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밖의 세상에서 나는 마케팅 전략을 짜고 예산을 집행하며 '나'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 안의 세상에서 나의 효용 가치는 오직 아이의 수유량과 기저귀의 무게로만 측정되었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는 투명한 익명성이 고였고, 나는 그 낯선 고요함 속에서 처음으로 '나'라는 텍스트의 여백을 마주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것을 '희생'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희생보다는 '해체'에 가깝다.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단단하게 굳어있던 자아의 껍데기가 아이라는 강력한 파도에 휩쓸려 잘게 부서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부서진 조각들 사이로 감춰두었던 욕망들이 비죽 튀어나왔다. 성취를 향한 갈증,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던 명예욕, 그리고 무엇보다...
'나로 존재하고 싶다'는 근원적인 갈망.
철학자 헤겔은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아가 확립된다고 했으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타자의 시선이 완벽히 차단된 유모차 안의 세계에서 진짜 나를 발견했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숭고한 모성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작은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 너머, 다시금 세상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생존에 대한 지독한 허기였다.
'누구 엄마'라는 익명성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관찰자의 외투가 되었다.
사회적 타이틀이 삭제된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어떤 문장에 설레었는지, 그리고 어떤 결핍을 안고 살았는지를 선명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복수하고 싶었다. 엄마라는 이름 뒤에 숨어버린 내 영혼의 박제된 시간들에게. 하지만 진정한 복수는 과거의 화려했던 나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낮잠 시간, 식탁 끝에 걸터앉아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펜을 드는 것.
나를 '누구 엄마'로만 부르는 세상에 대항해, 여전히 나만의 고유한 문장을 길어 올리는 것.
오늘도 나는 아이를 재우고 노트북의 전원을 켠다. 화면의 커서가 깜빡이는 소리는 내 심장 박동과 닮아있다. 나는 이제 '누구 엄마'라는 익명성 위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이름을 다시 새기기 시작했다. 젖병을 삶는 냄새가 거실 가득 퍼지는 이 평범한 밤, 나의 자아는 비로소 가장 치열하게 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