손을 모아 쥔 형상이다. 필기체로 된 서체가 특이하다.
그런데 형태가 평면적이고 일방향이다.
당당하고 우직하나, 과도한 인상을 준다. 굳이 형상미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솔직함이 있다.
강한 주장이 마치 진정성을 강요하는 듯하다.
대구 어린이헌장비
달성공원 내 넓은 잔디밭 끝자락, 큰 나무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대구 달성공원, 어린이헌장비
3중의 기단 위에, 백색 페인트를 칠한 듯 흰 석상은 부모와 어린 세 자녀의 군상과, 석구를 얹고 헌장 전문을 새긴 검은 비석으로 구성되었다.
흑백 대비가 뚜렷하니 잘 보이지만, 조금 우러러봐야 한다.
부모는 서로 다른 쪽을 응시하는데, 아버지는 바깥에 대응하고 어머니는 헌장을 되새기는 듯.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보호하는 모습이다. 1950~60년대에 추구하였던 이상적인 가정 모습이 엿보인다.
국민교육헌장 비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나라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념과 근본 목표를 세우고,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밝힌 교육지표였다. 그러나 1994년부터 사실상 쓰이지 않다가, 2003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교육헌장비도 대부분 사라졌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내 작은 숲 속에 국민교육헌장비 하나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높이 3.5m. 전면 중앙 오석판에 전문을 새겼다. 좌우로 화강석을 쌓아 올리고 횃불과 월계수 잎 형상을 새겼다. 앞에 펼친 책 모양의 조형물을 두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국민교육헌장 비
좌우대칭이지만 부조 형상 덕에 비대칭적 균형감을 보탰다. 좌우 끝부분에서 조금 닫힌 듯 굽어진 석벽이 포용적이다. 층을 이룬 돌벽에서 미묘한 질감이나, 색감 변화 덕에 수수한 이미지를 더해준다. 전체적으로 위로 상승하는 느낌을 준다.
이 비는 근대사를 엿볼 수 있는 한 단편으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재해석하거나 변천사를 보여주는 새로운 장치를 추가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다만 원형과 분위기는 지켜져야 한다. 역사적 의의가 크기 때문이다.
영주시 국민교육헌장 비
지방 소도시의 공원 가운데 잔잔히 자리 지키고 있다. 헌장을 새긴 폭 1m에 높이 0.66m의 석판을 작게 3단을 된 0.9m의 기단에 올렸다. 전체 형상은 비교적 적정한 모양새이다. 그런데 낡아서 글씨조차 알아보기 어렵다.
영주시 구성공원, 국민교육헌장 비
비 이면 명각:
나라를 세우려면 설계가 필요하되, 나라를 번영으로 이끄는 힘은 젊음이로다. 가슴에 끓는 피 뉘게 바치랴! 새 역사 창조 위해 성화를 들자. 우리의 뜻을 고이 이 작은 돌에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새겨 시민 앞에 드립니다. 재영 국립경북대학교 동문회 바침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저 한 석물인 듯 방치 수준이다. 단순 우직한 모습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 상
설흔 둘에 요절한 방정환 선생은 1921년 5월에 소년운동을 시작으로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처음 제정하였다.
공원 내 노천극장의 객석 뒤 끝 중심에 자리하였다. 높이 1.5m 폭 1.6m 두께 1.65m의 단정한 석재 좌대 위에 1.5 등신 배 동상이다. 단순한 화강석 기단과 빛바랜 청동상은 나름 격을 지니고 있다.
한복 차림의 방정환 선생이 모자를 벗어두고 어린이를 끼고 앉아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이다. 경청하며 서있는 어린이가 보조역이다. 분위기가 좀 진지하다. 무서운 옛날이야기일까?
선생의 인상이 좀 근엄하다. 친밀감이 아쉽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소파 방정환 선생 상
주변에는 설득하는 메시지를 담은 표석이 즐비하다. 오석판 설명문이 기울어져있어 서서 읽기에 편리하다. 특히 어린이와 어른에게 고한 선생의 당부가 새삼스럽다.
동상 주변 별도 오석판 3: 어린 동무들에게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 입은 꼭 다물고 몸을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동상 주변 별도 오석판 4: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보아 주시오. 어린이를 가까이하시어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 … 대 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진정성을 느끼게 된다.
안동 어린이헌장비
시가지 교통 로터리 녹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차도로 단절되어 그저 멀리서 봐야 한다.
어린이헌장의 제1조를 새기고, 조형물로 구성하였다.
백색이 뚜렷한 나체의 다섯 어린이가 마치 놀이하듯이 헌장비를 오르내리는 모습이다. 흥미롭기도 하고, 조바심스럽다. 너무 눈에 띄니 오히려 효과적이긴 하다.
안동시, 어린이헌장비
그런데 어린이 상 중 하나가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랜드마크인 시청 광장에 자리한 오줌 누는 소년상과 그 형상이 유사하다. 게다가 요즈음 시대 분위기로는 자칫하면 새로운 문제로 비화될 수도 없지 않다.
이곳이 가장 보수적인 지역의 하나인 안동이기에 의외로 흥미롭다.
덕진공원 어린이헌장비
공원 경계 도로 쪽 좁은 녹지와 통과로 사이에 자리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상징 로고의 녹색 이파리 형태를 세워 헌장비로 만들었다. 높이 3.4m, 폭 1.6m 크기에 시멘트 재료에 녹색 페인트 도색이다.
그런데낡고 퇴색되어 우중충하다.
전주시 덕진공원, 어린이헌장비
표지석:어린이는 우리의 꽃입니다. 어린이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입니다. 어린이는 내일의 나라입니다. 여기, 우리의 행복과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바라 어린이를 귀히 여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을 한 번 더 돌에 새겨봅니다. 1975. 12. 28. 전주 청년회의소, 도요오까 청년회의소
제작 때부터 훼손이나 바람 또는 쇠락을 대비해야 한다. 아쉽다.
구미시 자연보호 헌장 비
구미 금오산 올레길 케이블카 정류장 근처 길옆에 자리 잡았다.
1977년 9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금오산 대혜폭포 아래에서 깨진 유리병 조각과 쓰레기를 줍는 것으로 자연보호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덕에 이곳에 원조 같은 기념비가 조성된 것이다.
구미시 금오산, 자연보호 헌장 비
헌장을 새긴 동판화를 감싼 석재 틀이 당당하다. 두 청동상의 어린이가 노니는 모습이다. 비둘기와 월계수를 들고 있다. 건강한 이상적인 동자동녀 상인지? 그런데 서구 신화 속 큐피드 모습에 더 가깝다.
청주시 자연보호 헌장 비
청주 3.1 공원으로 가는 우암산로 굽어진 도로 옆에 섰다. 폭 1.8m, 높이 6m 정도의 콘크리트 판으로 된 비는 나름 곡면과 좁아지는 이면을 갖추어서, 안정되고 단순 명쾌한 모양새를 지녔다.
정면 상부에 자연보호 글자를 부착하고, 그 아래에 원형 동판에는 산과 구름과 바람과 날아가는 새 다섯 마리가 부조되어 있다.
청주시 우암산, 자연보호 헌장 비
그러나 콘크리트 표면이 낡아서 떨어지고 녹이 베이고 색상이 훼손된 상태이다.
자연보호가 아닌 애물을 보탠 꼴이다.
뒤판에 제작과 관련된 보험단 명부 판석과 그 아래에 제작 연표석이 헐겁게 붙어 있다. 사단법인 한국 보험단의 명단 중 세 번째 줄 한 곳이 파여 있다. 오자인지? 기념 물으에 더해지는 기록 방식을 되묻게 한다.
서울 자연보호 헌장 비
서울 남산 안의사 광장 가장자리에 자리하였다.
여러 층으로 된 기단은 높이 약 3.5m에2m의 안정된 형태이다. 그위에 헌장 전문을 새긴 오석판을 올리고 꼭대기에는 대형 지구본을 떠받치고 있다.
남산 안의사 광장, 자연보호 헌장 비
아래 면마다 수많은 형상이 새겨졌다. 우리 민속화 같고, 십장생 그림 같기도 하다.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듯하다.
자연보호를 하면 이렇듯 좋은 세상이 온다는 메시지인가? 공감대를 이루는 기법으로는 효과적이다.
다만 치장이 지나치면, 자칫 비주얼 슬로건이 되기 십상이다. 어떨지?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1988년 개정 선포된 헌장 전문을 새긴 기념비이다. 첫 기념비와는 길 건너 있다.
처음 제작된 헌장비의 길 건너편 장미터널을 안쪽에 설치되었다. 높이 3.m, 폭 1.65m, 두께 0.7m의 사변 형태로서, 어린이헌장 전문과 제작 관련 글을 새긴 검은 오석판을 품은 화강석 통돌이다. 비대칭에 보기 드문 형상이나, 망새 형상 같기도 하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어린이, 새, 토끼, 사슴 등 온갖 다채로운 형상을 부조한 화강석 통돌이다. 화려하다. 기교가 넘치고, 매우 표현주의적이다.
눈높이에 맞춘 친근감을 준다. 친밀하지만, 여전히 작으나마 기단이 있어 보호와 우월을 동시에 보여준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신) 앞뒤 부분
비문에는 새 헌장 전문은 물론 만든 모든 사람과 작가까지 새겼다. 어린이를 위한 기념사업 자체는 가장 보람된 일 하나로 보이니, 참여한 인물이 넘칠 지경이다.
흥미롭다. 같은 주제의 비인데, 약 30년 시차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마무리하면,
비록 몇 기념사례를 살펴보았지만, 어린이, 교육, 자연보호 등 주제에 따라 맞추어 기념 풍경을 형성한 경향을 보인다. 또 시간이 지날수록 더 꾸밈이 많아졌다. 그저 조형 경향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과대한 포장은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헌장 선포의 의의를 기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헌장 자체를 위한 기념물이 선전물이 되거나 홍보물로 전락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어린이헌장비는 어린이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어른을 위한 것인가?
관련 기념지(건립 순)
1.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1957년 5월 5일 건립, 서울 광진구 능동로 216 서울 어린이 대공원 내, 헌장 글: 윤석중, 차윤근, 김재은. 주정일, 김수남, 김용운, 장인협, 임광진, 서성옥, 박연수, 제작: □□□
2. 대구 어린이헌장비: 1958년 5월 5일 최초 건립, 주도: 마해송, 지원: 대구 아동문학회, 언론계, 지원: 제2군 사령관 최영희 장군, 1970년 5월 5일 재건립,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3 달성공원, 세운 분: 대구시장 김수학, 제작: □□□
3. 국민교육헌장 비: 1969년 건립,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 18 서울 어린이 대공원, 글씨: 김기승, 설계: 이순석
4. 국민교육헌장 비: 1969년 10월 5일 건립, 경상북도 영주시 중앙로 63번 길 41-32 구성공원, 제작: □□□
5. 소파 방정환 선생 상: 1971년 7월 23일 색동회(회장 조재호)에서 남산 기슭에 건립, 1987년 5월 3일 한국 어린이 보호회(회장 이상용)에서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16 서울 어린이 대공원 이전, 조각: 김영중, 글씨: 이병태, 1995년 7월 2일 색동회(회장 김수남)에서 보수 건립, 글씨: 이정수, 조각: 김영중
6. 안동 어린이헌장비: 1974년 5월 5일 건립, 경상북도 안동시 서동문로 173 교통섬, 제작: 송기석
7. 덕진공원 어린이헌장비: 1976년 12월 건립,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권삼득로 390
8. 자연보호 헌장 비: 1979년 6월 30일 제막,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24-14 금오산 올레길, 주관: 경상북도지사 김무연, 시행: 구미시장 정충검, 제작: 이일영(남산미술원)
9. 자연보호 헌장 비: 1980년 2월 1일 설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우암산로 50-19 일원
10. 자연보호 헌장 비: 1980년 5월 13일 준공,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30-80, 글씨: 상하 김서봉, 기증: 세종라이온스클럽, 시공: 채무 실업, 제작: □□□
11.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1992년 5월 5일 건립.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16 서울 어린이 대공원, 헌장 글: 윤석중, 차윤근, 김재은, 주정일, 김수남, 김용은, 장인혐, 임광진, 서성옥, 박연수, 간사: 리의도, 이배근, 이종찬, 세운이: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건립위원회, 회장 김재천, 사무총장: 이종찬, 글씨: 김세규, 조각: 김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