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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May 17. 2024

미래를 예감하기

강혜빈, 『미래는 허밍을 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허밍입을 다물고 코로 소리를 내어 노래 부르는 창법(唱法). 합창 등에 많이 쓰임.

     

강혜빈의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오감을 통한 감각이다. 강혜빈의 시 속 화자는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보고,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으며 사물과 자신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시에서 묘사되는 모든 것은 ‘말라붙은 눈물’, ‘설탕으로 코팅된 사랑’처럼 구체적인 사물 혹은 감각으로 드러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감각이 미래를 ‘예감’하는 데 사용된다는 점이다.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은 무엇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래를 만질 수도, 맛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를 맡거나 실제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다다르는 경위는 예측하거나 예감할 수 있다. 바로 그 감각이 강혜빈이 말하는 ‘허밍’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허밍은 입을 다물고 코로 소리를 내어 노래 부르는 창법을 뜻한다. 구체적인 가사, 즉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어떤 경로로 흘러갈지는 추측할 수 있는 창법이 바로 허밍이다. 음악은 필연적으로 구조를 가지며, 그 구조는 하나의 미래를 설계한다. 이 미래 안에서 일어나는 변주는 가사의 영역에 해당하고, 전체적인 틀은 우리가 직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강혜빈의 시는 감각을 통해 자연스럽게 구조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독자가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미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직감’에 불과하다. 독자가 강혜빈의 시를 통해 경험하는 미래는 결코 명료하거나 분명하지 않다. 미래는 이야기되었으나 아직 ‘현재’에 도달하지 않았고, 그 현재 역시도 감각에 의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왜곡은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과거-현재-미래 모두가 왜곡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시인은 이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다음의 수단을 도입한다.

첫 번째는 시 속 인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키코’, ‘레아몽’, ‘마사코’, ‘폴’처럼, 이 시집에서는 다양한 이름이 호명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 이름이라는 점, 모두 화자와 자신 사이의 경계선을 허물어뜨린다는 점,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들의 정체성이 돌출된다는 점에 있다.


「폴의 생활」 속 ‘폴’이 대표적이다. ‘폴’이라는 이름은 영어의 'Paul'을 연상시키지만 시에서 서술되는 폴은 ‘양파를 잘 썰고 / 벌레를 무서워하며 / 한국인’인 존재다.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폴은 ‘걷는 감각’과 ‘운동화 안에서 / 작은 돌멩이 한 알이 굴러다니는 것을’ 느끼는 데 집중한다. 그에게 ‘오래 사랑한 사람은 / 사랑했던 사람이 되었’기에 과거는 충분히 왜곡될 수 있고, 그 과거로부터 비롯된 현재 역시 왜곡될 수 있으며, 미래 역시 비틀릴 가능성이 있기에 단지 자신의 발바닥 아래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언제든 변형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동시에 차단하기 위해.


이 돌멩이의 감각은 ‘현재’의 감각을 의미하며, 이 감각은 곧 미래를 암시하고 예감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때 참고해볼 만한 학자가 있다. 바로 ‘주체성을 가진 사물’에 관해 이야기했던 브뤼노 라투르다.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으로 주체적인 위치에서 스스로 작동하는 사물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라투르에 따르면, 자연은 객관적·보편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실이란 실험실에서 만들어져 여러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구성’된 것이다. 실험실에서 구성된 객체는 실험실 바깥으로 나가 여러 행위자의 투쟁을 거치며 전파된다. 마치 ‘기차’라는 발명품이 실험실을 빠져나와 ‘교통수단’으로서 하나의 연결망을 이루며 인간과 비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사물에서 시작된 연결망은 인간을 넘어 비인간과 환경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간다. 이는 시공간도 다르지 않은데, 강혜빈의 시 속 화자들은 호명을 통해 불러낸 인물을 통해 감각을 구체화하고, 이 인물이 느끼는 감각을 미래의 예감과 연결지으며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폭을 감각적으로 펼쳐나간다. 라투르의 시각으로 강혜빈의 시를 본다면 사물과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는 필연적으로 불안정하고, 그 불안정함을 메우기 위한 반동이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반동은 SF적 상상력으로 드러난다.


강헤빈의 시에서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이 사물을 감각하게 하는 것만큼이나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SF적 상상력이다. 시인은 ‘슈뢰딩거의 상자’와 같은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강혜빈의 시에서 과학은 미래를 엿보는 상자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시인이 이 ‘슈뢰딩거의 상자’가 독자(혹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그 미래가 변형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강혜빈의 시집은 후반부로 갈수록 어쩐지 희망적인 메시지를 품는다. 슈뢰딩거의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가 살아있을 확률은 50:50이다. 핵분열에 의해 죽거나, 아니면 그 미래가 벌어지지 않아서 살아있거나. 하지만 이것은 수학적 확률일 뿐,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저 상자의 겉을 보면서 예감할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가 당신을 보고 운다면 / 틀림없이 럭키’라고.


이러한 발화는 시인이 화자와 인간에게 희망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수학적 확률은 말 그대로 수학일 뿐이고, 우리는 미래가 닥친 뒤에야 그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강혜빈은 ‘허밍’을 통해 우리가 예감하고 예상하고 감각했던 모든 상황이 긍정적으로 펼쳐지기를 바라며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가 살아남기를 빈다. 이는 우리(인간)가 계획한 미래가 그대로 당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어떤 예상치 못한 감각의 연결 상에서 예상하지 못한 미래가 당도하길 바라는 것에 가깝다.


이름의 호명-SF적 상상력은 그렇게 연결된다. 한 사람을 한 세계에 불러와 무언가를 느끼게 하고, 그 감각을 느끼게 한 사물(혹은 비인간)과 연결망을 맺은 뒤 그에게 다가올 수 있는 모든 미래를 실험해보는 것. 이는 2부의 제목인 ‘비물질 실험-사랑 발명가’와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가져와 이야기해보고 만지게 한 다음 그것을 상상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끝이 긍정적인 무엇-더 나아가 말한다면 사랑-에 도달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미래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강혜빈이 말하는 ‘허밍’을 통한 미래의 예감이다.


미래를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미래를 예감할 수 있을 뿐이다. 강혜빈은 이 ‘예감’을 자신만의 화법으로 극대화하면서 끝내는 우리 앞에 도달할 미래가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에로스적일 수도 있지만 인류 외의 무언가를 향한 총체적인 사랑에 해당할 수도 있다. 강혜빈은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개별적인 사랑이 전체적인 감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연결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감한 미래의 방향은 어디로 흐를까? 정말 사랑으로 흐를까? 그것을 생각하고, 또 결심하고, 실행하는 것을 바로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강혜빈의 시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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