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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생각(思)’의 의미

삶은 의미다 - 64

by 오석연

‘생각’‘판단하고 헤아리며 인식하는 것 등의 정신 작용’으로, ‘어떤 문제의 결론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관념의 과정’을 말한다. 思(생각 사)는 원래 恖인데 음을 나타내는 囟(정수리 신)과 뜻을 나타내는 心(마음 심)이 합쳐진 한자로, ‘생각하다’의 뜻이다. 머리(囟)에서 나온 마음(心)이 생각이라는 의미다. 한자어로 사색(思索), 사유(思維), 사고(思考)가 생각과 비슷하게 사용된다. 생각을 한자어로 착각하여 ‘生覺(生-날 생, 覺-깨달을 각)’으로 쓰는 사람이 있는데,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이다. 生覺은 음만 따온 틀린 것이다.

생각은 우리가 어떤 경험이나 기억, 혹은 사고나 판단, 이해 등을 글이나 언어로 표현하기 전 마음속에 추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지각이나 기억으로만 일을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헤아리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전체를 생각에 의존하고 있으며, 행동을 명령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생각이다. 우리가 하는 말도 생각을 밖으로 나타낸 것이다. 또한 살아가면서 배우는 모든 지식과 경험은 생각의 작용을 통해 쌓인 것이며, 그것을 삶에 적용하고 기억해 내는 것도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생각은 사용할수록 깊고 넓게 작용하기 때문에 많이 할수록 좋다. 나아가 생각하는 힘, 사고력은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문제나 시험, 면접과 같은 복잡한 상황에 만족하는 결과나 해법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요구되는 능력이다.

인류가 이루어놓은 위대한 문명과 문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가며 더 좋게, 더 아름답게, 더 튼튼하게, 더 낫게 하는 것 모두 생각의 힘이고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에 여기서 생각의 결과나 힘을 일일이 거론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냥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생각의 종류는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논리적 사고는 주어진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나 어떤 사건에 대해 이치에 맞는지 혹은 모순을 따지는 사고를 말한다. 수학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으며, 논리적 사고를 기르기 위하여 수학을 배우는 것이다. 둘째, 분석적 사고는 자료나 도표나 그래프 등과 같은 것을 해석하는 사고다. 어떤 상황과 일어난 일들 혹은 규칙적인 패턴으로 일반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셋째, 추상적 사고는 객관적이며 상징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작곡가가 곡을 쓰기 위해 떠올리는 멜로디,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계산하며 수식을 세우는 일 등이 추상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사람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점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인류가 가장 선호하는 대명제도 있지 않은가. 이성은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인데, 이때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고차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능력은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의사소통하는 동물들도 단순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다만 사람은 고차원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를 깨닫게 되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성하고, 반성하기 때문에 발전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삶을 말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그래서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었고, 고상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은 철학이 보이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요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시대적 현상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말초적으로 느끼는 것에 즉각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이나 사고(思考)라는 말이 점점 멀어지고 오히려 즉각적인 감정이 강조되는 듯하다. 깊이 생각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그때그때 느끼는 것에 즉각 반응하는 걸 좋아하는 세대가 되었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점점 생소해지고, ‘철학이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만큼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이다.

‘사색의 시대’는 가고 ‘검색의 시대’가 왔다고 한편으론 걱정하고, 다른 한편으론 환영한다. 눈은 컴퓨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고 손은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바쁘다. 하늘, 구름, 별, 산, 꽃, 물소리, 바람 소리 등 자연을 멀리한 채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표정과 온기 없는 것들에 동화되어 우리의 감각마저 무미건조해진다. 이런 마음 상태에선 소통과 교감이 일어나기 어렵다.

사실 21세기 정보혁명의 시대는 검색 하나로 수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어, 이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똑똑해진 것처럼 느끼지만, 더 훌륭해졌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지식의 폭증으로 인해 지식의 성격이 바뀌었고, 지식의 네트워크화로 소유보다는 접속, 교육과 전수보다는 접속과 전송의 수단이 되었다. 또한 새로운 지식의 출현만큼 사라지는 지식의 수명 단축으로 ‘지식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생각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결국 시대를 좌우하는 것은 검색보다 사색이 사회를 이끌어갈 것이 확실하다. 세상이 점점 ‘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생각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검색되는 수많은 정보 속에는 가짜의 악의적인 정보가 난립하는 것도 사실인데. 이런 악의적 정보는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간적인 것’, ‘사람을 생각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인간적인 생각이 멈추고 인문학적인 성찰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름의 동물이 되는 것이다. 아니, 인간이 동물보다도 못한 ‘짐승’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사건 사고가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선의적인 정보와 악의적인 정보를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도 사색, 즉 생각하는 능력이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 그 생각에 사로잡혀 지내다 보면 정신이 어지러울 때가 있다. 이렇게 해결책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땐 한동안 그 문제를 잊고 지내는 것이 상책이다. 연구에 의하면 풀리지 않는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해서 그 문제에 집착하여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로부터 잠시 몸과 마음이 떠나는 것이 필요하단다. 학교나 일터에서 막혔던 생각이 퇴근길의 버스 속에서, 푹신한 침대에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천천히 걷는 산책길에서 ‘유레카’는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경험이다. 예로부터 생각이 잘 되는 세 장소를 삼상지학(三上之學)이라 하였는데 그 장소가 바로 침상(枕上), 마상(馬上), 측상(厠上)이다(송나라의 시인 구양수가 한 말). 지금으로 보면 위에서 등장하는 침대, 버스, 화장실이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생각은 변한 것이 없다.

우리의 뇌도 창조적인 생각이나 새로운 생각을 자리 잡게 하려면, 먼저 그 공간을 비워줘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기 위해 생각을 지우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무념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내 안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것들을 건져낼 수 없다. 그냥 잠깐이라도 가만히 앉아 있어 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한결 정리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것이 복잡한 생각을 지우는 ‘멍때리기’이다. 종류도 많다. 불멍(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산멍(산 정상에 올라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것), 물멍(잔잔한 바다나 어항 속 물고기 등을 바라보는 것) 등 바라보면 세상 시름 잊을 수 있는 무엇이든 괜찮다. 아침 해도, 저녁놀도, 밤하늘의 별도 달도. 하물며 멍때리기 대회, 오래 눕기 대회도 있다. 생각을 비우고 포맷하여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거울 생각’이란 것이 있다. 우리가 거울을 보았을 때 그 속의 자기 모습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가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거울 생각은 잘못된 인지 함정의 일종으로 인간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며, 상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수많은 실망과 갈등을 낳을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은 없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거울 생각의 위험에 빠지고 인간관계를 그르친다. 연인이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연인도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 내가 하는 모든 말이나 행동을 용서할 것이라는 생각 등 쉽게 말하면 극히 주관적인 혼자만의 생각이고 함정이다. 거울은 나를 보는 도구인데, 그 거울로 상대의 생각까지 꿰뚫어 보려는 잘못된 거울 사용법이다. 내 생각과 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고 진리에 가깝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같으면 좋겠지만,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다. 생각은 자연 발생적이며 피할 수 없는 인간 활동으로, 무의식중에 수없이 넘쳐난다. 파스칼(Pascal)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즉 인간은 식물인 갈대와 같이 자연에 있어서는 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의 끈이 근심과 걱정에 연결되는 순간이다. 끊임없이 연결되는 걱정의 생각은 우리를 고통의 바다로 끌고 갈 뿐이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올라오고, 또 다른 부정적인 생각들로 소설을 쓰다 보면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생각이 많아지면 용기는 줄어든다. 적당한 생각은 지혜를 주지만, 과도한 생각은 결국 나를 겁쟁이로 만들 분,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잡념이다.’ 제2차 대전에서 유명한 ‘사막의 여우’라는 작전을 수행한 독일의 장군 에르빈 롬멜의 말이다. 복잡한 생각을 면도날로 잘라낸다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란 말도 있다. 잡념으로 생각의 구덩이에 빠져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생각의 면도날로 쓸데없는 생각을 잘라내라. 그러면 빛나는 진리의 생각만 남아 찬란한 빛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우리 삶의 모양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생각의 방향이 중요하다. 생각의 방향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도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나온다는 이유다.


행동 없는 생각은 공상이라 하지 않던가. 폴 발레리의 말처럼,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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