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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다 Aug 16. 2021

41

잊을 수 없는 숫자

  ‘코레일톡’을 왼손 엄지로 ‘톡!’ ‘승차권예매’를 오른손 엄지로 톡! ‘출발역은 덕소, 도착역은 원주, 출발일시는 화요일’, 엄지 검지 다 써서 화면 밀고 내리고 톡!톡!톡! ‘열차조회’ 톡.  ‘10:54 출발 예약 가능’ 톡. 돈 좀 벌었다 싶은 날은 ‘특실 예약 가능’에, 돈 좀 아끼자 싶은 날은 ‘일반실 예약 가능’에 톡. 좌석선택 톡. 1호차부터 6호차 중 하나에 톡. 기차 한 칸의 좌석전부를 보이는 화면이 나오면 41에 톡. ‘툭’도 아니고 ‘쓰윽’도 아니고 ‘톡’ 건드리면 잘 익은 수박이 칼 밑에서 쩍쩍 벌어지듯 핸드폰의 손바닥 만한 화면이 쩍쩍 벌어졌다. 그렇게 내가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마다 대학원을 가기 위해서 매주 한 번씩 의식처럼 만난 숫자는 ‘41’이었다.   

    

 ‘41’은 중1 때 내 번호였다. 한양여중 1학년 9반에서 나는 주전자도 아니고 빗자루도 아니고 칠판은 더더구나 아니고 ‘41번’이었다. 중2 때 번호도 생각 안 나고 중3 때 번호도 생각 안 난다. 고등학교 1,2,3 학년 번호도 한결같이 생각 안 난다. 초등학교 때는 번호가 있었나 싶게 아득하다. 왜 나는 중1 때 번호만 기억하고 있나. 짚이는 게 없었다. 담임이 혐오스러웠긴 했지만 그런 담임이야 그 전에도 있었고 그 다음에도 있었다. 짝꿍이랑 유난히 잘 지냈나 하면 다른 때 짝꿍이 우수수 떠올랐다. 누가 최면이라도  걸어 줘서 알아내 주면 좋겠다.      


 다행히 그 때 친구가 다섯이나 있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요긴히 쓰일 때다. 여섯 중 인간 기록기인 지연이한테 제일 먼저 전화를 했다. 안 받았다. 여섯 중 제일 편한 정희한테 전화했다. 안 받았다. 이어지지 않는 우리 사이. ‘톡’ 놔두고 불편하게 왜 전화질이냐는 거야 뭐야. 기운이 빠졌으나 나는 알아내야 했다. 연희는 받았다. “응, 나야. 너 중학교 1학년 때 내 번호 생각 나니?” 연희는 번호 말고는 다 생각난다는 듯 별 기억을 다 끄집어냈다. 우리가 먹던 냉면 집 이름 ‘미리내’ ‘뚜리와’ ‘하얀집’. 눈 온 날 미끄러웠던 행당동 언덕 길, 정희네 개가 마루 밑에 놓은 쥐약을 먹고 죽은 날.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기분을 껴안고 내 전화질은 이어졌다. 여섯 중 제일 먼저 시집을 간 보형이. 그녀는 놀랍게도 내 번호가 41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기 기억이 얼마나 착한지를 우리 여섯의 번호를 줄줄이 꿰는 걸로 증명하려 했다. 선생들 성대모사를 기막히게 했던 숙진이도 내가 42번이라고 했다. 뒤늦게 전화한 지연이는 내가 애들한테 번호를 뺏긴 양 시무룩해하니까 그 때 학생증 없냐며 자기는 있다며 얼른 전화를 끊고 싶어하는 듯했다. 더 늦게 전화한 정희는 내가 연희 기억을 전해 주자 자기 개가 그렇게 죽었냐며 되레 나한테 물었다. 알 게 뭐람. 난 그 때 그렇게 운명한 정희네 개보다 내 번호가 시급해서 건성으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2년이 넘는 지난 시간 동안 41이라는 숫자는 나한테 고마운 숫자였다. 이 숫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매주 수많은 좌석 앞에서 여기 앉을까 저기 앉을까 갈팡질팡했을 것이다. 핸드폰으로 기차 표를 예매하려고 처음 화면 속의 기차 의자들을 봤을 때 선택이 쉽지 않았다. 별 게 다 어렵구나 하면서도 아무 데나 ‘톡!’ 하게 되질 않았다. 어디에 앉느냐가 기차 등하굣길의 품질을 결정한다는 신념 때문에 주저했다. 그러다 번쩍 ‘41’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 번호. 수줍음 많았던 중1 여학생 정윤미. 나는 구제되었다. 그렇게 ‘나’를 반기는 기분으로 41번에 앉아서 덕소에서 원주를 원주에서 덕소를 오갔다. 그런데 41이 아니라 42란다. 나는 지연이처럼 중1 학생증을 간직하고 있지 않아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면서 정희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넘겨 버리지도 못한다. 연희처럼 다른 아름다운 기억에 취해 번호문제를 뒤로 물리지도 못한다. 많이 궁금하다. 41인가 42인가. 혹 42라면 나는 왜 41이라고 믿고 있나.       


 지상에서 번호로 불리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인간의 손 끝에서 태어나는 물건에는 번호가 부여된다. 관리가 그 목적이다. 그래서 관리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번호로 불린다. 군인이 그렇고 죄수가 그렇고 환자가 그렇고 학생이 그렇다. 번호로 호명되는 사람은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잊는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하기를 멈춘다. 부르는 사람의 목적에 부합하려 애쓰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소환에 대비하느라 근육은 팽팽하다. 내 짝꿍 신화진을 생생히 그려낸 숙진이는 말했다. 우리한테 중1이라는 나이는 번호로 불리는 최초의 나이가 아니었겠느냐고. 식구들한테 이웃한테 선생님한테 이름으로만 불리다가 중학교에 들어와서 교과 시간마다 바뀌어 들어오는 교사들이 우리를 번호로만 부르지 않았느냐고. 숙진이 말이 맞다면 나의 ‘41’에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 나는 제 번호를 바꿔치기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품고 있는 사람이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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