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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자격

엄마와 나, 아빠

by Acquaintance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기어이 1을 지켜내지 못했다고 한다.

단 한 자리의 숫자도 지켜내지 못하고 소수점 이하로 떨어져 버린 상황을 지켜보는 나는 여전히, 그다지도, 다를 바 없는 일상 속에서 막연하게 결혼이란 무엇일까? 하고 씁쓸한 생각만 붙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결혼에 대해서 '전혀 남의 일'이라는 말과 함께 무시해 버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 때에는 낭만을 꿈꿨더랬다. 사랑하는 사람이 든든하게 옆을 지켜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안에 쏙 들어오는 오동통한 내 아이의 손을 잡고 햇살 아래를 거니는.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낭만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 채로 말이다. 오동통하진 않지만 제법 말랑말랑한 털북숭이 고양이 두 마리의 발바닥을 만지작대며, 내 말을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한다.


'엄마 바쁘니까 너네끼리 놀고 있어'


나의 사랑스러운 털북숭이 녀석들은 사람으로 치자면 이제 내 나이를 넘어선 지 오래고, 나와 같이 손을 잡고 거닐어 준다거나 함께 나들이를 가는 등의 평범한 모녀, 모자간의 사이를 해소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녀석들로 하여금 나 스스로를 엄마라고 자칭한다. 동시에 하루에 10시간은 넘게 취침을 하는 고양이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청소를 도와주는 것은 기대조차 하지 못하는 내 자식들. 마음과 통장으로 낳은 자식들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어째서 만족스러울까. 여기서 만족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살면서 많은 것들에 대해 상상해 왔다. 대체적으로 미래의 멋있는 나에 관해서. 어쩔 때는 우연히 로또에 당첨이 되어 갑자기 막대한 자본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거대한 일류 기업에 취직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최연소' 타이틀을 단 오너가 된다던지 말이다. 환상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됐냐고 물어본다면


"그 상상은 이미 20년 전쯤 했던 거예요"


라며 부끄러워할 테지. 난 나를 쏙 빼닮은 딸이나 아들을 낳는 것을 포기했으며,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줄 배우자를 두는 것도 포기했다.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포기가 맞다. 어느 10대의 마지막 시점에서 나는 현실을 깨닫는다. 하루아침에 멀쩡하게 살던 아파트를 벗어나 곰팡이를 박박 닦아야 하는 집으로 이사를 갔고, 열심히 배워오던 예체능 계열 수업은 왜 그렇게 비쌀 일인지 모르겠다. 이미 비슷한 계열을 전공으로 삼았던 형제는 진지하게 '이 길이 돈이 될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하고서는 아마 그다음 해에 전과를 했더랬다.


우리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아직까지 둥지 속에 있는 제비 새끼 마냥 입만 쩍- 벌린 채로 내가 제일 배고프고 불행하다고 울부짖었다. 적어도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날아갈 수순을 밟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10년이 넘도록 엄마와 아빠를 원망했다. 특이하게 우리 가정은 엄마가 가장 역할을 해오셨는데, 엄마의 경제력에 의지하며 취미 생활을 즐기는 아빠를 무능하다 생각했고 무리하게 사업을 시도하다 전 재산이 사라졌던 때에는 엄마가 뭐라도 될 줄 알았냐며 무너진 사람 발목에 족쇄까지 채웠다.


10년이 지났다. 아빠는 여전하고, 엄마는 여러 것들을 한다. 돈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다 해보려고 했다. 자식들은 이제 30이 넘었는데, 엄마는 평일에는 돈 좀 벌 수 있다는 것은 오만 가지를 다 쫓아다니고 주말에는 식당에서 알바를 한다.


"너도 엄마가 돈 된다면 다 믿어 넘기는 바보 천치 같니?"


엄마는 공인 중개사도 하고, 아파트 분양 업체에서 전단지도 돌리고, 방문 판매도 한다. 난 엄마가 방문 판매를 하는 게 너무 싫고 부끄러워서 어디에 말도 못 하고 몇 년을 엄마를 만류했었다. 생각해 보면 뭐 엄마가 빚을 냈나 사채를 끌어다 썼나, 자식이나 남편 손 한 번을 안 벌리고 묵묵히 해오셨던 것들을 내가 뭐라고 비난할 자격이 있었나.


"너도 내가 이해가 안 되니?"


그러고서는 엄마는 이 악 물고 말을 이어나가셨다. 뭐라도 해서 나 혼자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이렇게 악착같이는 안 한다고. 돈 된다는 자리 안 찾아다니고 돈 된다는 사람 쫓아다니며 떨어지는 뭐라도 주워 먹으려고는 안 했을 것이라고. 사장 소리 듣다 하루아침에 바닥에서 쓰레기나 주워야 하는 당신 자존심이 다 무너져도 너희들이 내 자존심이니 그거면 됐다고.


"내가 너네 대학 갈 때쯤에서야 다 말아먹어서, 그게 평생 후회될 거다. 큰 애 학자금 대출 갚느라 밤 11시에 퇴근하고 주말에도 일하고, 너도 내가 뭐 하나 해줬니? 막내는 이제 졸업해야 하는데 마음 같아서는 해외여행이라도 보내고 천천히 하고 싶은 일 찾으라고 하고 싶었다"


난 조금 더 휴대폰을 꽉 붙잡았다.


"달에 100만 원이라도 너네 주면, 너네가 얼마나 편하게 살겠어. 너네는 학창 시절 부유하게 보낸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가난은 대물림 된다. 과거에 잘 살았던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야. 지금 끊어내야 해, 내 손으로"


난 '엄마, 우린 이제 가난하지 않아'라고 말하지 못했다. 회사가 멀다고 엄마가 걱정하셔서 그냥 근처로 전세를 구했다는 직장 동료의 말을 들으며 아무 생각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척 부러움을 목구멍 뒤로 삼켜냈으니까. 월급은 그냥 부모님께 관리해 달라고 맡기고 본인은 아버지 카드를 쓴다는 다른 동료의 말은 밤새 곱씹을 만한 얘기였으니까.


"난 너희한테 달에 100만 원이라도 꼬박꼬박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반드시 내 손으로 이 가난을 너희한테 대물림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야"


그 말이 얼마나 싸늘했는가. 엄마, 우린 이제 다 컸어.라고 말을 했어야 했다. 30이 넘은 자식들한테 아직도 용돈을 못 주는 게 한이라는 것이 우습지 않냐고, 그렇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더 큰 결심이 있는 것만 같아서.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엄마란, 엄마의 자격이란 무엇인가.


한참 반항하는 시기에 엄마한테 왜 멋대로 나를 낳았냐고 화를 낸 적이 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보면 뺨이라도 몇 대 내려쳐야지. 내가 정의해 버린 '멋대로 나를 낳음'의 대가는 참혹했다. 알아서 나가서 살며 돈벌이를 하고 제 입에 들어갈 것도 덜덜 떨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자식에게 용돈을 주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는 말이.


마음으로 낳았다고 자식 취급하던 고양이 녀석들을 바라보던 나의 시각은 이랬다. 더 좋은 집에 사는 사람이 너희를 구했으면 더 비싼 사료 먹고 행복하게 살았겠지. 그런 말을 하는 나에게 친구들은 사람 사는 집 방 하나 통째로 고양이한테 주고 캣 타워를 4개씩 설치해 놓고서도 부족한 것 같냐고. 아-,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도 마음이 가면 내 모든 것이 부족하고 아쉬울 법 한데, 내 몸을 갈아서 낳아 놓은 자식이라면 어땠을까. 내 온몸이 부서져도 내 눈 감는 날까지 네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물려줘야만 마음이 편하겠지.


그래서 나는 결혼을 포기했다. 엄마가 되기를 포기했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엄마처럼 강해질 수 없었다. 어릴 적 꿈은 엄마 같은 사람이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독하지 않아 글러먹었다. 나는 이보다 더 큰 것들을 책임지고 지켜낼 자신도, 감당할 자신도 없었기에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엄마를 너무 사랑하고, 엄마처럼 되지는 못할 것 같아.


이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느니 하는 속 없는 자식의 불만 같은 말이 아니라. 마음속 아주 깊은 구석부터 힘겹게 끌어올려서 꺼내놓는 경외심이었다. 당신 같이 살 자신이 없다고. 아득바득 내가 만들어 놓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며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생명에게 내 뼈 마디 하나까지 갈아 넣어줄 자신이 없다고. 물어보고 싶었다. 다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지 않았냐고.


끝내 당신께 '엄마, 혼자 살고 싶지는 않았어?'라고 묻지 않았던 건,

당신의 두려움을 모른 채로 그저 계속 치마폭에 쌓여 어리광이나 피우는 딸로 살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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