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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반의 서재 Jan 15. 2024

경단녀 장숙희

1화 동창모임

밤새 잠을 설친 나는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요즘 나는 갱년기 우울증으로 하루하루가 힘이 든다.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나이지만 갱년기 손님만큼은 빠르게도 찾아왔다. 


그래서일까...? 


젊은 시절을 가족들을 위해서만 악착같이 살았던 지난날들에 조금씩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은 대학 동창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한 달 전에 우연찮게 동창인 혜수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그녀는 알음알음 어떻게 알고 내 연락처로 연락을 해왔다.


하긴 내 핸드폰 번호는 대학을 다닐 때 가지고 다녔던 번호 그대로였다.


바꾸자니 귀찮기도 하고 내 성격 자체가 한 번 산 물건은 쉽게 버리지 않고 그냥 뽕을 뽑는 성격이다 보니 아직도 그 폰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혜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예전에 풋풋했던 이십 대 여대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대단한 착각을 했었나 보다.


나는 선뜻 동창 모임에 나가겠다고 말했고 지금 와서 보니 다른 애들은 다 잘 나가는데 내 꼬락서니만 하찮아 보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우울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뒤늦게 나오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나는 애써 아닌 척했다. 


결국은 입에 침이 마르게 잘난 척을 오지게 처하는 친구 년들의 들러리를 서고 있는 중이었다.


같은 대학을 나온 동창인 경숙이는 지금 중견 기업의 CEO가 되어 멋져 보였다. 


또한 지인이 역시 잘 나가는 사모님이 되었는지 개뿔도 없는 동창 모임에 외제 차에 경호원도 한 명이 아닌 세 명까지 천연덕스럽게 대동하고 나타났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배알이 꼴리면 늘 의식이 다른 곳을 향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지인이 고년의 경호원들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에 유튜브나 티브이만 틀면 떠들썩하게 세간에 화제가 됐던 파라 그룹의 혼외자를 사칭하며 사기를 치던 전XX 얘기가 생각났다.


그나저나 이 사기꾼 전XX 이 티브이에 확실하게 제 얼굴을 각인시키는 것을 봐서는 정말 똥 멍청이 이거나 아니면 상 관종이거나


아님 난 년...? 그것도 아니면 난 놈...? 


어쩌면 전 XX 이란 년인지 놈인지는 천하의  몹쓸 난 년, 놈이지 않을까...?


 어쨌든 이 사기꾼 X 때문에 금전적인 피해를 보고 피눈물을 흘리는 분들에게는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그나저나 왕년에 잘 나가던 대단한 언니를 어떻게 꼬셨는지 대단하긴 하다. 


하긴 사람 홀리는 건 돈지랄이 딱이긴 하네. 


돈지랄에 병풍 효과... 그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겠지.


만약 아줌마인 내가 그 사기꾼의 타깃이고 그렇게 뒤에 떡하니 경호원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면서 


내게 돈지랄을 확실하게 떨어주면 나 같아도 홀라당 발라당 넘어가다 못해 아주 퐁당 빠질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나 같은 나이만 먹어 주름이 켜켜이 쌓인  아줌마가 뭐라고 어느 누가 돈지랄을 떨어줄까...?


그건 그렇고 파라그룹 회장님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르셨기에 여기저기 사기꾼들이 나타나 혼외자라니 뭐라니 꼴 값을 떨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사실 살면서 파라그룹은 여기저기 사기꾼들의 입에서나 들어본 그룹인지라 


물론 나 같은 일반인은 관심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분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긴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보기에는 그냥 허허하고 웃고 넘기시는 대단한 호인이 아니실까? 


그건 그렇고... 다시 나의 의식은 동창회 자리로 돌아왔다.


지인이 년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칭칭 두르고 나타나서는 간 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자랑 질을 해대며 분위기 파악마저 못하는 듯했다. 


심지어 동창회가 파한 자리에서는 명품 중에 명품인 토트백 안에서 명품 장지갑을 꺼내 밥값을 계산해 줄줄 알았지만...


역시나 지인이나 경숙이 그 년들은 싸가지가 아예 가출을 한 년들이다.


돈지랄을 열라게 했던 CEO 경숙이 고년은 딱 지가 처먹은 것만 계산을 하고 서둘러 나갔고 


지인이 이년은 카드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나보고 대놓고 밥값을 내 달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밥값을 대신 내 달라는 지인이의 말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냥 못 들은 척하면서 옆에 앉아 있는 동창회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혜수에게 물었다. 


“혜수야, 우리 더치페이 맞지?” 

“그럼, 당연히 더치페이지!” 

“그러면 1인당 33900원만 내면 되는 거지?” 

“당연하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 굉장히 황당하다는 얼굴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지인이의 눈빛이 사실 마음에 걸렸지만 


이참에 너도 한 번 당해봐라 하는 마음뿐이었다. 


참 여자들의 우정이란 그놈의 자존심이 다 뭐라고, 참 얄팍하기 그지없다. 


지인의 고년에게 이참에 엿이라도 먹으라는 심정으로 


바로  눈앞에서 내게 썩소를 날리고 있는 모습은 철저히 무시한 채로 


총무인 혜수에게 내 식사비 만을 건넸다. 


몇 주 전부터 동창 모임에 나갈 생각에 한껏 들떠서 매년 비싸서 사지도 못하고 


간간히 눈팅만 하고 있었던 트렌치코트를 이번에야말로 큰맘 먹고 12개월 할부로 질러서 마련했지만 


내가 입고 나간 나름 비싼 트렌치코트는 사모님 지인이나 CEO 경숙이가 입고 있는 옷들에 비해서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브랜드였다. 


그러니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이 언제 끝나나 시간만 재고 있게 되고 


맛있어야 할 음식들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소여물 먹듯이 마구마구 위 속으로 욱여넣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심기가 몹시 불편한 내게 지인이 요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은 지금 현찰이 없으니 나보고 내 달라는 부탁도 아닌 내라는 뻔뻔함에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려버린 상태였다. 


결혼한 이후부터는 내 건강 관리는 아예 뒷전으로 하고 남편과 아이들만 악착같이 챙기고


내 인생은 그냥 대충대충 살다 보니 위고 장이고 성한 곳이 없던 참이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시어머니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꾹꾹 속으로 참다못해 


그 울화 병으로 화장실에서 힘을 주다가 치질이라는 참 명예스럽지 못한 병명까지 더해졌다. 


그야말로 지금 내 몸은 움직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떻게 터지든지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시한폭탄...! 


억지로 욱여넣은 음식들이 위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는지 속이 메슥거리며 


음식이 목구멍 위로 바짝 올라와 토를 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비싸게 장만한 트렌치코트를 챙겨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역시나 속에 아무렇게나 욱여넣은 음식들을 다 게워내고 나서야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옆에서 볼일을 보던 사람은 내가 웩~ 웩~ 소리를 내며 게워내는 소리에 비위가 많이 상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겨우겨우 속이 진정된 나는 밖으로 나와 화장실에 걸려 있던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며 손을 신경질적으로 벅벅 씻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낯선 중년의 아줌마는 윤기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된 푸석푸석한 얼굴에 


화장이 군데군데 들떠서는 마치 얼굴에 가면이라도 쓴 듯 부자연스러웠다.


잠시 화장을 고치려고 해도 총체적인 난국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전에는 날렵함을 자랑하던 갸름하던 턱 선도 이제는 둥그렇다 못해 집에서 키우는 쫑이라는 이름의 불 독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쫑이와 다른 점은 침만 안 흘리고 있다는 것일 뿐... 


처진 볼 살은 우리 집 반려견인 쫑이를 쏙 빼닮은 나였다. 


게다가 눈 화장도 동물원의 판다 마냥 시커멓게 번지고 머리카락도 군데군데 비어있고... 


오기 전에 정성스럽게 바른 핑크  빛 립스틱이 옅어진 입 주변에는 


열심히 토하다 묻은 밥알이 마치 보조개처럼 추접스럽게 눌어붙어있었다. 


나름 우아하게 점심을 먹은 것뿐인데 그야말로 몰골은 저녁 술 만찬을 거하게 즐긴 흉하디 흉한 꼬락서니였다. 


우리 집 남편은 항상 화장기가 전혀 없는 내게 좀 꾸미고 살라고 잔소리를 해 댔지만...


나는 남편의 소리를 그냥 옆집 멍멍이 짖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신경을 코딱지만큼도 쓰지 않고 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참 딱하게 느껴졌다.


역시나 예전의 나하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볼품없이 늙어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단어인지 예전에는 몰랐다. 


나 만큼은 나이를 먹어도 그 예전의 얼굴은 그대로 아름답게 탱글탱글 할 거라고 말도 안 되는 공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우리 동네 피부과가 그렇게 중년 아줌마 군단으로 붐볐던 거다. 


그곳은 나처럼 하염없이 축 늘어진 피부를 조금쯤은 탱탱하게 복원해 보고 싶은 중년 아줌마들의 로망을 이루게 해주는 성지였던 거다. 


그걸 여태껏 나만 몰랐던 거다. 


우리 동네 피부과는 나같이 주부 습진이나 걸려서 약을 처방받고 싶어 하는 환자들에게는 쉽게 예약을 해주지도 않거니와 


혹여 예약을 잡아줬다고 한들 피부과 의사 선생은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짜증 섞인 표정으로 건성건성 물어본 후 약만 번개 같은 속도로 처방해 주고는 진료실에서 추방한다. 


레이저를 받지 않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한참 먼 아줌마들은- 다시는 이곳에 알짱거리지도 마시오 라는 슬픈 경고장처럼 들렸다.


***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지인이와는 단짝 못지않게 친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닭 보듯 개 보듯 하는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그럴게... 지인이 고년은 내게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매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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