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덜커덕 제대하기 전에, 한 번이 될지언정, 꼭 면회를 가리라, 별렀던 까닭이 뭘까, 를, 생각해 보진 않았으나, 그와 나눈 밥상의 흔적을 찍어 놓고 보니 몇 가지가 그거였나 싶다.
하나, 시간을 거슬러, 그 때, 내 이십대의 그 날들을 만나려는 속셈이 있었다. 군인을 만나며 보냈던 그 시간 속에 다시 가 앉아 보는 일이 내게 어떤 맛을 줄지에 대한 호기심.
둘, 단둘이 마주할 때 그가 나랑, 어떤, 떨림을 갖길 바랐다. 실제로, 행정반에 주민증을 맡기고 그를 만나 위병소까지 걷는 동안 그와 난 손을 잡고 걸었다. 동행인이 있었던 지난 몇 번의 면회 때는 없었던 일이다. 손을 잡고 걸은 거리는 겨우 이백 미터 가량밖에 안 됐지만 그와 나 사이에 흐른 건, 최소한 나한텐 새로운 떨림이었으니 그에게도 유사한 떨림이 있었길.
셋, 과일 정도 가져가고 배를 채울 것들은 부대 주변의 피자집이나 치킨집에 시켰던 여느 면회와는 달리 그에게 원하는 음식을 전 날 전화로 묻고, 답 들은 대로 생선 초밥을 준비해 간 것은, 음식을 시킨다, 받는다, 치운다 하는 시간을 안 쓰기 때문에 절약 될 시간으로 하여 그가 나와 마주할 시간을 최대화하여 그가 어쩔 수 없이 내 속으로 들어오게 되길 바라서였다. 동행이 있으면 그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질 거란 계산.
넷, 그를 부대에 남기고 돌아오는 길의 슬픔을 만끽하고 싶었나 보다. 이건 예상치 못한 슬픔으로서 결과론적인 속셈인데, 위병소 앞에서 작별할 때만 해도, 그는 그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걷는 그 현실이 매우 불합리하게 여겨져 약간의 분노만 있었을 뿐 슬픔 같은 건 없었는데, 막상 차를 몰고 집 쪽으로 오는 동안 서서히 슬픔 같은 게 올라오는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뭔가 앞으로 요긴히 쓰일 슬픔으로 느껴졌다.
이제 그는 잠들었으리. 강제된 수면이 그를 나와 같은 시간에 깨어 있지 못하게 한다. 이 사실이 아까 돌아올 때 스민 슬픔보다 짙은 슬픔을 겪게 한다. 가만! 이건 저 옛날, 그가 중3 때, 이 땅에서 열등생으로 사는 일이 숨막히다고 하여 길이 될지 겪어 보겠다며 그가 중국 땅에 가 닿은 첫날, 이게 무슨 지랄 맞은 일인가고, 저 어린 게, 다만 공부가 앞서지 못하는 것 때문에 익숙한 공간을 제 발로 기어나가야 하는 이 현실이 뭔가고, 이국의 어느 잠자리 공간에서 그의 눈에 들어올 천장의 낯선 무늬를 생각하며 명치께가 아팠던 그 날 밤 내가 겪었던 그 아픔과 닮았다.
이제 난 그가 더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떼밀려 낯선 잠자리에 길들여지는 삶의 한중심에 서지 않게 되길, 바라고, 또 바라 보지만....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에 내가 뭐라도 하고 있는 거 같지 않으니 그 바람이 이뤄지지 않은 어느 한때에 나는 또 동류의 슬픔을 겪어 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