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눈치 제로 폭탄
지인이 그 년은 남편 사업이 어려워졌으니 돈 좀 빌려 달라고 뻔질나게 내게 부탁을 해왔다.
그러나 나 역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월급쟁이 남편과 두 아이들을 케어하느라 늘 돈에 쪼들리고 살았다.
게다가 아이들이 커가면서 두 아이에게 들어가는 교육비며 생활비며...
늘 적자에 빠듯해서 그녀에게 빌려 줄 여윳돈 따위는 없었다.
그렇지만 짠한 마음에 아이들과 밥이라도 굶지 말라고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건네주곤 했었지만
아마도 그녀는 그런 나의 행동에 상처를 입었는지는 몰라도 그날 이후로는 전화번호도 싹 바꾼 채 더 이상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괘씸한 마음이 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차라리 그런 친구는 내 옆에 없는 게 내 멘털 건강에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경숙이나 지인이나 별로 눈에 띄는 친구들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잘 나가는 기업가와 럭셔리한 사모님이 되어 나타났다.
둘 다 나이와는 한참 거리가 먼 탱탱한 피부에 얼굴 모양도 그새 많이도 변해 있었다.
모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둘은 우리들에게 금빛으로 테를 두른 명함을 내밀며
“ 언제든지 연락해,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해 줄 테니, 난 가진 게 돈 밖에 없잖니, 얘들아!”
콧소리를 장착한 지인이의 목소리가 왠지 나를 겨냥한 듯 불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명함 두 장을 받아서는 들고 있던 백 안에 대충 쑤셔 넣고는
덩치 좋은 경호원 세 명과 외제 차를 타고 떠나는 지인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마치 얼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다.
배알이 꼬일 대로 꼴려 열불이 나고 있던 나를 가만히 잠자코 옆에서 지켜보던 혜수가 뜬금없이 물었다.
“지인이 저 년! 숙희 너한테는 돈 안 빌리던? 네 돈도 많이 빌렸지? 나는 저년한테 꽤 뜯겼는데... 저년은 참 뻔뻔한 년이지 않냐?”
나는 혜수의 뜯겼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돈을 뜯겼다는 게...”
“너도 뜯겼잖아, 안 그래? 너 대학 다닐 때부터 지인이 저년이랑 단짝이었잖아”
나는 혜수의 단짝이라는 단어가 몹시 불쾌하고 거슬렸지만 그냥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고 아주 드라이하게 대답했다.
“글쎄, 나는 뜯겼다기보다는 그냥 생활비나 하라고 몇 번 준 적은 있지. 예전부터 우리 아버지가 친구들이라면 깜빡 죽어서 겁 없이 연대 보증 서줬다가 우리 집도 쫄딱 망해서... 돈을 빌려주는 대신 그냥 차라리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더 이상의 대답은 나의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지 않아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혜수랑은 대학 4년 내내 그다지 친하게 지낸 적이 없어서 얘가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내 맘 속을 확 싸질러 내버렸다간 된통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던 차였다.
나의 대답을 잠자코 듣던 혜수는 숙희 너도 참 너답다는 표정을 짓다 말고 물었다.
“시간 괜찮으면 나랑 둘이서 차나 한 잔 마시러 갈래, 어때? 시간 괜찮아?”
“뭐어... 괜찮아, 한두 시간 정도는.”
잠시 혜수가 잘 간다는 단골 카페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 보니 그녀 역시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경숙이 보다는 덜 요란한 나름 잘 나가는 청담동 피부숍 사장님이었다.
오늘은 동창 모임이기도 하고 바람도 쐴 겸 피부숍은 직원에게 맡기고 겸사겸사 그냥 바람이나 쐴 겸 나왔다고 했다.
혜수 역시도 집에서 남편과 아이 둘을 뒷바라지하며 악착같이 살아온 나와는 전혀 딴 세상의 사람들 같았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동창 모임을 갔다 온 그날 이후 갱년기 우울증이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부럽기도 하고 그 사이 나는 뭐 했나 싶기도 하고. 나 자신이 꽤나 하찮게 느껴졌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말을 밉게 깐족거리는 남편 때문에 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오곤 했다.
그럴 때면 으레 그렇듯 얼음을 잔뜩 넣은 봉지 커피를 진하게 타서는 벌컥벌컥 마시고는 얼음까지 으드득으드득 와그작 와그작 소리를 내며 씹어 먹었다.
그러면 열받아서 올랐던 열이 조금쯤은 내리며 신경질이 뻗쳐서 욱했던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곤 했다.
한 번은 이런 나를 바라보던 딸이 내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그렇게 얼음을 씹어 먹다간 치아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 괜찮아?”
나는 딸의 아무렇지도 않은 이 말에 갑자기 웃음이 빵 터졌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이 말에 눈물까지 훔치며 웃고 있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조심스럽게 나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엄마, 괜찮아? 어디가 많이 아픈 건 아니지...?”
“얘는 별 걸 다 걱정하고 있어~ 내가 아프긴 어디가 아프겠니? 맨날 집구석에서 시답잖은 집안일이나 하고 있는데.”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파에 대자로 누워 티브이 채널을 막무가내로 돌리던 남편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네 엄마가 힘들 일이 뭐가 있어? 밖에서 돈 벌어다 주는 내가 제일 힘들지. 안 그러냐?"
남편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밖에서 힘들게 돈을 벌었는지... 상사의 비위를 맞추려고 얼마나 안달을 했는지... 그래서 스트레스로 이렇게 탈모가 진행됐고... 어쩌고 저쩌고
듣기도 싫은 일장 연설을 하고 있던 남편을 향해 딸아이는 잠자코 듣고 있는 척하다가는 피식 웃다 말고 지 아빠가 들으라는 듯이 힘주어 말을 이어나갔다.
“엄마! 집안일이 어디 쉬운 일이야? 해도 해도 티도 안 나고... 끝도 없고... 나 같으면 엄마처럼 가족들을 위해서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사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역시 우리 장숙희 여사님 대단하네...!”
할 말은 더 많은 것 같은 눈치였지만... 눈치가 딸과는 다르게 제로인 남편이 딸의 말을 가로채서는 또다시 자신의 고충이 어쩌고 저쩌고 되지도 않게 끼어들었다.
김이 팍 샜는지 더 이상의 말은 안 하고 그저 엄마인 내게 보란 듯이 엄지 척을 하며 장난스럽게 웃어주는 속 깊은 딸이었다.
나는 장난스럽지만 진중한 딸의 말에 갑자기 울컥해서는 눈물을 찔끔거리다 말고 앉아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잽싸게 뭐가 마려운 강아지 마냥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물을 틀어 놓고는 울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 컸다고 엄마 편도 들어줄 줄도 아는 딸이 참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그 말들이 딸의 입이 아닌 남편의 그 잘난 주둥이에서 나왔으면 얼마나 더 기쁘고 위로가 됐을까...?라고 생각하니 맘이 울컥하기도 했지만...
그 나이까지 가족들을 위해 힘들게 일하는 남편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얄밉기도 하는 양가적인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 장숙희는 살면서 남편에게 고맙다. 잘했다. 덕분이다.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 위로와 고마움의 말보다는 레퍼토리도 아주 징글징글하게 늘 똑같다.
늘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허다하다.
그래도 너는 남편이라도 잘 만났으니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냐...?
나도 너처럼 집에서 탱자탱자 놀면서 아이들만 키우라고 했다면 둘 다 잘 키워서 명문대에 거뜬히 합격을 시키고도 남았을 텐데...!
너는 어째 다른 집 와이프들처럼 꾸미 지를 않고 옷은 그게 뭐냐...?
도대체 왜 옷은 그렇게 없는 사람처럼 늘 목이 축 늘어질 때까지 입는 데다가, 화장은 왜 안 하고 중년 아저씨 같은 얼굴로 늘 상 있는 거냐...?
내가 너를 보고 있으면 어쩌고 저쩌고 싶은 마음이 쌀 한 톨만큼이라도 있겠냐...?
그는 늘 개기름이 낀 능글맞은 얼굴로 내게 돌려 까기를 시전 하며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높이는 남편이었다.
말하자면 나르시시스트 말기 환자.
지밖에는 모르는 수양이 한참이나 덜 된 남편.
그런 남편을 만나서 25년 넘게 살았으니 내 자존감은 이미 바닥을 치고도 남았다.
나는 늘 자신감이 결여된 채로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나이만 먹었다.
시어머니 역시 명절 때만 되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나를 볼 때마다 우리 엄청나게 잘난 아드님이 하필 왜 아무것도 없는 너 같은 것하고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늘 대놓고 혀를 끌끌 차셨다.
우리 아들이 눈을 좀 높여서 집안에 돈도 있고 학벌도 있는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으면 고생도 덜하고 심지어 장인, 장모한테 콩고물이라도 떨어져서 편했을 텐데...
어째 눈은 아예 그냥 장식품을 걸었는지, 나는 너 같은 며느리는 트럭으로 줘도 싫어서 안 받을 것 같은데... 라며 또 한 번 나를 향한 밑도 끝도 없는 디스를 시전 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그런 모욕적인 소리를 듣고 있던 그 어느 누구도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던가...!
소파에 처 누워 티브이를 보던 남편 역시도 자신의 어머니 말에는 그저 무언의 침묵으로 일관하기에 바빴다.
게다가 내 아래에 있는 네 명의 시누이들 역시 자신의 엄마 말에 동조를 하면 했지, 어느 누구 하나 내 편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다섯 남매가 생긴 거부터 시어머니 판박이를 해서는 어째 성격까지 그렇게 똑같은지...
공장이 따로 없었다.
어머님 당신 눈에만 예쁘고 잘생긴 아들이었지.... 사실 우리 집 남편은 가감 없이 그냥 못생겼다.
같이 다니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못생겼다.
게다가 머리는 시원하게 훌러덩 벗겨진 데다가 배불뚝이가 따로 없었다.
그냥 밖에서 돌아다니는 폭탄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