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로 남다
놀이터로 곧장 달려가서 그네를 타다가 철봉에 매달려 한참을 놀다가 날이 저물 무렵 집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잔뜩 화난 어조로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 혹시 그 색동 비단 저고리에 손을 댔어? 안 댔어?”
단 한 번도 내게 화를 낸 적이 없던 할머니가 그날따라 잔뜩 성난 표정으로 캐묻자 난생처음 보는 할머니의 모습에 무서워진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대답을 했다.
“아니 나는 그 비단 저고리를 만지지도 않았는데...” 쭈뼛거리며 거짓말을 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다시 한번 물었다.
“너 혹시 그 저고리 입어 본 건 아니지?”
성난 표정은 여전했지만 왠지 목소리에는 근심 반 걱정 반이 묻어나 있었다.
어리긴 했지만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뉘앙스에서 뭔지는 몰라도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를 직감한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손을 싹싹 빌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할머니,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돌연 태도를 바꾼 나의 다급한 자백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할머니의 안색이 갑자기 새하얗게 질려서는 황급하게 방 밖으로 뛰쳐나가셨다.
불과 몇 초도 안돼서 부랴부랴 뭔가를 양손에 잔뜩 들고 오시며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눈을 꼭 감고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절대로 대꾸를 해서는 안 돼. 알았지?”
“으응...”
“누가 뭐라고 말해도 절대로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말고 들리는 척도 해서는 안 돼. 알았지?”
“으응...”
할머니가 내게 단호하게 말하는 이유를 자세히는 몰라도 어렴풋이나마 이해는 할 수 있었기에 짧은 대답과 함께 그대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내 주위로 굵은소금을 뭉텅이 뭉텅이로 잡아 뿌리며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뿌리던 할머니는 그다음에는 기도소리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액체를 연거푸 촤악 촤악 뿌려댔다.
영문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 물이 뿌려질 때마다 나의 귓가에는 날카롭게 울부짖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기세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부짖던 그녀가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나에게 애원 섞인 어조로 아주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얘~ 저거 너무 뜨거우니까 그만 뿌리라고 해.”
“.......”
“얘~ 너 내 말 들리잖아. 어서 저거 좀 그만 뿌리라고 말해.”
"......."
"제발... 저거 좀 뿌리지 말라고 말해."
나는 그 목소리의 정체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안 들리는 척했다. 그런 태도에 화가 잔뜩 났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은 사근사근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자의 고운 목소리가 아닌, 남자와 여자의 히스테릭한 소리가 반반씩 섞인 듣기에도 께름칙한 소리로 나를 당장이라도 죽이겠다는 듯이 위협적으로 돌변했다.
“요 작은 년이 지가 입고 싶은 옷을 내가 입게 해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배신을 해. 어서 그만 뿌리게 하란 말이야. 몸이 타들어 갈 것만 같으니까... 안 그러면 저 할망구와 너를 발기발기 찢어버릴 테다.”
온갖 험악한 협박들이 난무했지만 나는 할머니의 말대로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 목소리가 안 들리는 척 시치미를 떼며 버텼다. 그러자 온갖 욕설과 협박을 내지르던 그 목소리가 점차 힘을 잃어가는 듯하더니 이내 최후의 발악을 해댔다.
“요 어린년이 저 늙은 할망구의 핏줄 아니랄까 봐 끝까지 버티는 꼬락서니 하고는... 지독한 년들. 내가 지금은 잠시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저 할망구를 비롯해서 요 작은 어린년까지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 말을 끝으로 사시나무 떨 듯 간신히 버티고 서있던 나는 속이 울렁거려 그대로 바닥에 토를 해댔다. 새까만 구정물이 입안 가득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멈추지도 않고 계속 입안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구정물에 놀란 나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서글프게 울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할머니 역시 들고 있던 소금 바가지를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는 다급하게 다가와 나의 가녀린 등을 쓸어 만지며 들릴 듯 말듯한 작은 소리로 기도를 읊조리셨다.
잠시 후 나는 그대로 할머니의 품 안으로 고꾸라지며 잠시 의식을 잃었다. 할머니는 정신을 잃은 나를 그대로 꼭 끌어안아주시며 깊은 한숨을 두세 번 내쉬다 말고 혼잣말로 자신을 강하게 탓했다.
“이래서 내가 죽은 사람의 비단 저고리는 만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히 불쌍한 마음에 지어준다고 해서 이런 사달이 났네 그려.”
그날 할머니는 그 옷을 의뢰한 사람의 집에 찾아가서 죄인처럼 사죄를 했다. 본래 그 집에 하나 있던 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던 중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집 부모님은 혼인도 못해 보고 떠난 자식의 영혼결혼식을 준비하던 중 비단 한복을 잘 만든다는 할머니의 소문을 듣고는 살아생전 딸아이가 좋아했던 색동저고리를 지어 줄 수 없겠냐는 의뢰를 했다.
죽은 영혼이라도 산사람처럼 멋지게 잘 만든 옷을 입혀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통한 것이었을까...?
할머니는 흔쾌히 그 자리에서 허락을 했다. 뭐어 별일이야 있을까 싶어서 살아생전에는 하지 못했지만, 영혼결혼식에서 만큼이라도 알록달록 예쁜 색동저고리를 입고 시집을 가라는 좋은 뜻으로 정성껏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제 손주가 잡귀의 속임수에 빠져 내어 주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옷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주인이 버젓이 존재하는 그 옷을 다른 잡귀가 탐을 내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딸은 자신의 영혼결혼식에서는 살아생전 그토록 좋아했던 색동저고리는 입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할머니는 다시 한번 그 아가씨를 위해 오색찬란한 색동저고리를 곱게 지어 그 부모에게 돈도 일절 받지 않고 결혼식 선물로 보냈다.
그것에 대한 보답이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할머니가 잠깐 쉴 요량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다 말고 잠깐 선잠이 들자, 색동저고리와 치마를 잘 차려입은 곱디고운 아가씨가 집으로 찾아와서는 예쁜 옷을 지어주셔서 고맙다며 큰 절을 날아갈 듯이 하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신랑에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전혀 가지 않을 정도로 생생했단다.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예쁜 옷을 입어보고 싶다는 열망은 똑같은 것 같다.
그것도 가뜩이나 영혼결혼식을 위한 특별한 예복으로 지어진 옷이었으니 다른 영가들도 욕심을 냈을 것이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아마 그날도 나를 시켜서 비단 저고리를 입어보게 꼬드긴 건 이승에서 혼례도 올리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던 영혼이 자신의 욕심을 어찌어찌 채워볼 요량으로 영이 트인 작은 여자아이를 살살 꼬드겨 입어 보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애처롭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나와 할머니를 죽일 듯이 그렇게 악다구니를 퍼붓다 못해, 내게 그런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하다가 떠난 걸 봐서는 결코 착한 영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이 사건 이후에도 나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는 했다.
어쨌든 그날 겪은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두 번 다시는 예쁜 오색빛깔 색동저고리는 쳐다보지도 않을뿐더러 입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