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2
최학술 여사의 삶은 일찍이 시린 서리가 내려앉은 길이었다. 그녀는 경북 영주에서 나고 자라 스무 살 꽃 같은 나이에 안동으로 시집을 갔지만, 불과 1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그날 이후 그녀의 삶은 오로지 어린 딸 하나를 지켜내는 투쟁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딸을 키우며 보낸 세월은 어느덧 그녀를 육십 대 중반의 초로로 만들었다.
남들은 이제 할머니라 부르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을 정취에 가슴 설레는 고운 감성의 소유자였다. 가을이 되면 그녀가 자주 걷는 금오산 초입의 숲길은 붉고 노란 단풍으로 물들어 완연한 계절의 품을 내어주고 있었다. 사락거리는 낙엽 소리 사이로 다람쥐 한 마리가 갈색 꼬리를 흔들며 분주히 오갔다. 최 여사는 발치에 떨어진 매끄러운 도토리들을 주워 담았다. 다람쥐의 겨울 양식을 지키는 경비 아저씨의 눈길을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옮기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수줍은 소녀였다.
그러나 그 찬란했던 가을은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며 차가운 겨울로 바뀌었다. 딸은 자신을 꼭 닮은 어린 손녀 하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이제 금오산의 단풍도 노을도 그녀에겐 색을 잃은 풍경일 뿐이었다. 숲은 뼈대만 남은 나무들이 서 있는 시린 동토(凍土)로 변했다. 다람쥐가 오가던 길은 딱딱하게 얼어붙었고, 숲은 서릿발처럼 차갑게 식었다. 딸의 부재와 함께 세상의 모든 색채는 무채색의 회색으로 변했고, 그녀의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메마른 겨울바람만이 공허하게 맴돌았다.
최 여사는 딸을 보내던 날, 그 아이가 태어나던 날을 복기했다. 한 품에도 다 차지 않을 만큼 작았던 아기. 품 안에 넣으면 바스러질까 겁나던 보드라운 살결과 갓 구운 빵처럼 달콤했던 아기 냄새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배냇짓하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때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녹아내렸고, 작고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젖을 물던 모습은 그녀 생애 가장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눈도 채 못 뜬 채 엄마의 새끼손가락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 쥐던 그 온기. 그것은 최 여사의 심장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불도장(火印)을 남겼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 아이와 영원히 함께일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라 했던가. 딸이 자라 세상 밖으로 나갈 때, 엄마가 그 모진 풍파를 다 막아줄 수는 없었다. 딸이 마주한 세상은 어린 시절 동화 속에 그리던 풍경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딸은 서둘러 결혼을 택했다. 사위 될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같이 살고 싶다며 딸의 손을 끌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도망치듯 시작한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가지 않아 딸은 이혼을 했다. 이혼하고 돌아온 딸의 품에는 어린 외손녀가 안겨 있었다. 딸은 본인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며 당당하게 말했지만, 최 여사의 눈에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딸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지만 딸은 엄마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단단하게 성장해 있었다. 부모가 되고, 풍파를 겪으며 딸은 이미 강철 같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최 여사는 안타까움 속에서도 딸의 모습에서 듬직함을 느꼈다.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다짐했다.
당시 최 여사의 나이대에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아프기 시작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병마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자녀의 학업까지 포기하는 이웃들을 보며, 그녀는 가장 먼저 '보험'을 떠올렸다. 삶의 불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 최 여사는 보험의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평소 신뢰하던 김옥분 설계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계사님, 잘 지내고 있나요? 다름이 아니라 우리 딸아이 보험 하나 들어주려고 해서요."
김옥분 설계사는 베테랑답게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어떤 설계사와 인연을 맺느냐가 보험 상품 그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최 여사는 잘 알고 있었다. 며칠 뒤, 딸과 설계사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5년 이내에 입원이나 치료받으신 적 있으세요?"
"없어요. 얼마 전 종합검진에서도 아무 이상 없다고 나왔거든요."
김옥분 설계사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딱딱한 고지 사항들을 부드럽게 풀어나갔다. 위내시경이 얼마나 힘든지, 자신은 주사가 무서워 피검사도 힘든다는 둥 가벼운 수다를 떨며 청약서를 채워갔다. 딸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위는 정말 튼튼해요. 한 번도 안 좋았던 적이 없어서 이번 검진 때도 내시경은 안 했는걸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악마의 등불〉(The Devil's Lamp) 또는 〈마법에 걸린 사람〉(The Bewitched Man)〉
그날의 평범했던 청약서 작성이 비극의 서막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청약을 마친 지 불과 1년 남짓 지났을까. 최 여사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김옥분 설계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계사님... 우리 딸이 위암 말기라고 하네요. 지금 병원에서 검사 결과 듣고 나오는 길인데... 보험 든 지 얼마 안 됐는데 보상받는 데 문제가 없을까요? 어떡하면 좋죠, 설계사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최 여사의 절박한 목소리. 이제 막 다시 시작하려던 모녀의 삶 위에, 겨울보다 더 차가운 암(癌)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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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변형, 재구성하여 쓰였으므로, 등장인물은 실제 인물이 아니며 특정인을 암시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