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 2 _ 베르트 모리조

최초의 여성 인상주의 화가

by Phillip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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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국 ]


여름의 문턱, 장마의 시작 전후로 공기가 한껏 무거워질 때쯤이면 녹색의 정원 곳곳에서 보라색의 풍성한 꽃송이를 만나게 된다. 아래의 넓은 이파리를 가릴 만큼 커다란 봉우리를 뽐내는 꽃, ‘수국(水菊)’이다. ‘물을 좋아하는 국화처럼 생긴 꽃’이라는 한자어 이름처럼, ‘물을 담는 그릇’을 의미하는 서양 학명 ’하이드란지아(Hydrangea)’ 처럼 수국은 물을 머금은 공기의 냄새가 진동하는 그 계절을 기억하게 하는 꼿이다.



수국 꽃은 특이하다. 사실, 우리가 보는 화려한 꽃은 진짜 꽃잎이 아니라 (수술과 암술이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짜의 꽃받침이다. 겉꽃잎을 들추면 안쪽에 좁쌀 같은 알갱이들이 숨어있는데, 이것들이 진짜 꽃이다. 화려함으로 본질을 감추는 영민한 모습임과 동시에, 번식을 위해 벌과 나비를 부르지 못하는 진짜 꽃의 소박함을 풍성한 꽃받침으로 대신하는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 수국 장식화(바깥의 넓은 꽃잎)와 진짜 꽃(안쪽의 작은 알갱이) >



장식화의 현란함은 꽃으로서의 수국을 더욱 사랑받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수국은 한국, 중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가 고향이다. 동양의 옛 예술가에게 숲 속 안개를 뚫고 풍성하게 피어나는 수국은 ‘신선 세계의 꽃‘ 과 같은 신비로움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으로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백낙천)는 어느 사찰에서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는 ’보라색 태양처럼 빛이 난다‘ 하여 ’자양화(紫陽花)‘ 라고 이름 붙였고, 이후 동양의 문학과 그림에서 수국은 선비의 정원이나 신선도를 꾸미는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 잎을 달여낸 달콤한 감로차도 옛 문인들의 기력을 보충하며 수국의 매력을 더하였다.

< 당시인 백거이의 자양화(왼쪽), 수국 잎으로 만든 감로차(오른쪽) >



18세기말 유럽으로 건너간 후, 수국의 화려함은 더욱 주목받았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대담한 부피감과 오묘한 색채 덕분에 수국은 귀족들의 정원을 장식하는 이국적인 소재로 사랑받았으며, 이후 웨딩 부케의 주요 재료가 되며 여러 작품에도 등장하게 된다.

< 지베르니 정원의 수국(왼쪽) 수국이 있는 봄의 꽃다발. 오귀스트 르누아르. 1866(오른쪽) >



장식화로 달려있는 꽃받침의 독특한 색감은 수국의 매력을 더하는 이유이다. 수국 꽃은 토양의 성분에 따라 그 색상이 변화하는데, 산성 토양에서는 알루미늄 성분을 흡수하여 파란색 꽃을 피우다가도 알칼리성 토양에서는 이를 흡수하지 못하여 분홍과 빨강의 꽃을 피워낸다. 이런 성질 때문에, 프랑스의 한 정원사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매일 흙의 성분을 바꿔가며 수국 꽃의 색깔을 바꿔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토양 성분의 변화가 아니더라고, 수국은 생애 주기에 따라 처음에는 연한 녹색으로 피어나 흰색이나 파란색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다시 녹갈색으로 지게 된다. 조선의 화가 신임이 수국을 그리며 ’꽃이 처음에는 희다가 푸르게 변하고, 다시 보라색이 되니 그 조화가 신통하다‘ 며 감탄하며 수국을 ’수구화(繡毬花)‘, 즉 비단실로 만든 공과 같은 귀한 꽃으로 불렀다고도 하는 이야기도 있다.

< 수국의 꽃 색상 변화(왼쪽). 꽃. 신명연. 조선 후기(오른쪽) >


[ 수국 정원 ]


정원용 꽃으로 사랑받는 수국을 즐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화훼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공기가 채 촉촉해지기도 훨씬 전, 봄이 오는 기색이라도 보일라치면, 길가의 꽃집에는 어느새 화려한 색깔로 피어있는 수국 화분이 즐비하게 전시되곤 한다. 여름 정원을 돋보이게 하는 관상용으로 이미 보편화되었으니, 주택 담벼락 밑을 장식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파트 조경에 군락을 이루어 피어나는 것은 이미 흔히 보는 경관이 되었다. 그럼에도 수국 본류의 아름다움, 특히 시원하게 내려앉은 촉촉한 공기와 함께 공감각적으로 즐기고자 하면, 몇 군데를 쫓아 다녀올만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제주도의 사려니숲길은 제주의 자생종에 가까운 산수국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울창한 삼나무 숲길 옆으로 길게 펼쳐진 수국은, 큰 나무 그늘아래에서 신비로운 푸른빛을 발하며 방문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나무 잎의 초록과 줄기의 갈색, 붉은 화산석 길과 검은 현무암 돌담을 배경으로 매력적인 푸름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샤려니숲길은, 금방이라도 숲의 정령이 튀어나올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 사려니 숲길의 산수국 >



수도권 근처라고 하면, 아무래도 아침고요수목원의 수국이 매력적이다. 매년 전시와 연구를 병행하며 수국의 대중화에 앞장서도 있으면서도, 특히 추운 겨울을 보내는 가평의 지역적 특징을 담아 우리나라의 기후에 맞는 수국 품종을 선별하여 선보이기도 한다. 매년 초여름에 열리는 수국 페스티벌은, 조금은 번잡스럽더라도, 수국 꽃의 화려함을 현란하게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사려니숲을 보는 듯, 급한 경사의 숲길을 가득 채운 푸른색의 산수국 구간과 하얗고 분홍의 다양한 색감을 뽐내는 달빛정원이나 전시장 주변의 서양 수국 구간 등 200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수국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으니, 장마 시작 전, 상쾌한 촉촉함으로 장마 기간의 아쉬움을 미리 견뎌내기에 좋은 공간이 될 것이다.

< 아침고요수목원의 산수국(왼쪽). 수국 전시(오른쪽) >



물론, 이전 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수국의 풍성한 꽃대는, 정원의 풍성한 오브제를 전혀 찾을 수 없겠다 하는 이 겨울의 정원을 주목하게 하는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도 다시 기억해 주자.

< 천리포 수목원의 겨울 수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