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사라진 세계에서
연이어 반복되는 자살 소식의 충격이 채 가기도 전에, 타인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건들에 우리는 매일 불안감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가장 안전한 나라라고 말하는 이곳에서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자전거 빼고는 아무것도 잃어버릴 일이 없다는 대한민국에서. 내가 눈을 뜬 어느 날 아침 '오늘도 죽지 않고 잘 버틸 수 있기를' 하고 바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한 때, 자꾸만 치솟는 자살률로 인해 이 사회가 얼마나 생명 경시의 풍조가 가득한지 말하던 이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어떤가.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가치'였다. 이제는 나의 생명뿐 아닌 타인의 생명마저 경시하는 이 사회 속에서 오늘도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참 아름다운 나라다.
수많은 조상의 한과 얼이 가득 서려있는 나라다. 그들이 제 한 몸을 던져 부서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지켜낸 나라다.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고, 고유한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투쟁하는 나라다. 국민의 자유를 위한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사랑할 수 있도록 애써온 나라다.
어느 누가 이런 말을 했다. '남과 북이 갈라져있는 것부터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젊은 세대의 고충과 괴로움, 나이 든 세대의 소외감, 남자에게 강요되는 의무와 여자에게 강요되는 여성성. 뼈저린 분단의 아픔 속에서 우리가 학습한 것은 또 다른 분단이었다. 같은 피가 흐르고 같은 역사를 영위한 이들조차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 다른 이론을 내세우며 갈라져 있는데, 그다음 세대가 어떻게 분단의 아픔을 이해하고 서로를 포용하는 것을 학습할 수 있는가.
지켜내지 못한 하나는 스노볼처럼 굴러와 이제 우리의 사회를 조각내고 있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천혜의 자연과 사계절이 흐르는 나라에서.
아름다움을 누릴 시간은커녕, 보호받지 못하는 목숨을 부여잡고 오늘 나에게는 무탈한 하루가 주어지길 고대한다니. 이 시대에, 이 시기에, 이 나라에서 말이다.
나는 속상했고, 분노했다.
나 하나의 속상함과 분노는 당장 나의 주변 환경조차 바꿀 수 없음에도, 연이어 들려오는 가슴 아픈 소식에 마음을 부여잡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안타까움에 홀로 괴로워했다. 괴로움은 나눌수록 덜어진다고 하던데, 어느새 우리는 이 괴로움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조차 없다. '네 일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라는 말에 무색해지기 쉬운 일들이었다.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한들, 이 좁아터진 땅 덩어리에서 겨우 몇 인연만 건넌다면 내가 아는 사람일 수 있지 않은가. 그 어떤 희생도 무고한 희생이라면 발생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해야 했던 것 아닌가.
누가 우리를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몰아넣었을까. 분단의 아픔일까. 세대가 거듭해 유전자에 각인된 분열의 학습일까. 이제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도 쉬이 꺼낼 수 없는 이 나라의 모습일까. 하루는 한탄스럽고 개탄스러운 마음에 이러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땅 덩어리가 넓은 지역에서는 하루에 몇 건의 사건이 일어나는 줄 아니?'
아-,
그래서 이렇게 우울한 일들이 있을 때는 저 옆 나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불우한 일들을 보며 위안이라도 삼으라는 것인가. 모아놓고 보아야 많은 것뿐이지, 결코 무거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일들이 그렇게 가볍다는 듯이 치부했을까.
사랑이 사라져 가는 세상이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져 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사랑하기를 포기했다. 처음에는 연인이 될 수 있던 존재를, 친구들, 가족을, 마지막에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을 포기하니 타인을 생각할 이유가 없어졌다.
사랑을 잃은 이 세상에서 누가 그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다 할 수 있을까. 나 하나도 숨 쉬기 버거운 이 세상에서, 고독하게 울부짖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을까.
사랑을 잃었기에 나 자신을 잃었고, 마침내 벼랑 끝에서 선택한 것이 생명 경시라는 이 사회가 안타까웠다. 어떤 생명조차 존중받지 않을 이유는 없다. 사랑이 사라진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자리 잡고 마침내 내 것이 아닌 생명을 앗아갈 때 그들은 앞으로 남은 순간의 불행함을 차마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무엇이라도 이룬 것 같은 착각과 쾌감은 매우 일시적일 뿐이다. 마음속에서 나 자신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칭할지언정,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들을 경멸하고 경시할 것이다. 타인의 생명을 경시한 그들의 생명을 경시하고, 똑같이 앗아가야 이치에 맞다고 할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받고 싶어서 저지른 무책임한 짓, 사랑을 갈구하는 처절하고 외로운 몸짓.
뒤틀린 행동으로 꺼내보인 것은 이성이 배제된 짐승 같은 본능 하나.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찾지 못해 마침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권리를 스스로 박탈당해 버린 이들.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해야겠다.
날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모든 생명을 사랑해.
입버릇처럼 사랑을 외치지 않다가, 너무 힘든 어느 순간에 내가 나를 놓아 버릴까. 인간이길 포기한 채 영영 닿지 못할 사랑을 갈구하는 괴물이 되어버릴까. 제정신으로도 견디기 힘든 이 세상을 사랑마저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해야 한다.
분열된 이 세상을, 언젠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아침에 꺾여버린 무고했던 삶들을. 어떻게 서든 살아가기 위해 발악하는 아직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존재들을. 서로 가치관이 달라도, 살아온 형태가 달라도, 조금 재수 없고 잘난 척하는 녀석이거나 제법 이기적인 녀석이라도.
내 마음을 몰라주고 얌체처럼 구는 당신도, 볼 때마다 영 기분이 상하도록 까칠하게 말하는 당신도. 마음속으로는 미워 죽겠다고 생각할지언정, 그럼에도 당신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으니 사랑하겠다.
사랑이 사라진 세상에 남겨진 이들은 목적 없이 떠도는 영혼 그 자체밖에 되지 못할 테니,
나라도 기꺼이 사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
그러니 다소 불행하다 곱씹으며 하루를 저주하던 이라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매일 밤을 눈물로 베개를 적시던 당신이라도 아직 내가 여기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루 하루가 매일 힘들어 억지로 부여잡고 간간히 목숨만 부지한다는,
매일을 죽지 못해 산다는, 모두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괴로움을 떨치지 못한다는,
그런 당신을 내가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