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일종의 문화 현상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독일의 맥주 축제, 프랑스의 와인 축제 등은 매년 열리고, 국내에서도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증류주가 주목받고 있다. 또한 와인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술은 음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술은 종교에서도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천주교의 미사에 포도주를 봉헌하며, 제사에도 술을 올린다. 많은 문화권에서 술은 신과 접속할 수 있는 매개체로 여긴다. 술에 대한 의존증이나 중독성이 술을 마시는 모든 사람에게 걸리는 것은 아니다. 실제 알코올중독증의 인구는 음주 인구에 비해 굉장히 낮은 수준이다. 극소수의 알코올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관리는 필요하다. 옛날 금주령과 같은 일반 음주인에 대한 국가의 간섭은 현대에는 적절하지도 않고 권한도 없다.
술을 마시는 이유도 수없이 많다. 이유가 없어서 술을 못 마시는 일은 없다. 마실 이유가 없으면 만들면 되니. 만나서 반가워 한잔 헤어져 아쉬워 한잔, 기뻐서 한잔 슬퍼서 한잔, 일이 잘 풀려 한잔 안 풀려 한잔, 비가 부슬부슬 오면 술 날씨라 부침개에 막걸리 한 사발이 제격~! 술꾼에게 술 마실 핑계는 무궁무진하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은 늘 그럴듯한 이유가 핑계가 있듯,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은 매일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와 핑계가 있고 상황이 펼쳐진다. ‘취하고 싶어서 취하는 사람이 있나요? 취하는 건 술인데, 세상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고~!’라면서.
보통 술은 대화의 촉매제로 여러 사람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요즘 혼자서 술을 마시는 사람도 흔하다. 혼술이다. 남자가 혼술하면 맘이 외로워 보이고, 여자가 혼술하면 몸이 외로워 보인다나. 그래서 술집에서 혼술하는 여자 주변을 술잔을 들고 서성거리는 굶주린 늑대를 보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술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한잔 술의 낭만은 늘 추억거리다. 도시의 뒷골목이나 도로가 오가는 으슥한 곳에 노점이나 포장마차는 녹록지 않았던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기다랗고 좁은 널빤지로 만든 술상이 있는 목로주점(木壚酒店)에서 의자도 없이 서서 큰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며 서민의 애환을 달래던 ‘선술집(서서 마시는 술집)’, ‘대폿집(큰 사발막걸리 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꿈 많고 거칠 것 없던 대학 시절, 친구 따라 부산에 놀러 오게 되었다. 부산역에 내리면 살며시 코를 스치는 바닷바람과 함께 스며드는 물미역 냄새, 비릿한 바다 내음이 제일 먼저 대처 촌놈을 맞이한다. 역 플랫폼을 빠져나와 기다리던 친구를 만나고, 친구는 부산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남포동 자갈치로 향했다. 자갈치에서 소주 한잔에 제일 먼저 먹은 안주가 멍게(우렁쉥이)였는데, 뭐 이리 맛없고 쌉싸래한 안주가 다 있나 했다. 그때는 정말 먹지 못할 만큼. 잘 못 먹고 소주만 홀짝대고 있으니 불쌍해 보였던지 이번에는 갈비를 사준단다. 한참을 걸어와 남포동 뒷골목으로 들어가는데 고기 냄새가 아닌 비린내가 진동하는 게 아닌가. 어딜 가느냐 물어도 그냥 따라오란다. 그래 들어간 곳은 연기 가득한 고등어 구이집이 아닌가. 무슨 갈비 사준다더니 고등어 구이집이야 했더니. 부산에서 고등어구이를 ‘고갈비’라고 한다나 뭐라나. 그래도 멍게보다는 먹기가 좀 나았다. 부산의 술안주에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지금은 남포동 뒷골목의 그 많던 고갈비 집들은 한두 집 명맥만 남아있다.
농가에서 마시던 푸짐한 막걸리(농주)는 이웃집 어른, 친구, 지나는 길손 등 누구나 손사래로 불러 나누어 마시던 정 깊은 술이다. 농사일에 바쁜 아버지의 탁주 심부름은 하다가 술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한 모금씩 마시고 얼굴이 벌겋게 되었던 기억, 줄었던 양만큼 동네 우물가에서 맹물로 채웠던 기억, 싱거워진 탁주를 모르는 척 마셨던 아버지의 아량 등은 농사일에 힘들던 시대의 일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생활의 예의를 중히 여기던 민족이다. 또한 우린 어렸을 적부터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비록 취하고자 하여 마시는 술이라 하더라도 심신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고, 어른께 공경의 예를 갖추고 남에게 실례를 끼치지 않는 것이 음주의 예절이다. 음주 때의 이러한 예절이 주례(酒禮)이다. 우리는 이를 주도(酒道)로 지켜왔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라고 하여 음주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반드시 지켰다. 어른이 술잔을 주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야 한다. 어른 앞에서 함부로 술 마시는 것을 삼가하여 윗몸을 뒤로 돌려 술잔을 가리고 마시기도 한다.
술자리에서 잔을 돌리는데 그 예절을 알아보면 “술상에 앉으면 대작하여 술을 서로 주고받는 수작(酬酌)을 하고, 잔에 술을 부어 돌리는 행배(行杯)의 주례가 있다. 이때 권주 잔은 반드시 비우고 되돌려주는 반배(返杯)를 한다. 반 배는 가급적 빨리 이행하고, 주불쌍배(酒不雙杯)라 하여 자기 앞에 술잔은 둘 이상 두지 않는 것이 주석에서의 예절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술자리에서 잔을 돌리며 술을 권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코로나 이후 거의 하지 않는다. 사실 술은 남편이라면 술잔은 부인에 해당하므로 술잔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잔을 돌리는 것은 나의 소중한 물건이라도 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술은 권하는 맛으로 마신다는데. 주고받는 술잔 속에 싹트는 정겨운 낭만이 그립다.
법명이 소야(笑野)인 신천희 스님마저 술집에 가면 제일 많이 벽에 걸어 놓은 「술타령」이란 시를 쓰지 않았던가. 잘 알고 있지만 시의 전문이다.
“날씨야/네가/아무리/추워 봐라//내가/옷 사 입나/술 사 먹지”
술 마시는 스님을 ‘땡초’라고 하지만 평범한 술꾼으로서의 경지를 넘어선 감정 표현이 아닌가. 또한 “술과 미인은 악마가 소유하고 있는 두 개의 그물이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새라 해도 그 그물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라는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말도 있다. 인간이 좋든 싫든 유혹당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아닌가. 이럴진대 어찌 범인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예부터 이 두 가지, 술을 절제하고 미색을 멀리하면 품행이 고결해진다고 했다.
옛말에 술을 마시고 촛불 밑에선 여인을 보지 말라 했다. 보는 여인이 모두 미인으로 보인다는 속뜻이 있을진대. 이 현상을 “비어고글 효과(beer goggle effect)”라 한다. 맥주를 마시면 고글을 낀 것처럼 콩깍지가 씌어 이성이 한층 매력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일명 ‘술깍지’로도 불리는 비어고글 효과!
‘숲속의 꿩은 사냥개가 내몰고, 폐부 속의 말은 술이 내몬다.’라는 말이 있듯이 겉은 눈으로 보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은 어느 정도 술로 볼 수 있다. ‘술은 인간의 성품을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그리스 철학자 아르케시우스의 말도 같은 뜻이다. 함께 술을 마셔 보면 솔직히 대화하게 되어 가까워지기 쉽고, 술 마신 후의 흥분으로 인해 상대방이 매력적으로도 보이게 된다. 함께 운동하면 흥분되어 가까워지기 쉬운 이유와 같다. 사랑이 가장 쉽게 싹틀 수 있는 곳, 운동과 술이라는 말에 동의하는가? 사랑과 불륜이 가장 많이 싹트는 곳이 ‘운동 동호회’라는 소문을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강한 척 술 마시는 사람은 맛있어서 술 마시는 사람 절대 이길 수 없다. 자기가 술 세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술이 약할 가능성이 크다. ‘술이 맛있다’라고 하는 사람이 진짜 주당이다. 마셔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욕심을 담으려 하면 넘친다. 술잔에 7부 능선 이상으로 술을 채우면 버겁다. 선술집에서 소주잔의 7부만 따라주는 것이 예의다. 정이 넘쳐야 한다고 잔을 넘치게 따르면 정이 아니라, 원망만 넘쳤던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술이나 정이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지나치게 넘치고 가까이 다가가면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서는 게 상정이다. 연인은 사랑할수록 거리를, 술은 좋아할수록 여유를 남겨 놓아야 한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주색우학(酒色友學) 순이라 했다. 첫째가 술 마시는 일, 둘째가 여색을 접하는 일, 셋째가 벗을 사귀는 일, 넷째가 학문을 하는 일의 순서로 어렵다. 그만큼 어려운 술 마시는 일을 나만의 문화로 승화시켜 룰루랄라 술과 함께하는 즐거운 인생을 누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