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40년 만에 동창모임에 갔다. 부모님 직업 때문에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다 마지막으로 부산에 정착했다. 전학을 다니다 보니 친구를 사귈 기회는 없었다. 사교성도 없었지만 동심이 그리워 참석을 했다. 우리 학교는 도시계획으로 이전을 해야 하는 철거민들이 모인 곳에 설립됐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시절 마지막 1년 반을 다녔고 그 친구들과 40년 만에 모임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 이미지를 어렴풋 가지고 있었지만 삶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굵게 패인 이마에 구리 빛으로 살갗이 두꺼워 보이는 친구를 처음 봤을 때 ‘우리 나이 일까?’ 생각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어린 시절 개구쟁이 그의 모습이 보였다.
색깔이 있는 안경을 낀 친구의 굵직한 목소리에는 쉬는 시간 떠들던 그녀의 목소리가 섞여있었다.
식당 안 조명등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왁작지껄한 대화가 오고 갔다.
혹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오늘 오다가 학교를 둘러봤네. 우리가 세수 대야에 흙과 돌을 날랐던 운동장이 평평하더라. 그때는 참 넓어 보였는데.. 오늘 보니 손바닥만 하더라.”
한 친구가 잘 가꾸어진 운동장을 둘러본 이야기를 꺼내니 그 시절 고사리 손으로 흙을 나르던 일이 생각이 나서 모두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난, 육성회비를 못 내서 수업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내진 적이 있었다. 전 날 돈 때문에 부모님이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차마 집으로 갈 수 없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었지.”
한잔을 기울이며 이마에 굵은 주름과 두꺼워진 살갗의 친구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는 모두 어렵고 힘들었다. 그렇게는 안 살고 싶다 했는데 가난이 뭔지.. ”
다른 친구가 말을 이어받았다.
“운동장을 고른다고 왔다 갔다 하는데 광주리를 이고 엄마가 지나가는 거야. 옆에 친구가 너희 엄마 아니냐고 하는데...”그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었다. 주변은 조용해졌다.
“그때 엄마~라고 부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던 것이 두고두고 죄송하더라.”
학교 주변은 부산 도시개발로 철거민들을 이주시킨 곳이다. 경제사정은 넉넉하지 못하고 부모가 하루하루 행상을 하거나 날품팔이를 하여 사는 가족도 있었다. 조그마한 상점을 하지만 생활이 윤택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월급을 받고 지내는 가족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한다. 왜냐하면 월급을 떼이지 않고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으니까.
아이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였다. 나는 내 책상과 한 몸이 되어 앉아있다 집에 돌아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주변의 친구들이 노는 모습은 다 살펴보고 있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친구, 싸우는 친구, 서로 웃고 떠드는 친구, 고무줄을 끊겨 남학생을 잡으러 가고 도망가는 친구들이 늘 주변에서 맴돌았다.
전학을 자주 다녀 친구 사귀는 것이 서툴렀다. 사투리가 심한 경상도의 억양에 스스로 위축되어 있었다.
작은 키에 다부지게 보이는 친구가 살짝 웃음을 띄우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너 혹시 나 모르겠나?”
“어린 시절 얼굴이 보여. 잘 지냈니?” 나도 화답을 했다.
“맞네. 우리는 교복에 하얀색 옷깃을 달고 다니지 않았는데 늘 하얀 옷깃을 하고 얌전했던 아이...”
매일 빨아야 하는 하얀 옷깃을 엄마가 빨아 줄 수 없어 옷깃을 떼고 다녔다한다. 늘 흰 카라 교복을 입은 나의 모습은 눈에 띄었다고 했다.
나를 기억해 준다. 반갑다. 내가 그랬구나.
나는 생활에 커다란 굴곡도 없었고 늘 밍밍한 삶을 살았다.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라면 특별히 뛰어났던 것도 없고 놀랄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를 기억하는 친구가 있어서 기뻤다.
동창회에 모인 친구들은 모두 활발하고 동네가 같은 친구들끼리 모이기도 하였고 중학교 고등학교가 같았던 친구들은 친분이 있어 보였다.
서먹하지만 추억을 되새김하는 자리였던 모임이 끝났다.
나는 부산 토박이도 아니고 아이들이 살았던 곳과 조금 떨어진 마을이라 서로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시대에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것은 내게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에 녹아 있는 애환을 이야기할 때마다 조금씩 응어리를 털어 버렸다.
산다는 것은 순리적인 것이라 생각해 열심히 살았고 척박한 삶에 희망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이라면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밝고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을 그렸던 나의 어리석음을 엿보았다.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는데 공감하지 못했지만 늘 전학을 다녀야 했던 나의 삶도 어쩜 녹록하진 않았다.
학창 시절이 늘 주변인처럼 서성였던 모습이 그려졌다. 먼저 말하기가 두려워 가슴이 콩닥거렸던 적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너무 멀어서 집에 오면 투덜거리고 했던 일이 있었다. 학군을 나누다 보니 우리 집과 멀지만 그곳으로 배정을 받아야 했다고만 했다. 엄마가 오빠 옷을 리폼하여 주셨을 때 안 입겠다고 투정했던 일도 생각났다.
분홍색도 흰색도 아닌 검은색 바지를 잘라 내 옷으로 만들어 입으라고 할 때 엄마가 계모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가끔 오빠와 차별을 받을 때는 더욱 그랬고 내가 먼저가 아니라서 삐지는 일도 숱했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모임에서 꺼내지는 못했다.
그 무게는 달랐지만 채워지지 않은 행복의 저울은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그 시절의 부족했던 삶을 채우려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담장에 붉은 능소화가 늘어져 있다.
힘들고 지친 삶이라도 툭툭 떨어진 꽃잎이 지금의 힘듦을 던지듯 흩어져 있지만 하늘로 솟으며 늘어지는 모습이 세월을 안고 간 중년의 모습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