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6
드디어 대망의 골인지점이 보였다. 보험료가 워낙 커서 이번 계약만 성사되면 박 설계사는 단숨에 지점의 영웅이 되고, 나 역시 리크루팅의 보람을 제대로 만끽할 참이었다. 정갈하게 우려낸 찻물 향이 요사(寮舍)채를 채우고,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청약서를 찻상 위에 올렸다. 서명을 쉽게 하라는 의미에서 그 옆에 놓아둔 반짝거리는 펜촉이 서명란을 향해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에도 내 마음은 이미 모든 번뇌를 다 지고 있었다. ‘제발, 저 펜촉이 종이에 닿기만 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인생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방향을 튼다. 찻잔을 내려놓던 주지 스님이 돌연 헛기침을 하더니 펜을 거두어 옆으로 밀어놓는 게 아닌가. 스님은 알아듣기도 힘든 불교용어를 섞어 말씀을 길게 이어 나가셨다.
“박 처사, 미안하네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물은 본래 공(空) 한 것인데, 부처님 자비가 가득한 이 절에 보험이라는 세속의 울타리를 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화마(火魔)도 결국 마음에서 오는 것이니, 이번 인연은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어.”
순간, 고요하던 방 안에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시내에서 한 시간, 그 험한 비포장도로를 몇 번이나 왕복하며 세단의 밑바닥이 다 긁히는 비명을 감내했던 박 설계사였다. 그의 인내심이라는 이름의 퓨즈에 성난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스님, 지금 장난하십니까? 제가 이거 하나 승인받으려고 본사에 빌고 빌어서 겨우 조건 따온 거 모르세요?”
“허허,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 뜻대로 되나. 다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게.”
'마음을 비우라'는 그 자비로운 권유가 박 설계사에게는 오히려 화약고에 던져진 불씨가 되었다. 찰나의 순간, 그의 이성이 번뇌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우락부락한 손바닥을 그대로 휘두르고 말았다.
찰싹!
청정한 산사의 정적을 깨는 매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주지 스님의 고개가 돌아갔고, 내 정신도 함께 아득해졌다. 스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붉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더니, 이내 가사 장삼을 휘날리며 사자후를 토해내셨다.
“이, 이 무슨 무도한 짓인가! 법당에 마귀가 들었구나! 게 누구 없느냐! 사람 살려! 강도다!”
스님의 고함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사채 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서 나물을 다듬고 청소하던 여성 신도님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이닥쳤다.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채 달려온 사람부터 대빗자루와 젖은 대걸레를 치켜든 사람들까지, 마치 성난 호법신장들이 중생 구제를 위해 강림한 듯한 풍경이었다.
“어디서 감히 우리 귀한 주지 스님을!”
“이 덩치만 큰 몹쓸 사람아! 네놈 오늘이 제삿날인 줄 알아라!”
조폭 뺨치는 외모의 박 설계사도 분노한 보살님들의 ‘물리적 교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머리끄덩이를 잡혀 휘둘리는 것은 기본이고, 대빗자루가 등짝을 스칠 때마다 ‘퍽, 퍽’ 소리가 요란했다.
“아악! 잠깐만요! 아줌마들! 아악!”
박 설계사의 비명은 산새들을 날려 보냈지만, 보살님들의 위력은 화재보험 등급상 가장 위험하다는 ‘4급 목조건물’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나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박 설계사를 빼내려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보살님들, 진정하십시오! 오해입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겨우 박 설계사를 보살님들의 발길질에서 뜯어말려 구석으로 몰아넣었을 때, 신도중 한 명은 이미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112를 누르려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다.
“스님,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 제 잘못입니다. 이 친구가 직업을 잃고 자식 다섯을 먹여 살리느라 잠시 마(魔)가 낀 모양입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를 봐서라도 경찰 고발만은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내 처절한 참회에 스님은 간신히 노기를 가라앉히셨다. 신도에게 수화기를 내려놓으라 하셨다. 스님은 마음이 복잡하신지 평소 보지 못했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 한 대에 의지해 번뇌를 달래셨다. 나는 스님이 흡연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지만, 경찰차 대신 담배 연기가 피어오른 것에 그저 안도할 뿐이었다.
우리는 그 길로 절에서 하산해야 했다. 내려가는 길, 박 설계사는 헝클어진 머리에 뺨에는 훈장 같은 손톱자국을 선명하게 단 채 씩씩거리며 운전대를 잡았다.
“지점장님, 저 스님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그동안 쓴 기름값이 얼마인데...”
“박 사장님, 제발 입 다무세요. 지금 우리 둘 다 유치장 안 가고 무사히 산에서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은 줄 아십시오.”
결국 거액의 재물보험 계약은 봄 안개처럼 사라졌다. 매출은커녕 지점장의 체면은 누더기가 되었고, 내 양복 소매는 보살님들과의 사투 끝에 너덜너덜해졌다. 영업책임자라는 자리는 리크루팅 한 번 잘못하면 이렇게 쓰고도 매운 ‘인생의 맛’을 보게 되는 극한 직업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운전하는 모습옆으로 박 설계사의 목 명찰이 보였다. “나는 아내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아내는 사랑할지 몰라도, 세상 만물을 사랑하기엔 그의 수행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나는 사무실에 도착하는 즉시 이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설계사를 당장 정리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인연이란 참으로 기묘한 법이다.
그 소동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박 설계사가 사무실로 낯선 여성 두 명을 데리고 왔다. 박 설계사가 운영하던 유흥주점에서 일했던 젊은 접대부들이었다.
“저기... 박 사장님이 여기서 보험 하면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저희도 일 해볼 수 있을까요?”
박 설계사가 뺨 한 대로 날려버린 계약 대신,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인연의 씨앗’을 물어온 것이다. 나는 떨어지는 매출과 절실한 조직 증강 사이에서 다시 한번 깊은 고뇌에 빠졌다. 조직영업의 세계에서는 어제의 적도 오늘 친구가 된다. 리크루팅만 해 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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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변형, 재구성하여 쓰였으므로, 등장인물은 실제 인물이 아니며 특정인을 암시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