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토 Nov 21. 2022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

<블레이드 러너>(1982)와 어떻게 다른가


드디어 봤습니다!

이 브런치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이 영화 때문이었는데요.. 저의 1월 1일 신년 목표로 올해는 꼭 블레이드 러너를 봐야지 했는데 벌써 11월이 훌쩍 지나가게 생겼네요. 후속작이 30년도 더 뒤에 나온 영화라 두 편을 비교해 보기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82년작 블레이드 러너 하나만 해도 장면 단위로 분석할 부분이 굉장히 많은 작품이지만 여기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고,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위주로 이전 작과 비교하며 다른 지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영화의 세계관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주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노예로 부려지는 인조인간 '레플리컨트'가 만들어지는 시대, 레플리컨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이 지구로 들어오는 것은 불법이 되었고 '블레이드 러너'라는 특수 경찰들이 지구에 잠입한 레플리컨트들을 찾아 퇴역(폐기) 시키는 일을 합니다. (2049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순종적인 신모델이 출시되고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구모델만이 블레이드 러너가 쫓는 대상이 됩니다)


82년작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이 되는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는 아주 높고 빽빽한 고층건물로 뒤덮여 꼭대기층을 제외하고는 빛이 닿지 않는 어두침침한 골목에 화려한 전광판 스크린과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디스토피아 사이버펑크 배경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배경이 전형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수많은 작품이 이 영화로부터 레퍼런스를 차용했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굉장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인 듯합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컨트처럼 많은 SF작품에서 AI, 복제인간 등 다양한 '인조인간'들이 인간과 어떻게 다른가, 인간성을 지닐 수 있는가, 인간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다루어져 왔습니다. 영화 속 레플리컨트들은 수명이 짧고, 기억을 통해 감정을 누적하지 못해 감정을 이해하는 데 미숙하다는 점에서 인간과는 다르다고 여겨져 왔으나 그들이 보여주는 협력하고 공감하며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태도, 삶에 대한 열망은 작중 블레이드 러너인 주인공 데커드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를 그들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오래전부터 SF의 화두였던 논점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생각해 볼 참신한 주제는 아닌 것 같아요. 물론 현재에도 같은 인간 사이에도 위계를 나누고 차별하고 타자화하는 사태가 사회적으로 만연하기 때문에 유효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작품이 반복된다면 뻔하긴 할 것이란 말이죠.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오랜 세월 후에 나온 작품인 만큼 이전 작과는 확연한 차별성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시도였다고 봅니다. 같은 세계관, 비슷한 인물들, 비슷한 결의 주제를 이어 가면서도 생각의 층위를 한층 깊게 만든 영화인 것 같아요.

 


이어지는 내용은 필자의 매우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전작은 인간인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들을 쫓으면서 그들과 상호작용하며 인간과 레플리컨트 사이의 벽을 허무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레플리컨트와 사랑에 빠지고, 자신이 쫓던 적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살아온 그가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후속작에서 주인공 K는 본인이 레플리컨트이기 때문에 완전한 레플리컨트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데커드의 정체도 모호하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그가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레플리컨트일지도 모르는 인간의 이야기(데커드)와 인간일지도 모르는 레플리컨트의 이야기(케이)를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기억이 모두 진짜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진짜 인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내 기억은 사실 이식된 것이고 진짜라고 믿었던 내 자신이 가짜라면?' 하는 상상 또한 가능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 스스로를 당연히 가짜라고 믿어왔다면'이라는 뒤집힌 전제에서, 가짜인 존재의 시점에서 진짜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 상상하는 관점은 정말 신선한 발상의 전환인 듯해요.


전작에서 레플리컨트들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존재이지만 2049의 레플리컨트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레플리컨트인 것이 당연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동경하는 꿈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본질을 흔드는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는 것이죠. 자신과 인간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 '다름'이 실제가 아니라 믿음 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일 수 있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렇게 두 영화를 통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경계에 선 자를 비교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고 즐거웠어요. 블레이드 러너라는 제목이 실제 이런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두 존재 사이에서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경계를 달리는 자의 아슬아슬함이 느껴지는 제목인 것 같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케이는 레플리컨트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전편에서 서로 사랑하게 된 데커드와 레이첼의 아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휩싸이고, 자신이 맞다는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그 확신은 틀렸음이 밝혀집니다. 케이는 그 아이의 기억을 이식받은 평범한 레플리컨트일 뿐이었지요. 그의 기억은 그의 것이 아니었고, 그러므로 데커드와 그는 관계있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데커드를 죽여야 하는 명령을 거부하고 데커드가 자신의 진짜 딸과 만나게 해 줍니다. 케이는 스스로 선택해서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가 진짜 아들인지 아닌지는 그의 선택 앞에서 크게 의미가 없어집니다.


케이의 정체성이 영화에서 한 번 두 번 뒤집히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인간과 같이 태어나서 경험을 통해 기억을 확득하는 존재인지, 가짜 기억을 가진 레플리컨트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이렇듯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들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레플리컨트를 만드는 인간의 입장에서 데커드와 레이첼의 아이는 레플리컨트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저주와 같고, 레플리컨트들의 입장에서는 기적이자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그들의 의미 부여에는 '태어난 아이'가 '만들어진 존재'보다 상위에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케이는 그 전제를 깨부수고 주인공의 자격을 갖는 인물입니다. 태어난 아이인 줄 알았다 다시 만들어진 존재의 지위로 돌아갔으나 어디로도 추락하지 않았으니까요.


데커드와 레이첼의 진짜 딸은 어떠한가요, 그녀는 유전적 질병으로 평생을 무균실 안에서만 실제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상상력으로 기억을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진짜 인간'인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홀로그램으로 된 가짜 세상이 그녀의 삶 전부입니다. 케이와 사랑하는 사이로 나오는 인공지능 '조이'는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존재이고 육체 없이 홀로그램으로만 존재하지만 진짜 사랑을 했고, 데커드는 레플리컨트들을 도우며 레플리컨트와 가장 가까운 삶을 살지만 자기 자신이 진짜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을 '무엇'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레플리컨트도 인간인가?, 가짜 기억도 진짜 기억과 다르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에는 질문을 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질문의 대상은 여전히 우리가 아닌 타자이고, 타자에 대한 판단은 직접 그들이 되어보지 못한 채 우리 마음대로 내리는 판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타자의 지위를 동등하다고 결론 내리더라도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나누고,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경계선의 존재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향하는 시선이 존재하는 이상 위계의 차이가 생기므로, 질문하는 것 자체를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


잉태된 생명이 기술로 만들어진 것보다 낫고, 만질 수 있는 형체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고, 직접 기억을 획득하는 것이 주입된 것보다 낫고, 현실이 상상보다 낫다는 모든 전제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어떤 이름으로 정의 내리기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좋았던 점은 바로 이러한 태도였습니다. 개를 보고 진짜냐 가짜냐 묻는 질문에 데커드가 무슨 상관이냐 했던 것처럼. '가짜라도 진짜가 될 수 있다'가 아닌 '가짜든 진짜든 그래서 무슨 상관이지'하는 영화라서요.


정말로 '뭐가 상관이지'가 되려면 케이의 정체도 하나로 결론지어지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케이가 진짜 아들이다 아니다로 소모적인 논쟁은 계속되었을 것 같아요. 아직도 데커드의 정체를 가지고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것을 보면... 왜 이렇게들 일부러 모호하게 남겨두려고 하는 것들의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요!



SF가 매력적인 점 중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벗어난 더 넓은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평소에 갇혀 있던 관점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것 같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도 그러한 관점의 전환을 일으키는 명작이라고 생각하지만 2022년 현재 그대로 같은 이야기를 하기에는 조금은 식상해진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한번 더 관점을 비튼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저는 정말 만족스러웠어요. 후속작이 나와 줬기에 전작 또한 더 돋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을 너무 믿고 본 까닭일까요.. 비판할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또 좋았던 점 위주로 말하고 넘어가게 되네요. 82년작만 따로 분석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이렇게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 넘어가서 아쉽습니다..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도 꼭 읽어 보고 싶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하이 라이프 (201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