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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May 14. 2023

우리는 더 이상 작별하지 않겠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지난 4월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75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모식에 한 극우단체가 침입했다. 단체명은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 4.3 사건의 핵심 가해자 집단인 ‘서북청년단’을 계승하겠다며, 수시로 역사 왜곡 발언을 일삼아 온 극우단체다. 서북청년단 회원들이 평화공원에 도착하자 4.3 유족들과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오냐는 날 선 비판부터 시작해, 유족과 4.3 관련 단체들은 4.3 왜곡 극우보수세력을 규탄한다는 펼침막을 들고 맞대응 집회를 이어갔다. 학살 피해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기도해야 할 추모식이 혼란과 혐오로 뒤덮인 현장이었다.


엉망이 된 추모식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했다. 무엇이 극우단체를 혐오로 몰아갔는가. 문득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혐오 세력은 알지 못한다. 피해자의 슬픔과 분노를, 학살 당시의 정황을, 그리고 학살이 일어난 후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을. 이러한 ‘알지 못함’은 곧 ‘무지’로 이어지고, 무지는 또다시 ’혐오’로 이어진다. 알레고리는 금방 맞춰졌고, 곧이어 책 한 권이 떠올랐다. 바로 2021년, 작가 한강이 쓴 제주 4.3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23쪽)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주인공 ‘나’(경하)의 일상생활이 무너지는 것에서 발단한다. 주인공은 40대 중반의 여성 작가로, 광주 5.18 민주항쟁 기간 동안 일어난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면서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이 붕괴되는 것을 느낀다. 고통에 대해 쓰면서 자기 자신이 고통에 물들어 가는 것을 느낀 것이다. 동시에 화자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무와 바다, 그리고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한 무덤에 관한 꿈을. 꿈과 현실이 뒤엉킨 생활 속에서 ’나‘는 두려움과 공포, 무력감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친구 ’인선‘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꿈에 등장하는 나무들을 모두 검게 칠해, 무덤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산 위로 옮겨 심는 작업을 하자고.


하지만 4년의 시간이 지나 주인공 ’나‘조차 그런 프로젝트를 제안했다는 것을 잊었을 때, ‘나’에게 친구 ’인선‘의 사고 소식이 들려온다. 주인공과의 프로젝트를 위해 통나무를 자르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것. 서둘러 달려간 병원에서 ‘인선’은 ‘나’에게 뜻밖의 제주도행을 요청한다. 자신이 키우는 앵무새 ’아마‘가 굶어 죽을 수 있으니, 자신의 제주도 집으로 가서 아마에게 물과 먹이를 달라고 말이다. 자신의 잘린 손가락보다 반려 앵무새를 신경 쓰는 ‘인선’의 말에 ‘나’는 당혹스러워하지만,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책임감으로 제주도행 비행기에 오른다.


끔찍한 통증과 충격 때문에 인선의 어떤 부분이 달라진 걸까? 이 모든 게 내가 제안했던 일 때문이니 책임을 져달라는 걸까? 아니, 정말로 부탁할 사람이 나뿐인 걸까? 한 달 가까이 제주에 머물며 새를 돌볼 수 있는 사람, 더이상 가족도, 계속할 일상의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된 사람이?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이유라 해도 나에게는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67쪽)


‘나’가 도착한 제주도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폭설로 인해 ‘인선’의 집으로 가는 모든 길목이 끊긴 상태에서, ‘나‘는 심각한 두통과 함께 인선의 동네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오른다. 하지만 ‘인선‘의 동네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엄청난 양의 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뚫고 ’인선‘의 집으로 향하던 ’나‘는 결국 건천으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온몸에 피를 흘리며 멀리서 보이는 불빛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침내 ’인선‘의 집에 도착했을 때 앵무새 ‘아마’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아마’를 쿠키 상자에 담아 헝겊으로 봉하고, 마당의 나무 아래 흙과 눈을 파서 ‘아마’를 묻어준다. 그렇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나’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서울의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아무렇지도 않게 창고의 의자에 앉아 있던 것.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몽혼한 상황 속에서 ’나‘는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책임감으로 제주에 왔듯,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책임감으로 ‘인선’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에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172쪽)


이 소설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과정이 뚜렷하지 않다. 사건의 전개 과정에 따라 크게 1, 2, 3부가 나뉘어 있고 장이 있지만 사건의 연결을 위한 장의 구분으로 느껴지지, 소설이 하나의 그래프를 그리며 뚜렷한 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소설의 흐름을 거부하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소설적 전략은 제주 4.3 사건을 ‘고통’과 ‘꿈’의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작가의 노력으로 비친다. 단수, 단전된 집에서 촛불을 켜 자신이 모아온 제주 4.3의 기록을 ’나’에게 보여주는 ‘인선’의 가냘픈, 그러나 굳건한 의지처럼 말이다.


소설은 꿈에서 시작해 꿈으로 끝난다. 마치 제주 4.3 피해자의 혼령을 꿈의 세계에서 마주하려는 듯, 꿈과 현실 세계를 뒤섞어 가며 죽은 것을 살리고 산 것을 죽이는 작가의 노력은 소설 곳곳에서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소설의 처음과 결말은 자연스럽게 겹친다. 무덤과 나무가 뒤섞인 모래밭에 혼자 서서 바닷물이 차오르는 걸 느끼는 ’나(경하)‘의 꿈으로 소설이 열렸다면, ‘나’와 함께 눈밭에 누워 죽음을 예견하는 ‘인선’의 꿈과 현실 사이의 몽혼한 경계는 소설의 막이 닫히는 식이다. 소설은 이렇게 1부와 2부, 3부를 겹치고 흩뜨려 놓으며 독특한 소설적 구성을 만들어 간다.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145쪽)


산 것과 죽은 것의 경계를 상징하는 소설적 구성에서 작가는 두 가지 이미지를 소환한다. 바로 ’잘린 손가락‘과 ’나무‘의 이미지다. 이들은 각각 죽었으나 다시 접합된 것,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것을 상징한다. 마치 제주 4.3 사건이 끝났으나 끝나지 않은 것처럼, 피해자들은 계속해서 발굴되나 끝내 위로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가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경계를 상징하는 두 개의 이미지를 통해 피해자들의 고통을 더욱 세심하고 깊게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인선‘과 ’나‘가 ‘촛불‘이라는 이미지의 희미하지만 강력한 빛을 통해 무지를 드러내고 한 발짝 더 나아가듯이.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각각의 장이 자연물과 이미지로 채워져 있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데 자연물만큼 효과적인 이미지는 드물기 때문이다. 결정, 실, 폭설, 새, 빛, 나무, 그림자, 바람, 정적, 낙하, 바다 아래, 불꽃. 우리는 각각의 장에 나타난 이미지를 따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 현대사에서 벌어진 학살과 폭력과 고통을 응시한다. 소설 속 ’나‘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인선‘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독자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소설을 읽도록 작가는 유도한다.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이상한 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다.
밤마다 악몽이 내 생명을 도굴해 간 걸 말이야. 살아있는 누구도 더이상 곁에 남지 않은 걸 말이야.(237쪽)


‘꿈’이 소설의 핵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소설의 문체는 자연스럽게 시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 소설의 문장에는 감상을 압도할 정도로 무거운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단호함으로 서사를 밀고 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촛불이 흔들리듯 연약해지는 문장, 그 완급조절을 통해 작가는 사건을 규명하고 인물이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을 정확히 서술한다. 그렇기에 소설의 문장들은 매우 아름답지만 정확함을 놓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시적인 문장들로 내용을 흩뜨리지도 않는다. 정확하고 담담하기에 아름다운 문장으로 소설은 독자에게 하나의 서사시를 읽는 듯한 감상을 남긴다.


신형철 평론가는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추천사에 “이들 곁에 소설가 ’나‘는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고 썼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이 소설은 한국 현대사에서 벌어진 수많은 학살과 고통을, 오로지 고통이라는 정공법을 통해 뚫고 나아간다. 이러한 1:1의 대응은 독자가 읽기가 고통스러움에도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힘을 제공한다.



어떤 말을 중얼거린 다음에, 그걸 부인하려고 좀 더 큰 소리로 아니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
(…)
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206쪽)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읽기가 어렵다. 끝없이 쏟아지는 눈의 향연처럼 우리를 압도하는 강력한 이미지, 시적인 문장들과 경계를 넘나드는 소설적 구조, 제주 4.3 사건과 그 피해자들의 가족 찾기라는 소재의 힘, 삶과 죽음을 고찰하는 작가의 소설적 사유까지…… 쉽게 읽기는 분명 어려운 소설이다. 또한 소설이 ‘감각’에 다수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왜 그래야만 하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나의 경우, ‘나’가 제주도에 가는 과정에서 ‘나’의 마음속에 피어오른 ‘그래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끝내 정확한 답변으로 끝나지 않아 모호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읽어야만 한다면, 나는 당신의 무지를 뚫고 나갈 ‘촛불’의 힘을 느껴보기 위해서라고 답하고 싶다. 앞서 제주 4.3 희생자 추모식에 나타난 극우단체의 무지를 나는 지적한 바 있다. 무지는 혐오로 이어지고, 혐오는 배척으로 향하며, 배척은 곧 고통을 낳는다. 이 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로지 무지를 헤쳐 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무지를 헤쳐 나가는 길은 무척 험난하고 어두우며, 때로는 길이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길을 걷는 데 있어 이 소설만큼 강력한 힘을 제공할 작품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촛불처럼 희미하고 연약하지만 끝내는 빛으로 주위를 밝혀주는 소설. 그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나는 판단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325쪽)


그러니, 읽자. 읽고, 또 읽으며, 우리의 무지를 촛불로 밝히며 앞으로 나아가자. 우리의 용기는 아낌없는 독서와 경험에서 비롯해 우리가 고통을 고통으로 바라보고, 고통을 고통으로서 뚫고 나갈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아직 사라지지”(324쪽) 말라는 ‘나’의 바람처럼 우리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책임감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가 보지 못한 고통을 체험하자. 그렇게 영원한 작별에서 멀어지자.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작별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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