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11
‘반대(反對)’는 ‘두 가지 것이 생김새, 위치, 방향, 성질 따위에서 서로 달라서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뜨거움과 차가움처럼 눈에 드러나게 어긋남’, ‘하는 일이나 말, 뜻한 바나 주장 따위가 서로 맞지 않아서 어긋남’을 뜻한다. 反(돌이킬 반)은 ‘암벽’을 뜻하는 厂(기슭 엄)과 ‘잡다’를 뜻하는 又(또 우)가 합쳐진 한자로 ‘암벽(厂)을 손으로 잡아(又) 오르다’에서 ‘돌이키다’, ‘돌아오다’, ‘반대(反對)하다’ 등의 뜻을 되었다. 對(대할 대)는 丵(풀무성할 착)과 寸(마디 촌)이 합쳐진 한자로 손에 丵(풀) 형태의 무언가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대(對)하다’, ‘대응(對應)하다’, ‘마주하다’의 뜻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주변의 사람들과 다르게 걸어가기가 쉽지 않다. 반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작동하는 것이다. 다수가 가는 길이 바른길이고, 다수가 의사 결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는 보편적 생각을 한다. 다수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 생각들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무작정 믿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에 있어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하여 맹목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샬런 네메스는 『반대의 놀라운 힘』에서 다수가 합의한 의사결정이 잘못된 결론이 될 위험이 있고, 소수의 반대가 오히려 유익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정보를 분석하기보다, 다수 의견이 진실일 거라고 단정할 때가 지나치게 잦다. 문제는 너무 경솔하게 단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작정 다수를 따른다.”라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정보를 분석하는 귀찮음을 겪지 않고 편한 것이 사실이다.
소수의 반대의견은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다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에 제동을 건다. 반대의견을 접하는 순간 사람들은 독립적으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다양하게 사고하도록 자극하며 편향적으로 사고하지 않게 도와준다. 둘째, 더욱 많은 정보와 대안을 고려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뿐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회의 중에 다수가 합의한 의견에 대해 혼자 다른 반대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가 필요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괜한 반대를 표시했다가 다수로부터 눈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의사결정을 위한 것이라면 무조건 쉽게 합의에 도달하는 것보다 반대의견을 쉽게 제시할 수 있는 열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최고 사법기관인 대법원에서도 전원합의체라 하지만, 다수의 판결문에서 다른 대법관들은 소수 의견을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뚜렷한 주관 없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현상을 ‘레밍 신드롬(Lemming syndrome)’이라 한다. 쥐의 일종인 레밍은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나면 집단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맹목적으로 선두를 따라가다가 호수나 바다에 빠져 죽기도 한다. 이렇게 앞서가는 개체를 무작정 따라가다가 집단으로 물에 빠져 죽기 때문에 집단 심리를 설명할 때 예시를 들곤 한다. 하지만 레밍도 뒤에서 따라가지 않아 살아남은 레밍이 다시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 번성한다. 처음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이 있다면, ‘스톱핑 레밍’이 있어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혼자나 소수의 반대나 다른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반대의견을 표명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이 모여서 논의할 때 쉽게 하나의 의견으로 수렴하면, 잠시 멈추고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모아진 의견이 과연 합당한가? 정말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다시 의심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또 다른 의견이 없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는 의사결정에서 다수결이 가장 민주적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수의 의견도 틀리고 바른 방향이 아닐 때가 많다. 진정한 민주적 의사결정 방법은 다수결을 따르되 소수의 의견을 최대한 듣고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라고 무조건 따르도록 강요한다면 민주가 아니고 다수에 의한 횡포가 된다. 더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소수의 의견이나 반대를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대의견을 논의해보는 절차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많은 사람과 반대로 걸어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 있기에 큰 용기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어느 분야에서나 큰 성공을 이룬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 걸어가지 않는 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많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남들이 하지 않는 일, 어쩌면 남들과 반대로 가는 길이 경쟁자가 없는 쉬운 길이 될 수 있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내 분야에 나만 전문가잖아.’, ‘나 혼자라서 너무 좋아’라는 생각으로 기죽지 말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반대 방향이지만 내가 원하는 일, 행복한 삶의 목적지는 같다.
반대를 자주 하는 사람을 청개구리 심보라 한다. 부모 말의 반대로만 행동하던 청개구리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사람은 누구나 청개구리 성향이 있는 것 같다. 똑같은 일을 잘하다가도,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것이다. 부정적 성향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너의 지배를 받기 싫다는 속뜻도 숨어 있다. 요즘은 부모 말을 너무 잘 듣는 마마보이가 많아 젊은 여성들이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데 고민이란다. 너무 주관이 뚜렷해 청개구리 성향이 있어도 곤란하지만, 성인이 되어도 부모 말에 순종하는 착해빠진 청년도 결혼 기피 대상이다. 오히려 조금은 반골 기질이 있는 청개구리 청년에게 매력을 느끼고 좋아하는 현상이 있는 것 같다. 부모에 올인하는 마마보이보다 자신에 올인할 수 있는 청개구리가 좀 더 나은 결혼 상대가 될 듯. 청개구리나 마마보이나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고, 겪어보지 않고 어찌 알겠는가. 내 선택의 책임은 나일 뿐. 그래도 요즘은 연애 기간이 있어 충분히 살펴볼 수 있고, 결혼 후에도 서로 맞지 않으면 갈라설 수 있는 시대이니, 얼굴도 안 보고 결혼해 평생을 살아야 했던 옛날에 비해 다행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말, 어디서 많이 듣는 말 아닌가. 특히 정치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노라면 ‘정치인은 저 말밖에 모르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좌고우면 전혀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찬성하는 것, 무조건 반대하는 것 모두 문제다. 여당이 국정에 반대하는 것이나, 야당이 국정에 찬성하는 것을 보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렵다. 노조가 사측과 대립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십분 활용되는 것쯤은 애교로 봐줄 만하다. 한발 전진을 위한 두 발 전진의 설레발쯤으로. 하지만 범인이 보기에 말 그대로 반대를 위한 반대로 보일 때가 훨씬 더 많다. 반대하는 상대편을 항상 적(敵)으로 보지 말고, 한 번쯤 서로의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미덕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정치나 노사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겉보기에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짚어보고 리스크를 줄이는 과정이 나쁘지 않다. 다르게 보면 여럿이 모인 회의나 조식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앞만 보고 달려갈 때 주변을 둘러보고 방해물을 파악하는 사람도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 반복적인 부정적 의견은 다른 모두에게 패배 의식을 심을 수 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안될 거야, 아마’라는 생각이 팽배할 수 있다. 구름이 있는 노을이 아름답듯, 적당한 반대가 아름답고 유익하다. 반대가 건설적이고 긍정적으로 작용하려면 유능한 반대를 해야 한다. 대안이 없는 무능한 반대나 앞서 말한 것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는 서로가 배울 게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된다. 무능이 모였으니 공멸할 수밖에. 정치의 여야나 기업이 노사가 공명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국민이나 소비자가 똑똑한 것이겠지.
열린 생각을 가지고 모든 일을 대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늘 옳고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사고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사이인 다름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반대나 다른 의견은 나쁘고, 동의나 찬성이 좋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다. 요즘의 MZ세대들은 Yes나 No가 똑 부러진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가 명확하다. 속마음을 숨기고 뭔가 께름직해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반대나 No를 못 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기성세대보다 훨씬 명쾌하지 않은가. 특히 부하직원이 반대하거나 No라고 말할 때, ‘너 지금 권위에 도전(반항, 항명)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상사는 퇴출 대상 1호다. 부하직원의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사가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당연한 퇴출감이지.
소신 있는 반대는 최고의 용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비굴하게 질질 끌려가지 않으려면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 스스로 끌고 나가는 첫걸음이 ‘Say No~!’이다. 당신 삶의 주인은 당신이다. 살면서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자신의 주관대로 살 수 있다. 조직이나 회사에서 반대가 없는 유일한 아이디어도 위험하다. 그래 ‘반대의견이 없을 때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아야 한다.’라는 말도 있다.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문화, 답이 하나만 있다는 생각, 반대를 수용하지 않는 단편적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혁신은 긍정보다 부정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반대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성공과 혁신의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전 GM의 앨프리드 슬론 회장은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무도 제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대와 다름에 대하여 숨거나 발톱을 드러내지 말고, 따뜻하게 보듬는 팔을 뻗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