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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1 _ 빈센트 반 고흐

수선화 _ 자연의 위로와 구원을 갈망한 화가

by Phillip Choi

빈센트 반 고흐는 생 폴 정신병원에서 지내던 1889년 아이리스를 그렸다.

강렬한 빛을 찾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거처를 옮긴 반 고흐는 2층 주택을 빌리고 많은 예술가들이 찾는 생동감있는 장소, ‘노란집’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평소 존경하는 마음으로 친분을 나누던 화가 폴 고갱을 여러번 강권하여 함께 지내게 된다. 자신이 주도하는 예술가들의 교류에 큰 희망을 품고 있던 빈센트는 그러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서로의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이 표출되며 폴 고갱과 잦은 다툼을 갖게 된다.

< 노란집.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


하루는 서로간의 심한 다툼 이후, 나약해진 정신을 견디지 못한 빈센트가 스스로의 귀를 자르는 사건을 일으켰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아를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아를 이웃들의 냉대와 아를 병원의 치료에 마음이 상한 반 고흐는 보다 근원적인 쉼과 안위를 위하여 프랑스 남부 시골인 셍 레미 지방의 정신병원을 찾아 들어갔다. 그는 어느때보다 혹독한 겨울을 지내게 되었지만, 이듬해 봄이 되어 자연의 생명력이 발하는 때가 되자, 자연스럽게 병원 정원의 풍경부터 화폭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아이리스(붓꽃)는 다시 시작한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 셍 폴 정신병원의 정원. 1889. 빈센트 반 고흐. >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꽃들이 나처럼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모습의 화초들을 그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보랏빛 아이리스과 라일락 덤불 등이다. 내가 있는 곳의 정원에 있는 것들이지” _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빈센트는 자연의 소재를 즐겨 그리곤 했다. 그는 긴 겨울의 차가움을 깨고 움트는 봄 꽃을 그렸고, 태양의 에너지를 담은 해바라기를 그렸고, 숨겨진 고통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듯 고고한 아이리스를 그렸다. 특히, 아이리스는 생 레미로 오기전 아를에 거하던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새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 아이리스가 있는 아를 풍경. 1888년(왼쪽). 아이리스. 1890(오른쪽). 빈센트 반 고흐. >


그림 ‘아이리스’는 아이리스를 그린 다른 작품에서보다 대상의 모양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몸을 꼬으며 하늘을 향하는 줄기 형태, 나비 날개를 닮은 듯한 꽃의 실루엣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가 아를에서부터 감탄하며 찾았던 파랑, 파랑으로 부르기에 가까운 짙은 색감을 찾아냈다. 정원에 심겨진 모습을 그대로 그린 이 작품이, 전통적인 정물화 방식을 차용하여 그린 실내에서의 그림보다는 좀 더 강렬하고 생명력 있는 반응을 이끌어내는듯 하다.

< 아이리스. 빈센트 반 고흐. 1889. >


그림 속, 보라색과 흰색이 대비를 이루면서 핀 아이리스 꽃 뒤로는 금잔화가 잔잔히 피어 있다. 구도는 자연의 풍요로움으로 넘친다. 따듯한 느낌의 땅의 색상은 붓꽃의 뿌리를 잘 감싸고 있는듯하며 홀로 피어있는 하얀색의 아이리스는 보라색의 다른 무리중에 단연 돋보인다. 자연스러운 곡선을 모티프로 땅에서 막 일렁이는 아지랭이 마냥 솟아있는 줄기 위로 흐드러지는 꽃받침은 사뭇 현실적이며 그 탐스러움이 우와하기까지 하다. 셍 레미 병원에서의 첫 외출로 그린 작품이니 만큼 더욱 혼란한 병의 흔적을 감추며 정원의 생명력을 강조하고자 하지 않았을가 싶기도 하다.


사실 반 고흐는 이 작품을 일종의 연습으로 그렸지만(이 작품의 스케치로 알려진 그림이 없다.),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동생 테오는 Societe des Artistes Independants 전시에 출품하였고 ‘사람들의 주목을 이끄는 생동감있는 작품’ 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중에 하나이다.


아이리스를 비롯한 반 고흐의 후기작에는 일본의 목판화 ‘우키요에’가 영향이 두드러지는것으로 이해된다. 예컨데, 화가의 그림에 사용된 형태의 실루엣을 라인으로 표현하거나, 강조하고자 하는 주인공을 수평으로 내세우는 일상적이지 않은 구도 그리고 주제가 되는 대상을 근접을 확대하여 표현하는 기법등이 우키요에의 화풍과 비슷한 대표적 사례이다.

< 우키요에. 호리키리 마을의 아이리스 정원(왼쪽). 카메이도 텐진의 등나무 꽃(오른쪽). 우타가와 히로시게. 1856년. >


‘우키요에’는 17~19세기 일본에서 유행한 목판화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세상’ 을 담아낸 그림으로 읽히며 ‘덧없는 세상-우키요’ 과 ‘그림-에’ 의 합성어인 우키요에로 불리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일본의 나가사키와 네덜란드와의 역동적인 무역관계를 통해, 일본 도자기를 감싸고 있는 포장지 등으로 유럽에 처음 들어오게 된 우키요에 그림은 1856년 파리박람회에 정식으로 소개될 정도로 유명해지며, 유럽에 자포니즘(Japonism) 붐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조선과 유럽과의 역동적인 무역관계가 수립되었다면, 지난 글에서 보았던 우리네 풍속화와 민화가 우키요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왠지 모를 아쉬움의 상상이 있다.

< 일본 만찬 파티. 찰스 위그먼. 19세기 후반. >


당시 파리에 머물려 우키요에를 접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원근법을 무시한 그리고자 하는 주제를 평면적으로 크게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과감히 생략해 버리는 이전에 보지 못한 방식의 그림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또한 일상의 평범한 주제들을 대상으로 하여 대담한 윤곽선과 독특한 구도 자르기 그리고 강조된 장식 패턴 등의 새로운 기법에 푹 빠지게 된다.

마네, 모네, 드가, 르느와르 등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으며 포스터 그림의 대가 툴루즈 로트렉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 고흐 또한 우키요에의 매력에 심취하여 심지어 일본을 방문할 계획까지 생각하였다고 한다. 1886년 이후, 그가 우키요에 작품을 수집하고 따라 그린 게 무려 약 470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 일본옷을 입은 모네 부인. 클로드 모네. 1876(왼쪽). 일본풍. 빈센트 반 고흐. 1887(오른쪽). >


그래서인가, 우키요에 영향을 받은 빈센트 작품에 대한 일본인의 애정은 상상 이상인데, ‘반 고흐 & 재팬 VAN GOGH & JAPAN’ 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회가 자주 열리기도 하고, 미술품 경매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반 고흐 작품을 낙찰받아가서 ‘해바라기’ 등 주요 작품들이 일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 Van Gogh & Japan 전시회 >


아이리스 그림의 첫 소장자는 반 고흐와 친밀하게 지냈던 화상 ‘탕기 영감’(Julien “Pere” Tanguy) 인데, 그는 반 고흐를 비롯한 여러 가난한 화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화방을 운영하며 그들과 깊은 친분을 쌓았다. 그는 실제로 세번이나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탕기 영감을 그린 그림 뒷면의 화방 벽면으로 보이는 배경에 수 많은 일본 그림들이 전시된 것에서 당시 반 고흐의 우키요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다시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빈센트 반 고흐가 죽은 뒤, 1892년 탕기 영감은 아이리스를 당시 미술 비평가인 옥타브 미르부(Octave Mirbeau, 그는 반 고흐의 첫 후원자들 중 하나였다)에게 300프랑(8만원)에 팔았는데, 최근 아이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 탕기 영감의 초상. 빈센트 반 고흐. 1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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