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절멸
요 몇 년 간, 수많은 사람들을 알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그중에는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인연들이 있었을 것이다. SNS의 발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SNS를 통해 배우기 시작했다. 나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간간히 전해지는 근황 사진과, 짤막한 문장 몇 줄로 소개되는 그 일상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전부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이 편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나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내가 생각할 때 부러워서, 또는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예쁜 사랑이나 연애의 형태가 지금 내가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괴로웠다.
아마 꽤 오래전에 연락이 끊겼어야 했지만, 슬프게도- SNS의 발달로 인해 나는 여전히 가늘게 숨만 쉬는 인연들을 몇 개 유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 무리의 시간이 부러웠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라 자부할 수 있는 만큼, 그 무리의 친구들이 보여주는 만남이나 행동들을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속상했다. 이러다가 정말 내 주위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는 것 아니야? 하고, 괜한 걱정을 사서 끌어안은 채 우려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얄팍한 인연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조차 내 손으로 날려버린 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그 친구들을 진심으로 보고 싶고 걱정했다면, 내가 연애를 하는 상대를 제외하고도 그들에게 시간을 써야만 했다. 먼저 연락을 하고 궁금해하고,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고 시간을 내어야 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스스로의 무리 관계를 단단하게 다질 즈음에 나는 무엇을 했나. 오늘은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물론 나도 몇 개의 무리를 가지고 있다. 결국 사회적인 기능을 다 해야만 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숙명에 걸맞게 말이다. 회사, 집, 학교, 기타 등등. 무리를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커뮤니티를 겪고 살아오며 말이다. 그들 중에는 정말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연락을 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아니어도 간간이 소식을 전하고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마주하는 무리들도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회사 동료들이라는 것은 조금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굉장히 좋은 팀원들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하는 시간을 꽤 좋아라 하는 편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떠나 여러 무리들을 살펴보자면 내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얄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절멸이 머지않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연히 이전에 참 친하게 지냈던 A의 연락을 보게 되었다. 내 의미 없는 몇 가지 문장을 끝으로, A는 내 연락에 더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내가 조금 더 의지를 가지고 얘기를 나눴다면, 또는 내가 먼저 A를 자주 찾았다면 우리가 지금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사이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당시 나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늘 연애를 해왔다. 쉰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연애를 하면서 자존감을 채우고, 사랑을 받아야만 내가 존재하는 이유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연애를 하느라 바쁜 사람이었다. 언제나. 가끔씩 나를 찾는 친구들의 연락에 귀찮은 듯이 답했다. 한 번 보자는 이야기는 그저 안부처럼 전하는 얘기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나는 연애를 하느라 바빴으니까.
내 손으로 나는 나의 인간관계를 상당히 축소해왔다. 나의 연인이 싫어해서, 이성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이성과 연락하는 것을 원치 않아해서. 주말에는 꼭 연인과 같이 데이트를 즐겨야만 해서. 그런 숱한 이유가 끝내 얄팍한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노력의 절반만큼이라도 내가 노력했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머뭇거리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연애를 잠시 쉬어가기로 한 후에도 한참을 나는 혼란스러워했다. 매일매일 사람이 그리워 오늘은 누군가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밤 사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에 속상해야만 했다.
잠이 들기 전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이 가득 담긴 연락을 받아왔던 나였기 때문에 그런 목적이 아닌 이유로 굳이 밤 사이에 나를 찾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사랑을 받아야만 자존감이 채워질 정도로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나였기 때문일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혹시나 찾아온 연락이 광고나 스팸이 아니라 나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사람이기를,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의 근황을 궁금해해 줬으면.
그런데 사실은,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내가 정말 자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굳이 먼저 연락을 하며 근황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바쁠 때는 그들을 밀어냈다. 연애가 내 세상의 중심일 때 그들의 연락에 얼마나 성의 없이 답변을 했었는지. 인과응보다.
혼자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다 쓰고 떨어진 끈처럼 달랑거리는 인연마저도 제발, 제발,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말은 연애를 그만하고 혼자이기를 받아들이겠다며 사실은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를 찾아주길 바란다는 모순 덩어리였던 것이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연애를 한다는 사실에 취해서 하루 이틀을 답장하지 않던 연락들이나,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어도 다시 걸지 않았던 나를.
내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며, 그 사람들에게 쏟을 시간도 아깝다고 말을 하는 나였는데. 이렇게 혼자가 되고 나니 내가 밀어낸 사람들이 왜 나를 찾아주지 않느냐며 속상해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절멸한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소중히 여기며 가까이 두고 싶다면 내가 애를 쓰면 될 일이고, 사실은 그 연락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일 정도로 불편하고 어색한 사이였다면 상대방의 진심을 알기 전까지 나를 찾지 않는다며 서운해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인연은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릴 때 생겨나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야만 인연이 되는 것이다.
쉬어가는 김에, 얽히고설켰던 인간 관계도 조금은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