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다 Sep 29. 2023

송화

잊지 못할 집

  저 집에 송화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열린 문 새로 지팡이가 나오고 잇달아 송화의 버선코가 나오겠다. 두루마기 서걱거리는 소리가 나겠다.  내가 송화를 마지막으로 봤을  송화가 어린 계집아이 손에 이끌려 긴 길을 걸었다. 이제 그 계집아이는 없을 거다. 그러므로 이제 송화는 소리하고만 산다. 저 집에서.

생부도 아닌 이하고, 역시 피 한 숟가락 안 섞인 남동생하고 그렇게 셋이 떠돌면서 양부한테 소리를 배우고, 커서는 그 소리를 팔아 셋의 곡기를 이어나간 송화. 그것만으로는 서편제 소리에서 요구하는 한의 함량에 못 미친다고 판단한 양부한테서 눈을 빼앗기고, 깊어진 한이 빚어내는 소리로 얼만큼의 세월을 이겨내고, 내가 니 눈을 멀게 한 그 사실을 너는 알고 있었느냐고, 양부가 죽어가며 달싹거릴 때 진즉에 용서했노라 목울대를 적신 송화.


  의붓아비한테 적의를 품고 자신이 눈 멀기 훨씬 전에 집을 떠났다가 수소문 끝에 자신을 찾아내어 눈 먼 자신 앞에 앉은 동생을 끝내 알은체하지 않고 심청가 한 대목으로 인연의 질긴 동앗줄을 놓아버린 송화.


  그렇게 동생을 보낸 뒤 이제 그만 떠날 때가 되었다며 머물던 주막을 나설 때도 눈발이 날렸더랬다. 나는 그렇게 길 떠나는 송화가 하도 독해서 코가 매웠더랬다. 그 때 그렇게 스크린에서 이별한 송화가, 오늘, 작년 겨울에 찍어둔 저 사진 속 집에서 불쑥 나올 거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진 속 저 집은, 작년 겨울에 가평중학교엔가로 학교폭력예방 강의를 하고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서서 만나게 된 집이다. 십자로에서 아차차 하는 순간 내 집과 반대 쪽 길을 들어섰는데 길은 외줄기고 때 맞춰 눈발마저 흩날려서 순식간에 내 맘이 아득해지고 캄캄해졌다. 어서 길이 끊기기만 바라며 그 맘을 달래며 직진을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전방 오른쪽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내 황망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점점 세지는 눈발 때문이었는지 버스가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아서 할머니가 안쓰러웠지만 난 내 길을 가야 했다. 그러나 이백 미터 이상을 가지 못하고 나는 후진을 해서 할머니 곁에 차 궁둥이를 들이댔다.


  할머니는 내 차에 눈이 떨어질 걸 걱정하며 올라타셨고, 어지럼증 땜시 병원 갔다 오는 길이라셨고, 버스가 영 안 와서 섰는데 월매나 힘이 들었능가 몰랐다고 하셨으며 조짝 큰 길가 아무 데나 세워달라고 하셨다. 이왕지사 집까지 가시자고 해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시야에 도무지 인가가 뵈질 않아 나도 같이 손사래를 치며 도착한 집. 그 집이 사진 속 저 집이다.


  나는 오줌보가 꽉 차 있었다. 돌아갈 길도 꽤 되는지라 할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할머니 집 대문 시건 장치는 녹슨 숟가락이었다. 숟가락을 들어올리고 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당 맞은편으로 댓돌이 보이고 쪽마루가 보였다. 그런데 할머니 방은 거기가 아니고  그 마루를 마주보고 있는 공간에 있었다. 기름보일러를 놓은 방 한 칸과 변기 하나 간신히 앉힌 화장실이 할머니가 쓰는 곳. 혼자 사시냐고 하니 자식이 일곱인데 모다 뿔뿔이 흩어져 산다고 하신다. 적적하실 텐데 세라도 놓으시죠 하니 여름에 자식들이 손주들 델꼬 놀러오면 쓰니께 못 놓는다고 하시며 자식들이 집을 팔지도 못하게 한다 하신다.


  오줌을 누고 나오는 내게다 할머니는 두유 서너 개를 극구 안기신다. 잘 걷지도 못하시는 할머니를 두고 나오자니 서너 번 돌아봐졌다.

  

 그렇게 나와 저 집을 사진 찍으면서 나는 바랐다.   할머니의 말벗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쪽에 밥벌이 자리가 생기길 바랐다. 바라기만 했다. 그 다음 수순은 밟으려 들지 않았다. 이 집까지 온 게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듯 다시 오게 되는 일 역시 내 바깥 어느 힘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세 계절을 보내고 오늘 이 사진을 본다. 그런데 저 집에 송화를 들인다. 내 멋대로. 할머니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할머니 자식들한테 허락도 안 받고. 나는 못 가고 여기 있으니까 송화를 거기 있게 한다.


  근데 어쩌면 할머니는 저 집을 떠나셨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집엔 또 송화 혼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2015.10.5>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와이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