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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반의 서재 Oct 27. 2022

3화 내가 색동저고리를 절대로 입지 않는 이유 (상)

춤추는 저고리

춤추는 저고리



할머니는 나에게 늘 한결같이 말씀하시곤 했다.

“여자가 재주가 너무 비상하면 팔자가 기구해지니까 재주가 있어도 적당히 숨기면서 살아라.”


요즘 세상에 이런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재주가 비상한 사람들이 독보적으로 성공을 거머쥘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할머니의 이 말씀은 틀릴 수도 있겠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늘 골방에서 재봉틀을 돌리셨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할머니에게 한복을 지어 달라는 의뢰를 많이 해왔던 터라 그녀는 늘 재봉틀을 돌리며 바쁘게 옷을 짓곤 하셨다. 


그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단연코 오색찬란한 색동저고리였다. 사실 우리나라 한복 하면 세계적으로 단아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예쁘지 않은 한복은 없다. 


그러나 당시 어린 나의 눈에는 단연코 오색찬란한 색동저고리가 아름답기로는 원탑이었다. 


할머니는 늘 분주하게 재봉틀을 돌리며 비단옷을 하나씩 둘씩 뚝딱뚝딱 만들어 내곤 하셨다. 물론 재봉틀만 돌려서는 한복이 지어질 수는 없다. 손바느질도 상대적으로 많이 해야만 했으니까...!


한복 만들기를 능수능란하게 하시는 할머니의 옆에 누워 신기한 듯 바라보다 보면 어느샌가 쏟아지는 단잠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두루마리 비단에서 나는 그 옷감 냄새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맡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그때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각설하고... 옷 만드는 솜씨가 엄청나게 특출 난 할머니에게 동네 아주머니들이 늘 앞다투어 한복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많은 주문에도 불구하고 밤을 꼬박 지새우며 옷을 한벌 두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뚝딱뚝딱 도깨비방망이를 가진 것 마냥 쉴 새 없이 지어내는 할머니는 그야말로 마법사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단 한 번도 고객이 원하는 마감기한을 넘긴 적이 없는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딱 한 번 마감 기한을 넘겨서 고객에게 사과가 아닌 사죄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나 때문이었다. 








그날도 나는 재봉틀로 열심히 옷을 짓고 있는 할머니의 옆에 누워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와 비단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맡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 


한동안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눈을 떠보니 할머니는 온 데 간 데 없고 다 만들어지기 일보직전의 한복 저고리가 ( 어린 나의 시선으로 보자면 ) 제법 높은 천장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얼핏 보니 웬 몸뚱이만 있는 젊은 여자가 색동저고리를 입고 즐겁게 몸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잘못 봤겠지 하는 마음에 얼른 두 눈을 비비면서 다시 한번 천장에 매달려서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춤추는 저고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저 색동저고리가 입어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누워서 하염없이 춤추는 저고리를 바라보던 나는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저고리가 걸려 있는 곳으로 있는 힘껏 손을 뻗쳐 보았지만... 웬 걸... 작고 어린 나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어봤자 콧방귀가 나올 정도로 택도 없는 높이였다. 그러면 그냥 포기하면 좋았을 텐데...! 


그날따라 그 저고리를 직접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예전부터 그 방 한 구석에는 등나무로 만든 흔들의자 하나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할머니가 틈틈이 쉬면서 뜨개질을 할 수 있는 쉼터 같은 유일한 공간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해 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서일까? 군데군데 빛이 바래고 까여 그냥 딱 보기에도 오래된 볼품없는 의자였다. 


나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의자를 젖 먹던 힘을 다해 힘겹게 끌고는 저고리가 걸려있는 그 아래에 탁 갖다 놓았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그 낡아서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흔들의자 위로 올라가 다시 한번 손을 쭉 뻗어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작은 고사리 손에는 그 색동저고리가 전혀 닿을 기색이 없어 보였다. 마치 저고리가 "감히 쪼끄만 게 어딜 넘 봐...!"라고 속삭이며 약을 바짝바짝 올리는 것만 같았다.


손에 전혀 잡힐 기색이 없는 그 예쁜 저고리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지며 속상해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여자의 나긋나긋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얘야. 내가 저 비단 저고리 꺼내는 걸 도와줄 테니 네가 한 번만 입어보고 내게 줄래?”


나는 귓가에서 속삭이는 그 여자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내 눈 바로 앞의 저고리를 휘익하고 건드리며 지나가자마자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색동저고리가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나는 그 광경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즐겁게 웃으며 의자 위에서 바닥으로 있는 힘껏 탁 소리를 내며 뛰어내렸다. 


뛰다가 다리를 접질려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하는 나의 몸을 누군가가 뒤에서 가뿐하게 잡아서 제 자리에 그대로 세워주는 것 같은 묘한 상황마저 벌어졌다.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회오리바람처럼 기분 째지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잘 나오지도 않는 휘파람을 부르며 흥분이 고조된 상태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비단 저고리를 주워서 그대로 몸에 걸쳤다. 


비단으로 지어진 다소 까슬까슬한 저고리는 나름 기분 좋은 느낌으로 나의 작은 몸을 폭 감싸줬다. 나는 비단 저고리를 걸친 채로 방구석 한편에 놓여 있는 전신 거울로 다가가 비쳐봤다. 


아주 변변찮은 작은 체구의 어린아이가 자신보다 월등하게 큰 색동저고리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색동 이불을 엉덩이까지 두른 그야말로 볼품없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색동저고리를 마침내 수중에 넣었다는 승리감에 도취된 나는 한참 동안 거울 앞에서 잔망스러운 자세를 취하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잠시 후 갑자기 머릿속에서 몇 번의 삐이이 하는 이명 소리와 함께 방금 전까지 잔망을 떨던 눈앞의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칠흑 같은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새파랗게 젊고 아주 어여쁜 아가씨가 오색 찬란한 색동저고리를 입은 모습으로 순식간에 변해 있었다. 


분명히 거울 속에 비쳐야 할 작고 볼품없는 아이의 모습에서 갑자기 늘씬하고 머리도 긴 예쁜 아가씨의 모습으로 탈바꿈을 한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란 나는 본능적으로 양손으로 두 볼을 꽈악 잡고 비틀었다. 그러나 전혀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몽롱한 시선으로 그 아가씨의 모습을 한 내 모습을 그저 황홀하게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거울 속에 서서 즐겁게 웃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에 곧 흥미를 잃어버린 나는 그 저고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그대로 벗어놓은 채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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