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이 달라서 보험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 되었다

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4

by 보험외길

​“보험은 들어놨으니까 괜찮겠지.”

​30년간 보험업에 종사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믿음이 가장 잔인하게 무너지는 순간을 나는 수없이 목격해 왔다. 보험은 영업숫자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사람의 삶으로 돌아온다.


​오래전, '민훈기'라는 40대 남자 설계사가 우리 지점에 위촉되었다. 그는 'A라이프'라는 다단계 회사 출신이었는데, 아마 보험 영업보다는 본인이 하던 다단계 사업의 활로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온 듯했다. 사무실에서 동료 설계사들에게 건강보조식품을 홍보하다 지점장과 크게 다퉜다는 소문이 돌더니, 결국 몇 달 못 가 실적 부진으로 해촉 되었다. ​문제는 그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계약들이었다.


​박철중 씨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민 설계사가 다단계로 포섭했던 고객 중 한 명이었는데, 설계사가 일을 그만둔 후에도 박 씨는 묵묵히 보험 계약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꼭 필요한 상해질병보험입니다.”

민 설계사가 던진 그 한마디가 박 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홀로 계신 고령의 아버지를 향한 장남의 애틋한 마음이 계약서 위로 옮겨진 것이다.


​박 씨는 흔쾌히 계약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피보험자가 되었다. 박 씨는 서명을 마친 뒤 초회 보험료를 현금으로 건넸다 -당시에는 보험설계사가 은행마감전 보험료를 직접 입금했다-. 이후의 보험료는 자동이체로 납입하는 것으로 해서 계약은 정상적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보였다.




사건의 발단은 그다음이었다. 민 설계사가 사무실에 들어와서 총무에게 계약서류를 내밀자, 총무는 피보험자인 아버지의 서명이 빠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민 설계사는 총무가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본인 손으로 직접 아버지의 이름을 써넣은 것이다. 이른바 '대필 서명'이었다.


​보험에서 '계약자'는 보험사와 약속을 맺는 사람이고, '피보험자'는 그 보험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이 둘이 일치하기에 사람들은 그 차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사망을 담보로 하는 보험에서 두 사람이 달라질 때, 법은 아주 엄격하고 날카로운 선을 긋는다.


​상법 제731조 타인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보험계약에는 보험계약체결 시에 그 타인의 서면에 의한 동의(전자서명의 의한 동의 포함)를 얻어야 한다.


법률에 서면 동의 조항을 넣은 이유는 명확하다. 피보험자 본인도 모르는 사이 보험 범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러나 이 중요한 규칙은 박 씨에게 안내되지 않았다. 민 설계사는 자필 서명의 중요성을 설명하지 않았고, 박 씨 또한 상법의 조문을 알 턱이 없었다. 매달 보험료는 자동이체로 빠져나갔고, 계약은 아무 문제 없이 5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느 여름날,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졌다. 박 씨의 아버지는 불어난 하천을 건너려다 그만 거센 물살에 휩쓸리고 말았다. 상해사망 사고였다. 아버지의 슬픈 소식을 접한 박 씨는 장례를 마친 뒤, 담담하게 보험금을 청구했다. 가입금액 2억 원의 상해사망 보험금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피보험자의 자필 서명이 다르므로 해당 계약은 ‘무효’입니다.”


​무효. 그것은 죽은 계약을 의미한다. 보험료를 몇 년 동안 성실히 납부했어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즉, 사고가 발생했어도 보험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건 보험사의 횡포가 아니라 법이 정한 원칙이다.


설령 나중에 피보험자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한 번 무효가 된 계약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민법 제139조 무효인 법률행위는 추인하여도 그 효력이 생기지 아니한다.




​박 씨는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했다. 영업이든 보상이든 현장의 직원들에게 금융감독원 민원은 가장 피하고 싶은 부담 중 하나이다. 민원처리가 얼마나 스트레스받느냐면, 보상에서는 보상업무 잘하는 것보다 금감원 민원 안 받는 게 더 평가가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 역시 5년 전의 불완전 판매 계약이 우리 지점에서 유지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며칠 밤낮을 소명 절차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박 씨가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보험 계약 자체는 '무효'라 보상 책임은 없었지만, 보험사의 '설명의무 위반'에 대한 책임은 남았기 때문이다.

​“피보험자의 서면에 의한 자필 서명이 없으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핵심 내용을 설명하지 않았다면, 보험사는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


​분쟁조정의 결론은 보험사의 과실 70%, 계약자의 과실 30%로 결정되었고 박 씨는 이를 수용했다. 결국, 박 씨는 사망보험금 2억 원 대신, 손해배상금으로 1억 4천만 원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영업 현장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반복된다. 가족을 위한다는 '선의'로, 혹은 바쁜 일상 속 '편의'를 위해 서명을 대신하는 경우 말이다. 설계사가 대필하기도 하고, 계약자가 피보험자의 서명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험약관과 법 앞에서 선의는 무력하다.


손해사정사는 보험금 지급 시 약관과 법률에 근거해 기계적으로 검토할 뿐, 계약 당시의 안타까운 사정까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특히 사망 사고의 경우, 피보험자의 자필 서명 여부는 보험금 지급을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확인 사항이다. 이를 추적하여 면책으로 만드는 것을 보험금 절감이라는 큰 공로로 인정받기도 한다.


​이 사건을 겪으며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타인의 생명보험'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사고 이후, 회사는 배상 책임을 지게 한 원인 제공자를 찾아내어 강력한 구상청구를 진행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안일한 배려가 고객의 삶은 물론, 내 삶의 보루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악의가 없었다 해도, 원칙을 어긴 대가는 혹독했다.


문제가 터졌을 때 그 누구도 나를 구제해주지 않을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이른 나이에 경험하게 되었다.


제5 화 예고 : 돌+아이 보험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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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변형, 재구성하여 쓰였으므로, 등장인물은 실제 인물이 아니며 특정인을 암시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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