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이라는 창(窓)으로 본 인생풍경 9
어떤 이들에게 보험은 그저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실체 없는 지출이자 아까운 비용일지 모른다. 하지만 학원 강사 최영진 씨에게 보험은 이제 '종교' 그 자체다. 벼랑 끝 지옥에 빠졌던 그를 건져 올린 것은 거창한 종신보험이나 수십만 원짜리 특약이 아니었다. 한 달 보험료 단돈 700원. 담배 값도 안 되는 '일상생활배상책임보험(일배책)'이라 불리는 작은 이름표가 그의 무너진 세계를 지탱해주었다.
낙동강변의 봄은 보는 이의 혼을 흐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강물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벚꽃 터널은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꽃비가 되어 흩날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앗아간다. 그날은 마침 수업도 일찍 끝난 기분 좋은 날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영진 씨는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온종일 분필 가루 날리는 좁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씨름하며 소모된 에너지를 대자연의 생명력으로 채우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어이구, 최 선생님. 또 산책 나가시나 봐요?"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난 이웃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아파트 단지에서 놀던 아이들도 "와, 우리 선생님이다!" 하며 우르르 달려왔다. 학원에서 유머러스하고 명쾌한 강의로 인기가 높았던 그였기에, 아이들의 천진한 인사는 언제나 그를 신나게 했다. 학원 게시판의 무시무시한 악플이나 입시 결과에 예민해진 학부모들의 날카로운 민원에 지친 마음이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봄눈 녹듯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야, 날씨 한번 기가 막히는구나."
그날 봄의 저녁 풍경은 빈센트 반 고흐가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린 <꽃 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대로 현실에 옮겨놓은 듯했다. 낙동강변의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화사하게 피어난 하얀 꽃송이들이 생명의 경이로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저녁노을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하늘과 섞여 묘한 보랏빛 춤을 추었고, 영진 씨는 그 몽글몽글한 봄날의 따스함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페달을 밟았다. 꽃향기와 풀향기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내와 함께 그 황홀한 풍경에 취해 한참을 달렸을까. 자전거 전용도로 옆 우거진 풀숲에서 무언가 '파라락' 하고 급하게 움직이는 것이 영진 씨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보, 방금 저 풀숲에서 뭐가 움직였는데? 저게 뭐지?"
"뭐라고요? 못 봤어요. 꽃 구경하느라 정신없어서."
아내는 봄밤의 풍경에 푹 빠졌는지 한참 뒤처져 오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영진 씨가 속도를 높이며 다시 풀숲을 살피자 '들썩들썩' 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자세히 보니 어미 오리를 따라 새끼 오리들이 후다닥 대열을 맞추며 움직이고 있었다. 자전거 소리에 놀라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모양이었다. 그 귀여운 생명체의 행렬에 마음을 뺏겨 잠시 고개를 돌린 찰나, 갑자기 거대하고 검은 물체가 영진 씨의 앞을 가로막았다. 미처 핸들을 꺾거나 브레이크를 잡을 틈조차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콰직-!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영진 씨는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중력을 잃은 몸은 뒤쪽으로 거칠게 내던져졌고, 머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세상은 거대한 암전에 휩싸였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정적은 영겁처럼 길고 무거웠다.
"여보! 여보! 정신 좀 차려봐요! 아이고, 어쩌면 좋아!"
아내의 날카롭고 절박한 비명에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다. 온몸의 근육이 비틀리고 찢기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겨우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 영진 씨는 눈앞의 광경에 숨이 멎을 뻔했다.
검은 물체의 정체는 사람이었다. 검은 가죽재킷을 입은 나이 든 남자였는데, 그에게선 지독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겁에 질린 아내와 함께 그를 일으키려 몸을 붙잡는 순간, 손바닥이 식용유를 뿌려놓은 것처럼 미끄러졌다. 그것은 기름이 아니었다. 남자의 몸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었다. 남자의 머리와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스팔트 바닥을 시뻘겋게 적시고 있었다.
영진 씨와 아내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아연실색했다. 손가락이 굳어 119 번호 세 개를 누르는 것조차 몇 번을 망설여야 했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남자가 응급실로 실려 갈 때까지, 영진 씨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병원 응급실 대기실에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영진 씨에게 간호사가 다가왔다.
"환자분, 본인도 타박상이 심해요. 일단 진료실 들어가서 치료부터 받으셔야겠어요."
다행히 영진 씨는 단순 타박상에 그쳤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달려온 아내는 영진 씨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영진 씨는 추위에 몸을 떠는 아내를 보며 "뮐 좀 입고 나오지, 몸이 차네. 감기 걸리겠다"며 억지 농담으로 아내를 달랬다. 하지만 그것은 곧 닥칠 불행을 외면하려는 슬픈 사치였다. 이제 내 인생은,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걸까. 밑도 끝도 없는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무정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영진 씨는 평소처럼 학원에 출근해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지옥 같은 상상들로 가득했다. '만약 저 사람이 잘못되어 죽기라도 한다면? 징역을 살게 되면 우리 아이들 뒷바라지는 어떡하지? 아직 갚아야 할 전세 자금 대출금은 산더미인데...' 매일 밤 천장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불안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영진 씨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남자는 며칠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연고자가 없는지 보호자석은 늘 비어 있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탓에 병원 의자에서 잠시 깜빡 잠이 든 영진 씨를 간호사가 다급히 깨웠다.
"저기, 보호자분... 잠깐 나와 보세요."
"네? 무슨 일이세요? 환자분 의식이 돌아왔나요?"
"그게 아니라... 경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경칠! 간호사의 서늘한 한 단어에 영진 씨의 심장이 바닥 아래 깊은 구렁텅이로 툭 떨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복도로 나갔다. 그곳엔 검은 가죽 잠바를 입은 경찰관이 무거운 표정으로 수첩을 든 채 서 있었다. 영진 씨는 직감했다. 이제 평범했던 가장의 삶이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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