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불도장(火印)을 찍다

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3

by 보험외길

최 여사는 수화기 너머로 연신 흐느끼며 말을 쏟아냈다.

“설계사님, 우리 딸 어떡해요... 그 어린것이 무슨 죄라고... 보험금 바로 나오겠죠? 당장 수술하고 입원해야 한다는데, 저번에 들었던 그 보험에서 문제없이 보상되겠죠?”


​최 여사의 목소리는 떨림을 넘어 소란스러웠다. 딸의 생사가 걸린 절벽 끝에서 그녀는 이미 이성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김옥분 설계사는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기억의 서랍을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다. 보험사는 자선단체가 아니다. 면책 기간과 감액 기간, 그리고 ‘계약 전 알릴 의무’라는 돋보기를 들고 보상 유무를 치밀하게 따질 것이다. 시간을 들여 ​계약 내용을 꼼꼼히 재확인한 김옥분 설계사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사님, 확인됐어요. 따님은 가입 전 치료 이력이 없고, 가입한 지 이미 1년이 지나서 진단비와 치료비 모두 감액 없이 100% 보상 가능합니다.”

전화를 받고 나서 최 여사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은 잦아들었다.




​딸은 위 전절제 수술과 고된 항암 치료를 꿋꿋이 버텨냈다. 부축을 받아 병원 복도를 한 바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모녀는 다시 희망을 꿈꿨다. 위가 없어도 식도와 소장을 연결하고 음식만 조심하면 살아갈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희망의 싹이 고개를 내밀 무렵 또 다른 비극이 찾아왔다. 암은 위에서 자궁으로 옮겨 갔다. 난소암이었다.


겨우 아물어가던 딸의 복부를 다시 절개해야 했다. 전이를 막기 위해 난소와 난관, 자궁을 덜어내고 복막까지 잘라냈다. 위암 항암제로 이미 황폐해진 몸에 더 독한 항암제가 쏟아졌다. 머리카락은 한 줌도 남지 않고 빠져버렸고, 치아는 누렇게 변했다. 위가 없는 몸은 조금만 먹어도 복통을 일으켰다. 최 여사는 딸의 입에 미음 한 숟가락이라도 넣기 위해 매일 눈물로 죽을 쑤어 날랐다.


​딸이 몸무게를 잴 때면 최 여사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엄마, 나 살찐 것 같지 않아?”

결혼 전, 사위를 만나러 갈 때 예뻐 보이고 싶을 때 딸이 가장 많이 묻던 말이었다. 이제는 딸이 저울 위에 올라서는 것조차 두려웠다. 병마는 딸의 살과 뼈, 자궁과 내장 전체를 처절하게 뜯어가고 있었다. 암은 결국 대장까지 번졌다. 암세포가 통로를 막아 가스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장폐색이 찾아왔고, 딸은 뒤틀리는 통증 속에서 비명조차 삼켜야 했다.


​최초 진단 후 5년. 딸은 세 번의 암과 싸우다 결국 하늘나라로 떠났다. 자신을 꼭 닮은 어린 딸 하나를 남겨둔 채, 짧고 험난했던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장례를 마치고 구청에 들러 사망신고를 하고 돌아오는 길. 최 여사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길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그간 꾹꾹 눌러 담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슬픔을 들키면 딸이 더 힘들어할까 봐 스스로 오즈의 마법사 속 감정 없는 '양철인간'이 되었던 세월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딸... 사망신고서라는 종이 한 장이 이 긴 비극의 마지막임을 실감하게 한 모양이었다.


​죽은 아이는 산 아이의 마음속에

가장 깊고 아픈 곳에

지워지지 않는 불도장을 찍고 갑니다

세상에 어떤 눈물로도 씻기지 않는

선명한 붉은 인을 가슴에 찍고 갑니다

- 도종환 시인, 화인(火印)중에서 -


그림 : 케테 콜비츠 (Käthe Kollwitz)의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Woman with Dead Child)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딸의 투병으로 연금까지 바닥난 현실과 남겨진 외손녀가 있었다. 최 여사는 다시 김옥분 설계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망보험금을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어르신, 문제가 좀 있어요. 사망보험금이 법정상속인인 손녀에게 지급되는데, 미성년자라 이혼한 전남편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혼, 그리고 사위... 그 말이 귓가에 윙윙거리는 벌떼처럼 들렸다. 딸이 아플 때도, 세상을 떠날 때도 연락 한 번 없던 남남이었다. 계약 당시 딸의 이혼 사실을 알리기 싫어 수익자를 ‘법정상속인’으로 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설계사에게 상황을 알리고 수익자를 최 여사 본인으로 지정했어야 했다.


자식이라고는 오로지 딸 하나. 가끔은 아들 있는 친구가 부러울 때도 있었다. 딸이 사위를 데리고 왔을 때 '나도 아들 하나 생겼네' 하고 속으로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상처를 남기고 이제 남이 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사위 또래의 젊은 남자를 보면 그저 막연한 적개심까지 들기도 했다. 사위의 연락처를 알아보는 와중에 '견물생심'이라는 단어가 계속 떠 올랐다.


​수소문 끝에 동네 커피점에서 사위를 만났다. 최 여사는 이제 힘없는 노인이었고, 과거의 상처를 마주할 용기조차 없었다. 혹여나 그가 어깃장을 놓을까 두려워 김옥분 설계사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불안과 분노로 머릿속이 하얗던 시간, 사위는 자기 딸의 안부조차 묻지 않고 서류에 서명한 뒤 쿨하게 자리를 떴다.


​이번에도 김옥분 설계사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베테랑 설계사는 고객이 소란스러울수록 차분함으로 응대한다. 설계사마저 부산스러워지면 고객의 불안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그녀는 고객이 거대한 불행과 불안을 온몸으로 받아낼 때, 가슴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묵묵히 그 곁을 지켰다.




​이제 최 여사의 외손녀는 치아교정기를 끼고 학교에 다닌다. 딸아이를 닮아 아랫니 하나가 모자라고 못생긴 치열까지 지 엄마를 쏙 빼닮았다. 딸이 생전에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교정을, 결국 딸의 사망보험금 일부로 손녀에게 해준 셈이다.


다시 가을이 왔다. 금오산 기슭에 단풍이 들었다. 김옥분 설계사는 계절을 잊고 오늘도 분주히 현장을 누빈다. 최 여사는 가슴에 불도장을 찍고도, 붉게 물든 금오산의 풍경에 다시금 감성이 젖는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지는 모양이다.


제4 화 예고 : 서명이 달라서 보험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었다


여러분의 응원 한마디가 보험인생 30년의 기억을 기록하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매주 화요일 연재)

"이 글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변형, 재구성하여 쓰였으므로, 등장인물은 실제 인물이 아니며 특정인을 암시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작가의 이전글수화기 너머로 흐르는 어두운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