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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 속에서

나를 조금 더 사랑해줘야 해

by Acquaintance

얼마나 많은 혼란이 일어나야만 우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까.


나는 가끔 내가 미웠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의 모습 말이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나는, 대체적으로 독하지 못하고 미련을 쉽게 버리는 편이었다. 이만하면 됐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세상을 돌아보면 멋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쩜 나란 사람은 이렇게 모자랄까.

나는 가끔, 아니 자주, 번번이 내가 미웠다.



바야흐로 혐오의 시대가 아닌가.

우리는 고개를 돌려서 옆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 전처럼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같은 건물에 거주하는 누군가에게 친근함의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세 자리와 네 자리의 숫자로 구성된 친구의 집에 전화를 걸어


'안녕하세요, 저 00이 친구 00인데요, 00이 집에 있나요?'


와 같은 인사말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면 외우지 않아도 번호를 알려주는 휴대폰이 있으니 말이다. 엄마가 늦는 날 앞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잠시 쉬었다가 가는 일도 비일상으로 분류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미움의 대상을 찾았다.


너는 남자고, 너는 여자여서 네가 미워. 너는 이런 사람을 존경하고 너는 또 다른 사람을 존경하니 네가 미워.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이 시기가 얼마나 개탄스러울까. 우리들은 미처 알지 못한다. 지금 네가 미워하는 사람과 계속해서 한 시대의 흐름을 살아갈 것이라는 점을. 우리들은 죽는 날 까지도 타인을 향한 삿대질을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 손가락 하나의 끝이 너를 향할 때,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이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영영 눈치채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영위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지능 수준은 여전하나, 이제는 당당해진 것뿐이란다.

그러니 과거에도 10명 중 절반은 멍청했고, 단지 그들은 멍청함을 어딘가에서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공감은 커녕 오히려 서글퍼졌을 뿐이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진정으로 멍청한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다 그저 힘들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타인과의 다름을 어째서 멍청함으로만 치부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상대방의 지능 수준을 폄하하면서까지 핏대를 세워가며 싸워야 할 일인지.


인터넷이 발달했다. 온라인에서 만연한 혐오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타인을 향한 미움의 표시가 어느 순간 나에게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듣기도 하고 내뱉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거리를 거닐며 그런 이야기들을 듣거나 내뱉은 적이 있던가. 얼마나 무서운 세상일까. 내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른다는 것이 무기가 된다는 것이.


세대 갈등은 기원전에도 존재했다. BC 1700년 수메르 점토판에 적힌 말 그대로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 지금의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년 층이나, 노년 층의 사고방식을 구닥다리와 같이 치부하는 젊은 층이나, 몇 천년에 이어지는 세대 갈등이 왜 지금은 그저 혐오의 수단이 되었을까.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몰상식하게 자신의 몇 곱절을 살아간 이를 구타하는 10대 청소년의 이야기와, 우울함에 잠식되어 끝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몇몇의 이야기들을 안다. 잘 못함과 잘 못하지 않음의 구분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원인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현상들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올해 초에는 봉선사를 방문했다.

큰 초를 하나 사서 촛불 공양을 했더랬다. 다른 말은 적지 않았다.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달라고 적었다. 나는 혐오가 무섭다. 나의 분노나 화, 슬픔과 짜증, 우울함과 무력감을 타인의 탓으로 미루는 내가 무섭다. 그리고 그런 나를 다시 미워하게 되는 반복이 무서웠다.


인간은 죽어도 육도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고 한다. 내세에 사는 우리는 그동안 저지른 업에 따라서 계속해서 업을 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이렇게나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우리는 내내 세에서 어떤 업을 지고 살아가려고 참지 못할까. 나보다 몇 배를 더 가진 이에 대한 시기 질투를 참지 못해 눈을 꼭 감고 반복해서 생각하다 보면 그 안에서 조금도 자라지 못한 내가 보였다. 미움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나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밤 잠을 설친다. 쟤만큼 잘나지 못한 내가, 쟤만큼 벌지 못한 내가, 쟤처럼 잘 살지 못한 내가, 쟤처럼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해 결혼을 포기했다는 내가 미웠다. 그래서 그 애를 미워했다. 그 애는 나와 성별이 달라, 키도 작아, 통통해, 그 애는 분명히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잘 사는 것일 거야. 아마 양심도 없겠지. 독한 것.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내가 미웠다. 나는 왜 그 애처럼 할 수가 없었을까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에서는 빅 사이즈 모델을 내세워 모두가 아름답다고 한다. 어디서는 다양한 인종을 통해 세상의 선함을 바라보라고 한다. 왜 정통을 무시하냐며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보이콧을 선언하더라.


다름이라는 것이 참 어려웠다.



다름을 한 번만 참아도, 같음이 보였다.

때로는 같음이 그 애를 미워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끝내는 결국 너도 나도 사람이구나 싶었다. 인두겁을 쓰고 파렴치한 짓을 하는 놈들도 많은 세상에서 이성이라는 수단을 가진 우리라면 적어도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조금 더 사랑해 줄 줄 알아야 한다.


나에게서 오는 시기와 질투를 사랑하고,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잘하는 것을 잘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무지성의 혐오를 그만두기로 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래야 후대에 적어도 나는 내 뒤를 이을 세대에게 '사람을 사랑하라'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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