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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아몬드 나무 2 _ 빈센트 반 고흐

아몬드 꽃 _ 자연의 위로와 구원을 갈망한 화가

by Phillip Choi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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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나무 & 아몬드 꽃


아몬드 꽃은 유럽에서 봄에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린다.

중동이 원산지인 아몬드 나무의 히브리어 이름은 ‘샤케드’인데, 이는 ‘깨어 있는 자’를 의미한다. 2월이 되자마자 찬 공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아몬드 나무의 속성과 적확하게 어울리는 이름인 셈이다.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는 성경에서도 아몬드 나무는 여러 번 나오는데, 특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 하던 때에 모세의 형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오고 활짝 핀 꽃과 농익은 열매가 가득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스라엘의 예언서인 예레미야에도 아몬드 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스라엘을 향한 갑작스러운 심판에 대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경고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이 마른나무에서 꽃이 피어나듯 결국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의 증표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아몬드(almond)’라는 이름은 고대 프랑스어 ‘almande’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왠지 고흐가 그린 남프랑스의 아몬드나무를 생각하자면 고대로부터의 오리지널리티를 담고 있는 듯하다.

<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출애굽기. 구약 성경. >


아몬드 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데, 우리 주변에서 찾자면 복숭아 - 살구 - 매실나무와 가까운 나무이다. 나무줄기의 뻗어 올라가는 보양이나 꽃의 색깔과 형태도 서로 매우 비슷한데, 4~5겹의 꽃잎으로 하얗게 피어나는 겉모양만으로는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원산지는 메소포타미아 또는 현재 팔레스타인 주변의 중동으로 추정되는데, 지중해를 통해 그리스 로마 지역으로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아몬드 나무 과수원 >


사실 아몬드는 나무 자체의 생존을 위해 견과 속에 ‘아미그달린(amygdalin)’이라는 성분을 품고 있는데, 이는 섭취 시 장내 활동에 의해 청산가리와 같은 독성을 만들어내어 쉽게 먹을 수 없는 식물이기도 하였다. 물론 우리가 먹는 ‘스위트 아몬드(sweet almond)’ 품종은 개량을 거쳐 아미그달린 성분이 극소량만 포함되어 있을 뿐이지만, 야생의 ‘비터 아몬드(bitter almond)’ 는 여전히 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가끔 영화나 소설의 독살당하는 장면에 ‘희미한 아몬드 냄새’를 맡는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몬드는 많은 음식의 재료가 되기도 하며 그 자체로도 훌륭한 먹거리이다. 탄수화물이 거의 없으면서도 단백질과 폴리페놀, 비타민 E 등의 함량이 높아 건강한 식품으로 인기가 높다. 한때 중국 최장수 할아버지의 식습관의 하나로 소개되어 장수 식품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실제로 고대로부터 다양한 약재와 기름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아몬드 열매(왼쪽). 아몬드 기름(오른쪽). >


고흐 작품에는 프랑스 남쪽 아를 지방의 아몬드가 묘사되어 있지만, 세계적으로 아몬드가 가장 유명한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다. 전 세계 아몬드 생산량의 절반이 미국산이고 그중 80%가 또한 캘리포니아 지역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아몬드 꽃이 피기 시작하는 2월 16일을 아몬드 데이로 지정하여 꽃의 개화를 축하하고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이때 양봉업자들은 벌통을 가지고 다니며 아몬드 꽃의 수분을 돕는데, 벌이 물어다 주는 일 년의 첫 꿀은 아몬드 꽃 꿀(almond blossom honey)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캘리포니아 아몬드데이 포스터(왼쪽). 아몬드 꽃 꿀(오른쪽). >


매화 = 아몬드..?!


한국에는 아몬드나무가 없다. 남프랑스 아를보다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한반도에는 아몬드를 대신하여 매화가 자란다.

거칠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채 잦아들기 전이라도 더 이상 봄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눈 속에서라도 꼿꼿하게 피어나는 성품이나, 신록의 잎사귀가 돋아나기도 전에 먼저 꽃을 피워 사람들을 사로잡겠다는 도도함이, 유럽의 아몬드 나무와 다를 바 없다. 겨우내 회백색의 산천을 보며 움츠리고 있던 문인과 예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수많은 작품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스타성‘ 까지도 두 나무는 닮아 있다.

< 아몬드나무(왼쪽). 매화나무(오른쪽).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


"여기 아래는 너무 춥고 시골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꽃이 핀 아몬드 나무 가지에 대한 두 가지 작은 연구"라고 썼다.

두 연구는 유리잔에 담긴 꽃 아몬드 가지와 책이 든 유리잔에 담긴 꽃 아몬드 가지이다. _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바람이 눈을 몰아 산속 오두막 창문에 부디치니

찬 기운이 문 틈으로 새어 들어, 잠든 매화를 괴롭힌다.

아무리 매화를 얼게 하려 한 듯, 봄이 오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 _ 조선시대 안민영의 매화사


< 파교심매도. 심사정. 조선 후기. >

조선 시대 옛 문인들은 봄이 오는 길목에 매화를 찾아 나서는 ‘탐매(探梅)’를 중요한 봄맞이 행사로 여겼다. 사실 탐매는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일화로부터 유래되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는 산속 생활을 즐기며 자연의 찬양하는 많은 시를 남겼다. 그는 이른 봄이면 장안 근처의 도시 ‘파수’를 지나 다리 ’파교’를 건너 눈이 쌓인 산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추위 속에 피어나는 고고한 매화를 마중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다.


맹호연의 ‘탐매’에 탐닉한 조선의 문인과 화가들은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나귀를 타고 매화꽃을 찾아 입산하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들이 찾고자 한 것은 과연 매화뿐이었을지, 아니면 매화를 매개로 다른 그 무엇을 찾으려 한 것일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풍류를 즐기는 선조들 덕분에 조선 중기 이후 탐매를 담은 문인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들은 도롱이 같은 도포를 걸치고 삿갓을 쓰고 당나귀를 탔다.


겸제 정선의 설평기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겸재 정선의 그림 중에도 매화를 소재로 한 문인화가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설평기려(雪坪騎驢), 파교설후(灞橋雪後), 기려심매도(騎驢尋梅圖)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조선 중기 활동한 화가로 한강 일대의 전경을 화폭에 많이 담았다. 중국 명산을 따라 그리는 화법 대신에 조선의 산천을 그대로 옮기는 진경산수화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겸재가 양천의 현령으로 근무하던 때, 친구인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며 그렸던 '양천십경'의 하나인 ‘설평기려(雪坪騎驢)’ 는 탐매의 풍경을 그린 대표작이다. 눈 덮인 우장산 풍경을 보며 당나귀를 탄 선비가 매화를 찾아 눈길을 나서고 있다. 그림의 왼편 별지에는 사천의 시가 수록되어 겸재의 탐매를 설명한다.


"높은 두 봉우리 긴 자락 끝은, 아득한 십리 벌판 / 새벽 눈 깊은 곳을 볼 수 있을 뿐, 매화 핀 곳은 알지 못하네"(長了峻雙峰 漫漫十渚 / 祗應曉雪深 不識梅花處).

< 설평기려. 사천 이병연의 시와 겸재 정선의 그림. 1740년. >


조희룡의 홍백매화도


조희룡은 자타가 공인하는 매화에 미친 사람이다. 조선 후기, 한양에 살았던 그는 집 주변에 수십 그루의 매화를 심고 가꿨다. 그의 집은 매화를 향기로운 눈으로 비유한 ‘향설관(香雪館)’으로 불렸고, 붉은 매화를 그리다가 붉은 점으로 어지럽게 된 방을 ‘강설재(絳雪齋)’라 칭하였다. 그를 가리키는 많은 호 중에 당연하게도 매화 늙은이란 뜻의 ‘매수(梅?)’도 있다.

“나는 매화를 몹시 좋아하여 스스로 매화를 그린 큰 병풍을 눕는 곳에 둘러놓고, 벼루는 매화시경연(梅花詩境硯)을 쓰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硯)을 쓰고 있다. 바야흐로 매화 시 백 수를 지을 작정인데, 시가 이루어지면 내 사는 곳의 편액을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하여 내가 매화를 좋아하는 뜻을 쾌히 보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이루어내지 못하여 괴롭게 읊조리다가 소갈증이 나면 매화편차를 마셔 가슴을 적시곤 한다. -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중에서.”


그 대표작의 하나는 병풍에 그린 홍백매화도다. 집안에 두고 쓰는 병풍에 매화를 옮김으로 그는 꽃을 매일의 삶 속으로 품고자 하였다. 그림 옆 화제에는 평소 힘 있는 서체를 구사한 것과 다소 다른 글씨체를 쓰며, 자신은 기존의 매화 그리는 법을 따르지 않고, 전서(篆書)와 예서(?書)와 같은 옛 글씨 쓰는 방법으로 그렸다고 설명한다. 글씨를 새기듯 그린 매화를 은하수에서 쏟아진 별, 고치를 벗고 흰색과 붉은색으로 날아다니는 나비로 비유하고 있다.

< 홍백매화도. 조희룡. 19세기 중반. >


단원 김홍도의 매화음


반 고흐에 비길만한 우리네 화가로 단원 김홍도를 빼놓을 수 없다. 매화를 매우 좋아하던 김홍도에게는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어느 날 시장에서 예쁜 매화나무를 발견한 단원은 그것을 사고자 하였으나, 파는 사람은 매우 거금인 2천 냥을 걸었다고 한다. 고민하던 단원에게 마침 그림을 의뢰하고자 사람이 찾아오고, 그는 매화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3천 냥을 들고 냉큼 매화를 사게 된다. 이제 남은 돈 중 8백 냥으로는 술잔치를 벌이고 그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매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즐겼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단원이 가진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고 하여 유명하게 되었는데, 당시 배곯는 일이 다반사였던 가난한 화가의 삶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매화를 아끼면 가까이했는지 가늠케 한다. (3천 냥 중에, 생계를 위해 보낸 돈은 겨우 2백 냥이라니;;; )


그럼에도 그의 그림 ‘노매도’와 ‘백매’의 생명력 있는 뻗어감을 보고 있자면, 혹 매화음을 즐기던 벗 가운데 반 고흐가 있지 않을까 할 만큼 즐거운 상상도 무리가 아니다.

< 노매도(왼쪽). 백매(오른쪽). 김홍도. 1745~1806. >


전라남도 광양 매화 마을


반 고흐가 감탄하던 아를의 아몬드 꽃 풍경은 매화마을로 유명한 전남 광양의 섬진강변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정원수가 아닌 열매를 수확하기 위한 농민들의 경작물이라는 점에서 아를의 아몬드 나무와 같기도 하거니와 농민의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이 그대로 투영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광양 매화마을은 1930년경 전국에서 매화나무 집단 재배를 가장 먼저 시작한 청매실농원을 중심으로 10만여 평의 매화 군락지가 조성된 농촌 마을이다. 1997년 시작된 지역의 매화 축제가 이제는 전국을 대표하는 봄 축제로 자리 잡아 매년 3월이면 수많은 상춘객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 광양 매화 마을 전경 >


매화는 워낙 흔하게 쓰이는 조경수종이라 매화가 피는 대표적인 정원을 꼽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직은 찬 바람이 가시지 않은 시기, 있는 힘을 다해, 그러나 청연 하게 피어있는 뒤뜰의 매화 풍경을 잊기는 쉽지 않다. 볕 좋은 날을 택해, 따뜻한 매실차 한잔을 들고, 꼬까옷을 입은 아이들의 생명력 있는 소리를 들으며 감상하는 매화꽃은, 반 고흐가 느꼈던 그 감정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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