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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Jan 27. 2022

이상한 세계, 이게 무슨 말이람

류진의 시집 <앙앙앙앙>


이상한 세계를 마주한 언어와 '나'


   내게 있어 ‘가장 이상한 사람’의 이미지는 언제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모자 장수(Mad Hatter)의 모습이었다. 늘 6시에 맞춰진 시간 속에서 3월의 토끼, 산쥐와 함께 끊임없이 티파티 중인 미치광이 모자 장수. 그들은 티파티의 참석자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저들끼리의 헛소리를 이어가며 파티를 즐긴다. 재밌는 점은, 그들의 헛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헛소리가 어쩐지 의미 있는 무엇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비슷한 음가를 가진 단어들을 길게 나열해놓고 그것을 노래 부르듯 이어갈 뿐인데, 계속 읽고 읽다 보면 어느새 그 대사에 쓰인 언어들이 한국어가 아니라 외국어,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외국어로 쓰인 상징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앨리스가 그러하듯, 모자 장수의 언어를 해독하려는 나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이상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가진 상식과 의미가 해체된, 이 세계 바깥의 세상이 바로 이상한 나라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간 이상한 나라, 그곳에서는 '이 세계'의 언어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류진의 시가 보여주는 이상한 언어의 세계


   앨리스가 시계 토끼를 따라 구멍에 빠진 것처럼, 류진의 시집을 읽고 있으면 종종 구멍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때의 구멍은 나의 현실과 이상한 나라를 연결해주는 통로로, 이 통로를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린 나는 다소 어리둥절해진다. 분명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기능과 이 세계 속 언어의 기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있던 가치들은 이 세계에서 딱히 소용 있는 것이 아니고, 소용이 있다고 해도 세계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팔달시장이 집 앞으로 몰려오기 전까지는 멸망하지 않는다 사람이 낳은 자는 너를 죽일 수 없다」 같은 시가 그렇다. 이 시는 예언, 태어남, 자라나는 몸, 배꼽, 맹꽁이 같은 단어들을 동원하며 화자의 탄생 신화를 의미화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 연 반복되는 ‘태어난 나는 어리둥절했다’라는 문장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시를 하나의 의미로 모으려는 시도는 찾기 힘들다. ‘맹꽁이의 예언으로 태어나 – 왠지 목소리가 모자라’, ‘흐느끼는 소리 역시 상자에 담으며, 놀랍군, 이렇게 손쉽게 시체를 만들다니 – 어떻게 시체를 만드는 걸까?’(하이픈은 필자)같이 연관 없는 내용을 병치해놓거나 충돌시키면서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또 여러 개의 감각에서 여러 개의 감각으로 옮겨가는 것이 이 시의 특징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화자가 ‘요람 → 무슨 말이람 → 모르겠지만’, ‘나는 배꼽 속으로 깊어졌다 발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 버섯의 멋진 갓처럼 둥근 물갈퀴가 나를 건져내기 전까지는’처럼 비슷한 음가를 가진 어절과 문장을 반복하면서, 시 속의 이미지들을 점점 불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화자가 걸으면 걷는 대로,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사물이 변화하고 감각이 이동하기에, 화자가 사물을 건드리는 순간 이미지는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뻗어 나가게 된다. 문장과 문장을 징검다리처럼 건너뛰고, 이미지가 역동적으로 작동하면서 마치 그것들이 폭발하는 듯한 양상을 띤다. 파티가 거듭되면서 빵과 차와 쟁반들이 증식되는 모자 장수의 티파티, 혹은 어디로 주제가 튈지 모르는 파티원들의 광기 어린 대화처럼 말이다.


   이러한 폭발은 비슷한 음가를 가진 어절의 연쇄를 통해 끊임없이 다른 감각으로 넘어가면서 전혀 다른 의미의 무엇으로 발견된다. ‘가고 싶은 방향은 모두 다른데, 어디론가 가게는 되는 / 머리, 가슴, 배처럼 / 동물계, 절지동물문, 순각강, 깊은바다지네목, 깊은바다지넷과,처럼.’(「칭다오 지네튀김」)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에서 ‘러시아에선 타조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 타조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살아갑니다 →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가 당신으로 살아갑니다 러시아에선’을 거치며 타조, 블라디보스토크, 당신, 그리고 마지막 ‘나’의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시는 건드리고 건드려지는 무한의 연쇄를 반복하면서 독자들을 원래의 의미로부터 다른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데려간다.


   나는 류진의 시가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광기 어린 목소리를 이어갔으면 좋겠다. 이 광기 어린 목소리에서 비롯된 기이한 흥겨움과 열기로 언어와 이미지를 마구 뒤섞는 그의 시를 읽는 것이 내겐 즐거운 경험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낯섦과 어리둥절함을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웃게 되고 자꾸만 보게 되는 모자 장수의 티파티처럼. 떠들면 떠들수록 이상하고 이상한 의미가 있게 되는 그의 언어가 어디로 갈지 앞으로도 보고 싶다.





이미지 출처 : 

1) Nicole Baster on Unsplash

2) Andrea Rapuzz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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