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RT 퀸의 몰락

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8

by 보험외길


보험회사 영업관리자의 하루는 리크루팅으로 시작해 리크루팅으로 끝난다. 타깃은 주부, 미취업자, 타 업종 종사자를 가리지 않지만, 가장 탐나는 ‘대어’는 단연 동업사의 에이스들이다.

​그녀, '이진'보험설계사를 처음 만난 곳은 도심 외곽의 한적한 카페였다. 최고급 외제차에서 내리는 그녀는 눈이 부셨다. 우아한 자태와 세련된 매너, 누가 봐도 귀티가 흐르는 ‘서울 강남 사모님’ 그 자체였다.
"이름이 외자시네요. 어떤 한자를 쓰시나요?"
"보배 진(珍)입니다."

​그녀는 이름값대로 A 보험사의 진짜 '보배'였다. 매년 연도대상을 놓치지 않는 톱클래스이자, 보험 설계사의 최고 명예라 불리는 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 멤버였다. 3년 연속 연도대상 수준의 실적은 물론, 계약 유지율과 윤리성까지 검증된 극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 그런 그녀를 우리 회사로 데려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나는 정보 파악과 고능률 보험설계사들에 대한 코칭 소스를 얻기 위해 꾸준히 그녀와 차를 마시며 공을 들였다.

​"이 거친 보험 바닥에 어떻게 발을 들이셨어요? 고생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내 질문에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찻잔을 만졌다.
"남편이 잘 나가는 회계사라 사실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어요. 집에만 있으니 답답해서 시작한 일인데, 남편이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VIP 고객들을 소개해 줬죠. 인복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녀의 성공이 오로지 남편 덕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골프장에서 VIP들과 라운딩을 돌며 인맥을 다졌다. 가녀린 체구였지만 티샷만큼은 남자들과 같은 박스에서 날릴 만큼 당찼고, 그린 위에서는 누구보다 냉철했다. 열정과 성실, 그리고 타고난 친화력까지. 그녀는 입사 1년 만에 신인상을, 2년 만에 연도대상 금상을 거머쥐며 보험업계의 '퀸'으로 등극했다.

​인생의 폭풍은 가장 눈부신 전성기에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느 날 밤,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남편이 잠든 사이 심장마비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배우자가 베테랑 설계사였으니 남편 명의로 가입된 사망 보험금 규모는 상당했다. 하지만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그녀의 친정 같던 A 보험사는 차가운 칼날을 빼 들었다. 보험금 청구 후 면밀한 조사를 핑계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던 회사가 보내온 답변은 경악스러웠다.
​"고지의무 위반으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며, 해당 계약을 해지합니다."

​이유는 남편의 과거 혈압약 복용 이력이었다. 보험사는 이를 근거로 면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법에 따르면 고지의무 위반을 안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해지를 통보해야 헤야 면책처리를 할 수 있다.

상법 제651조 보험계약당시에 중요한 사항을 고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보험회사는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1개월 내에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A사는 이미 제척기간이라는 골든타임을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거액의 보험금을 주지 않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험금이 왜 안 나옵니까? 법적으로 해지권 행사 기간이 이미 지났잖아요!"
보상팀 사무실에 그녀가 강하게 항의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얼음장 같았다.
"경과 기간이 지났어도 이건 계약자의 '신의성실 원칙' 위반입니다. 내부 법률 자문 결과, 이 경우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명문화된 상법과 약관 위에 보험사와 제휴되어 있는 변호사의 '법률 자문'이라는 이름의 오만함을 세운 것이다. 그녀는 담당 지점장과 본부장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그러나 그들 역시 보험회사에서 보수를 받는 임직원에 불과했다.
"내가 이 회사에 갖다 바친 실적이 얼마인데, 그동안 나를 가족이라 부르지 않았느냐"
그녀는 그간의 회사의 공로자 찬스를 기대했다. 하지만 한때 그녀를 '우리 보배, 진(珍), 진(珍)'이라며 치켜세우던 이들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도 결국 월급쟁이였고, 거대 조직의 결정에 반기를 들 용기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편을 심하게 들었다가는 언제 조직의 쓴 맛을 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해 싸워줄 이는 회사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남편 동료인 변호사가 소송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소송은 길어졌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삶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영업 실적은 곤두박질쳤고, 연도대상 후보에서 제외됐으며 MDRT 자격도 박탈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인맥으로 유지되던 고액 계약들이 하나둘 해지되면서, 그간 받은 수당을 토해내라는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환수 폭탄'이 매달 그녀의 숨통을 조여 왔다.

게다가 ​아이들은 하필 돈이 가장 많이 드는 대학 진학 시즌이었다. 남편의 보험금은 묶였는데, 반대로 남편에게 받을 돈이 있다는 사람들은 좀비처럼 늘어났다. 결국 시내 중심지에 있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외곽의 작은 빌라로 이사해야 했고, 그녀의 상징 같던 고급 외제차도 팔아치웠다.

​그녀는 설계사 코드마저 말소하며 회사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길었던 2년의 공방 끝에 법원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과거 판례가 명확했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A 보험사는 져도 그만이었다. 소송 비용은 회삿돈이었고, 이런 식으로 소송을 걸어 단 몇 명이라도 포기하게 만들거나 헐값에 합의하면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보험금을 모두 받아낸 날, 나는 조심스럽게 우리 회사에서 다시 보험 일을 시작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보험요? 아니요, 보험이라는 상품은 죄가 없겠죠. 하지만 그 '보험회사'라는 이름의 집단은 이제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납니다."

​그녀는 그 보험금으로 빚을 정리하고 집 근처에서 작은 화장품 샵을 운영했다. 다행히 세련된 외모 덕에 손님은 꽤 있다고 한다. 한때 업계를 호령하던 MDRT 퀸의 화려한 외출은 그렇게 씁쓸한 마침표를 찍었다. 내 30년 보험 인생에서 가장 탐났던 '보배'는 그렇게 부서져 사라졌다.


​지금도 A 보험회사는 보험설계사라는 말 대신 '영업가족'이라는 달콤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사회에서 '가족 같은'이라는 말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 가족이라는 이름표 뒤에는, 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가'자가 빠지면서 언제든 내팽개칠 준비가 된 차가운 계산기가 숨어 있을 것이다.



제9 화 예고 : 어느 봄날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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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변형, 재구성하여 쓰였으므로, 등장인물은 실제 인물이 아니며 특정인을 암시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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