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저튼
브리저튼
설민
“피지 않는 꽃은 없다.”
[브리저튼] 포스터에 씌어있는 문구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꽃의 크기와 잎사귀 모양, 향은 각기 다르지만, 언젠가는 꽃이 핀다. 피고 지는 시기만 다를 뿐 피지 않는 꽃은 없다. 그것이 자신의 맘에 들든 들지 않든, 타인의 눈길을 끌 정도로 매혹적이든,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되는 들꽃이든 간에 말이다.
19세기 초 영국, 브리저튼 가문의 8남매와 이들을 둘러싼 사교계의 사랑, 질투, 소문 그리고 명예 싸움이 얽히며 펼쳐지는 이야기 [브리저튼].
화려한 무도회, 정원 파티, 승마 대결, 그리고 스캔들에 목숨을 건 귀족들, 그 와중에도 가문의 체면과 혼사 문제가 인생 최대의 프로젝트인 사교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흥미진진하다. 사랑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고, 가문을 생각해야만 하는 장남과 장녀의 심정이나 사교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사실적으로 담겨있다. 화려하고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인 영상과 브리저튼 가의 결혼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사교계의 중심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이야기의 저변을 끌고 나가는 스캔들의 출처가 되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브리저튼]을 보는 내내 사교계의 스캔들과 사건 사고, 시기와 질투 등을 신랄하게 꼬집는 지라시를 배포하며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레이디 휘슬다운”이라는 필명을 가진 사람이 눈길을 끌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여왕을 비롯한 왕실과 사교계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전하며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글솜씨를 가진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가는 게 가장 큰 재미였다. 그 휘보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은 은연중 소식지를 기다렸다. 보통의 사람은 남들의 비보와 숨어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소문을 내고 재미있어하는 습성을 가진 탓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레이디 휘슬다운”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은 사람들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탐정이 된 듯 물망에 오른 몇 사람들을 주시하면서 그들의 행동과 말을 귀담아들었다. 극의 초반에는 꼭꼭 숨어있던 사실들이 후반에 재구성되면서 서서히 그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
이 드라마는 브리저튼 가문의 자식들을 결혼시키는 이야기로, 사랑과 그 시대의 결혼관이 잘 드러나 있다. 무도회의 볼거리 외에도 여성들의 드레스와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기에 여념 없는 모습들이 때로는 안타까웠고,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남자들의 가부장적인 태도와 돈이면 다 된다는 못난 귀족들을 보는 게 별로이기는 했다.
많은 인물 중에 이런 시대의 반항아 격인 엘로이즈(브리저튼가의 딸)와 그녀의 친구 페넬로페(애칭으로 펜이라 불린다). 그녀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한마디로 의식이 깨어있는 여성이다. 예쁘고 여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엘로이즈와 키도 작고 뚱뚱한 펜은 언니들은 물론 엄마마저도 무시한다. 집안의 천덕꾸러기인 셈이다. 그 둘은 수를 놓고 피아노를 치며 귀족 남성의 선택을 받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나 ‘레이디 휘슬다운’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그녀의 글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엘로이즈와 펜도 결국 사교계에 진출은 하지만 결혼에는 큰 관심이 없다. 다만 펜은 콜린(엘로이즈의 오빠)을 짝사랑할 뿐이다. 사랑과 꿈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모든 과정을 친구처럼 이야기는 콜린때문에 많은 가슴앓이를 하지만, 결국 펜은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펜이 용기를 내어 고백한다. 그렇게 행복하게 지낼 줄 알았지만, 펜에게 위기가 닥친다.
친구인 엘로이즈가 펜이 ‘레이디 휘슬다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사이가 멀어지고, 남편인 콜린마저도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남편이자 작가인 콜린이 펜이 레이디 휘슬다운인 것을 알고 질투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부인의 뜻을 존중해 주는 모습이 좋았다.
그런 가운데 펜은, 가세가 기운 자신의 집안을 그동안 소식지를 내며 몰래 벌어온 돈으로 살려내기도 하면서 천덕꾸러기에서 능력자로 거듭나지만, ‘레이디 휘슬다운’을 찾기 위한 감시가 좁혀 들면서 여왕마저도 그녀를 찾기 위해 애쓴다. 그 시대만 해도 여자가 드러내놓고 글을 쓴다는 것, 상류층을 비판하는 것이 달가운 일이 아니기에 여왕은 물론 귀족들을 조롱하는 그녀를 잡아 벌을 주려고 벼르고 있다.
결국, 펜이 레이디 휘슬다운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걸 망설이다가(글 쓰는 것을 그만두고 비밀을 영영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밝히는 장면이 뭉클했다. 여자라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이 금지되고 무시당하는 처사를 펜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브리저튼]을 보는 내내 ‘레이디 휘슬다운’이라는 인물이 누구일까? 제일 궁금했다.
페넬로페(펜)는 여왕에게 자신을 밝히고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다. 모두 앞에서 자신이 레이디 휘슬다운임을 밝히고, 그동안 자신이 썼던 글로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과와 앞으로는 좋은 소식들을 쓰겠다며 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녀의 진실되고 당당한 모습에 여왕마저도 용서해 준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펜이 그 당시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다면 소식지를 썼을까? 펜이 익명의 글을 쓰고자 한 내면에는 자신도 인정받고 드러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키가 크고 예쁘고 날씬하지 않았기에 집에서조차 무시를 당했고, 남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자신이 짝사랑하던 콜린마저도 오랫동안 여자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 상처와 소심함을 글로 풀어내며 사람들에게 복수하며 위안을 받아온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펜은 끝내 그런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 내 사랑을 고백했기에 콜린과 결혼을 할 수 있었고, 글 쓰는 일을 끝내 지켜냈다. 펜의 꽃은 이제 피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