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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다 Aug 03. 2021

투표

잊을 수 없는 말

“저는 잘 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뽑아 주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열한 살짜리 반장 후보로서 내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4학년 1학기 반장과 부반장을 뽑는 날이었다.

 “정윤미를 반장으로 추천합니다.” 소리가 들리자 가슴이 툭툭거렸다. 3학년 때도 그랬고 2학년 때도 그랬다. 반장 후보로 추천 받는 순간 근심이 밀려왔다. 반장이 되면 그 일을 어쩌나 앞이 캄캄해지고 교탁 앞으로 나가 후보사를 하는 일이 힘에 부쳤다. 그 날도 앞에 나가 애들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며 애원을 했다. 어떻게든 반장이 되는 일을 막고 싶었다. 앉은 자리에서 손을 들어 발표하는 일도 힘들어하는 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정윤미!” “이미정!” “정윤미!” 투표 용지를 펼쳐 호명할 때마다 칠판에 ‘바를 정(正) 자’가 그려졌다. 제발. 제발 내 이름이 아니기를. 그러나 원대로 되지 않았다. 내 이름 뒤에 붙은 ‘정 자(字)’가 더 많았다. 당선 축하 박수를 받으면서 내 고개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쉬는 시간이 되고 교실은 단박에 왁자해졌다.


 “정윤미, 이미정. 이리 와 봐.”

 담임이 반장이 된 나와 부반장이 된 이미정을 불렀다. 나는 교실 뒤편 창가에 있는 담임 책상 앞에 가 섰다. 내 오른쪽으로는 이미정이 섰다. 담임이 좀전에 개표한 투표 용지를 자신 쪽에서 우리 둘 앞쪽으로 밀어 보냈다. 나한테는 이미정의 이름이 적힌 투표 용지가, 이미정한테는 내 이름이 적힌 투표 용지가 놓였다.

 “몇 장인지 세어 봐.”

담임의 말이 떨어지자 둘은 상대 이름이 적힌 용지를 세기 시작했다. 몇 장인지 말하라고 했다. 이상했다. 이미정 표가 더 많았다. 내 표는 어디로 간 거지. 혼란스러운데 담임 목소리가 들렸다. “개표가 잘못됐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해야겠지?”

 담임 말에 나는 또 끄덕였다.

 

 "여러분. 아까 개표가 잘못 되어서 다시 투표합니다. 투표할 때 잘 생각해야 돼요. 반장 어머님은 학교를 자주 나오셔서 학교 일을 협조할 수 있어야 해요. 이걸 잘 알아서 투표하기 바래요.” 엄마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엄마는 학교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엄마가 학교에 와서 담임과 만나는 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나한테 밥을 해 주고 이불 호청을 갈아 끼우는 사람이지 학부형 역할을 하는 사람이 못 되었다. 애들은 다시 흰 종이에 이름을 적었고 서기가 나왔고 호명이 되었고 칠판이 정 자로 채워졌다. 내 표가 적었다. 나는 이제 반장이 아니게 되었다. 이미정이 반장, 나는 부반장.

 

 아버지한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일 전부를. 평소에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하는 딸이 아니었던 나는 그 날은 다른 마음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고 여겼다. 이 일만큼은 아버지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직매약국을 지나 ‘행당전파사·철물점’ 내 집을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나는 생각이 많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게 이런 거겠구나 했다. 아버지는 키 큰 빗자루로 가게 앞 도로를 쓸고 있었다. “아버지. 오늘 반장 선거를 했는데요.......” 비질을 하면서 내 얘기를 듣다가 아버지가 비질을 멈췄다.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내가 겪은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아버지 어깨가 딱딱해지고 표정이 굳어진 게 그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장명자였나? 그 때 담임 이름이 가물하다. 그런데 “다시 해야겠지?” 그 말은 기억난다. 그 말을 하던 그녀의 동그랬던 눈도 기억난다. 그 눈이 까만 테 안경 너머에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그 날 이후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 날 학교를 갔겠고 반장 그늘 밑에서 그러저러 부반장으로 하루하루를 지냈으련만 그 해의 어린 내 모습이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 담임이 개표 결과에 낙심한 이유는 뭐고, 자신 자리에 돌아가서 내 이름이 적힌 투표 용지를 감춘 곳은 어디며, 재투표 후 일 년 내내 나를 보면서 그녀가 한 생각은 뭐였는지, 전파사집 딸인 내가 ‘다시 해야겠지?’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세상 이치는 무엇인지, 아버지가 긴 한숨으로 그 날 일을 묻었듯 나도 그랬던 걸까. 말은 잊을 수 없는데 말 이후의 삶은 온데간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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