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궁
귀궁
설민
시력이 좋지 않은데도 안경을 쓰고 다니지 않았다. 세상 피곤한 사람과, 일과, 사물을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았다. 운전할 때나 공연, 영화를 볼 때만 안경을 썼다. 내가 보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겠다는 심보가 담긴 처사다. 그러다 우려되는 일이 생겼다. 최근 도수를 넣은 선글라스를 맞추기 위해 안경원에 갔다. 직원이 시력을 측정하면서 말했다.
“계속 안경을 안 쓰고 다니면 교정시력도 떨어져요.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안경을 써도 잘 안 보이실 겁니다. 그때 후회하지 말고 안경 쓰고 다니세요.”
나이도 들었고, 노안도 왔을 테니 여기서 더 나빠지겠냐며 방심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더 나이 들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덜컥 걱정되었다. 보이는 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데 말이다.
그래서 며칠간 안경을 쓰고 다녀보았다. 좀 불편했지만, 확실히 눈에 피로가 덜했다. 멀리 있는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주변 환경도 다시 보이고, 사람들의 표정과 생김새도 잘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힘드니까, 안 보이는 시력을 핑계로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왔기에 지난날 인간관계나 일에서 커다란 낭패를 보았는가 싶었다. 이제는 제대로 보고, 나의 시선에 당당하게 주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한 귀와 그 한을 풀어주는 내용이 담긴 드라마 [귀궁]을 보면서 뜬금없이 생각의 파문이 시력으로까지 미쳤다. 그 이유는 여리가 애체(안경) 장인이기도 했고, 아직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아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원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가슴에 쓰나미가 지나갔고, 여전히 어느 한구석에는 복구가 안 된 채로 남아있으므로.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나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 묻기 위해 그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상황이 너무 싫어서 도망쳐온 것은 나니까. 그러니 어찌 보면 쌍방과실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알게 모르게 상처받으며 마음속 옹이들이 생기는 게 살아가는 일이다. 그것이 쌓여 한이 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니 섬뜩하다. 풀 수 있는 것은, 살아있을 때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귀궁]은 이무기 강철의 혼이 빙의한 윤갑과 여리의 로맨스, 활극을 다룬 작품이다. 전설과 설화 등에 기반한 무속신앙의 모습과 외다리 귀신, 물귀신, 가장 압권이었던 팔척귀까지, 각종 귀신이 활약하고, 그에 숨겨진 아픈 사연들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무기 강철은 용이 되어 승천하려는 순간 사람의 눈에 띄어서 다시 인간 세상에 머물게 된다. 그로 인해 인간을 증오하던 악신 강철이가 그들을 구하고자 야광주를 불사르며 (자신이 소멸할 수도 있음에도) 스스로 희생을 선택하는 모습이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영매의 운명을 거부하고 애체(안경) 장인으로 살아가는 여리와 자신의 승천을 위해 신기 뛰어난 그녀의 몸을 시시때때로 노리는 강철과의 애증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티키타카가 극을 재미있게 이어간다. 신이라 칭하는 이무기 강철의 영혼이 윤갑의 몸에 갇혀 왕에게도 반말하며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모습이 유쾌하다. 강철이 풍산의 주술로 사라졌을 때, 잠시 윤갑의 혼이 제 몸으로 찾아오자 반가워하면서도 강철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그 존재감이 강력하다. 강철과 왕과 상선 영감의 캐미가 느껴진다.
강철의 혼이 담긴 윤갑과 여리가 팔척귀를 대적하면서 여러 귀신의 한을 풀어준다. 왜 팔척귀가 궁궐에서 왕과 왕세자를 괴롭히는지, 그 원한의 시작이 어디부터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증오와 죄책감으로 천금위라는 장수가 한을 품은 이야기를 알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왕이 피난을 떠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안위보다 자신만을 생각한 결과로 그의 가족이 사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게 되어 피맺힌 원한으로 팔척귀가 된 사연이었다. 혼자만의 원한이 아니라 마을 전체 사람들의 한이 뭉쳐 막강한 힘을 지닌 팔척귀가 백성들의 피의 대가로 왕의 자리를 지키고, 대대손손 영화를 누리는 왕손들을 괴롭히고 죽도록 저주한 것이다.
천금위가 적들과 싸우다가 활을 맞고, 불에 타 죽은 날과 이무기 강철이 승천하지 못하고 다시 땅에 떨어진 날이 공교롭게 같은 100년 전의 일이었다. 이에 어쩌면 승천하지 못한 것이 인간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냐고 가섭 스님은 말한다.
왕 이정은 그 사실을 알고 천도재를 지내며 깊이 사죄를 한다. 이무기 강철의 희생으로 소멸한 팔척귀 천금위는 죄책감과 한으로 품고 있던 마을 사람들과 이승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그리 오랜 한이 몇 마디 사과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고작 그 눈물 한 방울이면 되는 것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거기에 진정성 있는 눈물 한 방울이면 100년 동안 품어온 한도 풀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마음속 옹이도 그 말을 듣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싫어하던 이무기 강철이가 간혹 가다 만난 괜찮은 사람 덕분에 그들을 돕게 되는 것을 보면, 함께 부딪히며 살아가며 생기는 정이라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또 앞으로 맺게 될 인연에도 서로 옹이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자세히 들여다보고 살피면서 잘못했으면,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빨리 미안함을 표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