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 8일. 새벽 다섯 시. 전철 첫차를 타려고 일어났다. 명동에 있는 미장원을 가기 위해서였다. 엄마랑 둘이 자는 가겟방에서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옷을 입었다. 엄마가 깨지 않길 바랐다. 가게 바닥에 발을 디디고 부엌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엄마가 어느 새 일어나서 내 뒤에 서 있었다. 엄마를 흘끔 보고 기역자로 꺾인 공간으로 들어섰다. 부엌이라야 연탄 아궁이가 있는 부뚜막과 수도 꼭지가 있을 뿐이었다. 가겟방과 벽을 같이 하는 부엌은 3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마당으로 통하는 부엌 문을 열었다. 마당 왼쪽으로는 셋집들이 쓰는 변소가 있고 정면으로는 너댓 걸음 안 가서 녹색 철대문이 있었다. 가게는 셔터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 셔터를 올리노라면 가게 다락에서 자고 있는 아버지랑 남동생이 깰 터였다. 그러니 나는 안집 대문으로 나가야 했다. 엄마가 나를 따라 안집 마당에 섰다. 거기까지 따라나서는 엄마가 낯설었다. 내가 아는 엄마는 자고 있어야 했다.
'흡’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등을 돌려 엄마랑 마주 섰다. 엄마가 말했다. “이제 오늘 지나면 못 보잖니.” 엄마는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내가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엄마한테서 나온 말인지라 해석이 필요했다. 엄마가 앞으로 나를 못 보게 돼서 서운하다는 말 같은데 그럼 엄마가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와서도 안 울고 경운기를 몰다가 자동차에 치여 죽은 젊은 외삼촌 장례식장에서도 밥을 잘 먹고 내 밑의 여동생을 한 돌이 안 돼서 잃었다는 말을 아버지한테 듣고 내가 그 애가 죽었을 때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농사가 하도 힘들어서 일을 덜었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한 사람이 내 앞에서 울고 있다니. 내가 스물 일곱이 되도록 엄마로서 나를 어떻게 느끼는지 그 말 한 번을 해 주지 않은 사람이 이제 나를 못 봐서 어떻게 하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니. “무슨 말이야. 못 보긴 왜 못 봐.”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집어넣으려다 보니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엄마를 뒤에 두고 대문을 열고 구의역까지 걷는 동안 착잡했다. 초등학교 때 상상하곤 했다. 어느 날 귀티가 흐르는 아줌마가 고급 차를 타고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 그녀는 나를 보자 말한다. 내가 네 엄마라고. 나는 기쁘다.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을 받아 주면서 학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엄마, 목욕탕을 같이 가는 엄마, 시장을 같이 가는 엄마, 임원 엄마로서 학교를 오는 엄마를 드디어 나도 갖게 됐다. 그러나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고 나는 스물 일곱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 알게 됐다. 엄마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등학교 1학년 그 날, 엄마는 내가 다락방에 있는 줄 몰랐을까. 마실 온 동네 아줌마가 가겟방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엄마한테 말했다. “윤미 엄마는 좋겠어. 딸이 있어서.” 엄마 마음을 알고 싶어서 나는 다락방 문에 얼굴을 댔다. “아휴 딸이면 뭐해요. 애라구 쌀쌀맞아서 정이 안 가요.” 그 날 이후 나는 ‘따귀맞은 영혼’으로 살았는데 엄마가 흘린 눈물이 그 세월을 오해의 세월로 바꿔 놓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머리가 띵띵했다.
오전 10시. 성수역 근처 성락교회. 나는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새벽에 엄마를 그렇게 떠나서 다섯 시간이 지났다. 미용실에서 신부 화장을 하고 머리를 올리고 드레스를 입고 신랑이 모는 프라이드 차를 타고 교회에 오기까지 나는 실 달린 인형 같았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내 뜻이 아닌 듯 무거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오전 11시. 신부 입장. 아버지가 나를 떠나 가 앉는 자리 옆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엄마는 겨자색 저고리에 자줏빛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어떤 한복을 입을지 몰랐고 엄마는 내가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 몰랐다. 새살림 그릇이며 가전도구도 나는 친구랑 장만했다. 나는 그런 딸로 엄마는 그런 엄마로 살았다. 그러다가 몇 시간 전에 나는 엄마 마음을 알았다. 나를 보내면서 허전해하는 엄마가 저기 앉아 있었다. 저 엄마를 두고 내가 간다니. 설움이 복받쳐올랐다. 주례사가 끝나고 축가가 이어져도 울음을 멈추지 않자 드레스를 건사하는 여성이 내 옆에 와서 화장솜으로 내 얼굴을 두드리며 귓속말을 했다. “마스카라 번져요. 그만 좀 우세요.”
눈물. 그것은 그 날 새벽에 엄마가 나한테 준 선물이었고 같은 날 낮에 내가 엄마한테 준 선물이었다. 어린 시절을 건너 청년이 되도록 제 엄마한테 사랑 하나 받아본 적 없다는 열등감에 앙상했던 나는, 그 날 그렇게 눈물을 주고받고 떳떳해지기 시작했다.
허니문 베이비가 생기고 일곱 달여 입덧을 하면서 엄마가 해 주는 밥이면 넘기려나 싶어 퇴근을 하면 엄마를 찾아 반지하방에 깃들었다. 월급을 타면 파마값을 건네고 어버이날이면 꽃무늬 월남치마를 골랐다. 내가 낳은 애를 데려가서 생색 내며 안겼고 돌아설 땐, 양념 다 되어 불 위에 갖다 얹기만 하면 되는 냄비를 당연한 듯 받아 왔다. 그 날 새벽 추위 속에 작은 마당에 마주 서서 엄마가 나한테 건넸던 말, “이제 오늘 지나면 못 보잖니.”를 또 들을 수 없어 아프다. 셈해 보니 이승에 같이 있지 않은 지 25년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