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장미 _ 스카겐 화파의 대표화가
19세기를 대표하는 인상주의 화풍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나라와 미국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와 그곳 사람들의 풍경을 즐겨 그리던 스칸디나비아 화가들에게 인상파의 전위적 시도는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감각적인 인상이 있는 여러 지역에서 보였고, 대표적으로는 덴마크의 스카겐을 꼽을 수 있다.
스카겐은 북극해와 발트해가 만나는 바다의 경계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밀도의 차이가 있는 두 바다가 서로 섞이지 않고 하얀 파도를 두고 각기 다른 색상으로 출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다의 독특한 풍경덕에 스카겐은 옛 사람들로부터 ‘세계의 끝’ 으로 불리웠고, 인상적인 경관의 변화를 갈구하는 많은 화가가 자연스레 모이는 동기로 작동하였다.
그렇게 스카겐 화파(Skagen Painters, Skagensmalerne)가 결성되었다.
페더 세베린 크뢰이어(Peder Severin Kroyer, 이하 P.S. 크뢰이어) 는 스카겐 화파 중에 가장 대중적이며 대표적인 화가이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덴마크에서 자란 그는 어린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코펜하겐 왕립 예술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 관찰에 기반한 그림을 그렸지만, 1877년부터 유럽을 여행하며, 특히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덴마크로 돌아온후에 인상적인 경관의 스카겐을 자주 방문하며 그림을 그렸고, 스카겐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1889년 P.S. 크뢰이어는 화가인 마리 트리에펙(Marie Triepcke)과 결혼한다. 마리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으로 어렸을때부터 미술 공부를 하였으나 여성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다. 이 후, 프랑스에 머무르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지만 평단의 주목을 받지눈 크게 못하였다. 사실 마리는 다른점으로 유명하였는데, 당시 덴마크 최고의 미인이라 불릴정도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래 여러 화가의 모델로 활동한 그녀는 당시 파리에서 인상파 화풍을 익히고 있던 P.S. 크뢰이어의 마음을 빼앗았다. P.S. 크뢰이어의 끈질긴 구애 끝에 14살의 나이차이에도 둘은 결혼하게 되고, 부부는 덴마크 스카겐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예술 여정을 시작한다.
이제, 마리는 P.S. 크뢰이어의 뮤즈가 된다.
‘장미, 장미 정원에 앉아 있는 마리 크뢰이어‘ (Roses, Marie Kroyer Seated in the deckchair in the garden Mrs Bendsen’s house)‘ 는 하얀 장미와 그에 비견되는 아름다움의 마리를 그린 그림이다.
햇볕이 잘드는 정원 마당에 탐스러운 꽃송이를 자랑하는 장미 덤불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미 뒷 편, 아름드리 나무가 만드는 그늘 아래에는 화가의 아내 마리가 정원용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그 발 밑에는 부부가 키우던 강아지(Rap)가 졸고 있다.
그림을 점유하는 커다란 장미는 분명 주인공인양 서 있지만, 한편으로는 하얀 꽃송이에 산란되는 빛이 시선을 어지럽게 하는듯,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안쪽의 마리에게로 시선을 안내하는 문지기 역할을 하는듯하다하.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작은 햇볕들을 받아내는 마리는 그림의 진짜 주인공인으로서 고풍스러운 어름다움을 흘린다. 그녀의 머리결과 무릎을 비추는 작은 빛은 어두운 그늘 아래의 여인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게 하는 묘한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건물 전체를 감추면서 집안의 일상과 마리를 분리시키는 덩굴, 미처 다듬지 못하여 다소 거칠게 자라나있는 잔디와 잡초들 그리고 떨어지기 시작한 꽃잎이 부드럽게 지면을 덮는 모습으로부터,
그림 앞에 서 있는 나는 ‘나’만의 뮤즈가 앉아 있는 어딘가의 정원을 떠올리게 된다.
마리는 P.S.크뢰이어의 뮤즈로 여러 그림에 계속하여 등장한다. 녹음 가득한 숲 사이로 쏟아지는 황홀한 빛을 담아낸 ‘정원의 마리 (1895)’, 화가가 좋아하는 ‘Blue Hour’ 의 풍경을 그린 ’여름날 저녁의 스카겐 해변(1892)’ 등이 대표적이다.
‘정원’에서 바닥을 쓰는 듯 길게 늘어뜨려진 하얀색 원피스를 즐겨입은 마리는 그라스의 색감과 같은 회녹색 배경의 신비로운 북유럽 선녀로, ‘해변’에서 해질녘 노란 석양을 받아내며 빛나는 요정으로 그림에 등장한다. 인상주의 화풍을 좇으면서도 비교적 인물을 자주 그려왔던 P.S.크뢰이어에게 ‘빛에 의해 변하는 찰나의 경관’은 아마도 사람과 그 움직임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하얀’ 원핀스를 입고 은은한 ‘빛’을 발하며 앉아 있는 마리는 커다랗게 탐스러운 ’하얀‘ 장미보다 더 빛나는 뮤즈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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