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사는 빈민 구제
1598년 11월 경당 장흥효와 안동 권 씨 사이에서 장계향은 태어났다. 1610년에 시 [성인음][학발시][경신음][소소음] 등을 지었다. 그리고 1616년 이시명과 혼인해 시댁인 충효당에서 생활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1640년에 재산을 남겨두고 영양 석보촌 두들마을로 이사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을 했다. 그리고 1659년에 어릴 때 쓴 시 [성인음] [소소음]을 이시명이 붓글씨로 적고 아들 휘일의 아내가 수를 놓아 재령 이 씨 집안의 전가보첩을 만들었다.
1670년에 음식 디미방을 완성했으며 1674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1689년 8월 아들 갈암 이현일이 이조 판서 관직에 올라 그 어머니 자격으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초겨울로 접어들어 안동 금계마을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계향의 아버지 흥효는 아침 일찍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내인 군 씨에게 산통이 왔기 때문이다.
흥효는 마음이 뭉클했다. 아이 없이 지내 온 세월이 18년이란다. 얼마나 귀한 자식인가? 옛날엔 아이를 못 나으면 칠거지악 중 하나라고 했다. 그중 아들을 낳지 못하면 그 죄는 더욱 거대한 바위 같았다.
학봉 김성일은 흥효의 스승으로 서애 유성룡과 조정에서 관직을 하던 사람들이다. 유성룡은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전쟁터에서 적의 포탄에 맞고 전사하던 11월 19일. 영의 정 관직에 있던 유성룡도 같은 날 쫓겨났다.
이런 울적한 날에 흥효에게 태어날 아이는 기쁨이었다. 그날이 11우러 24일 특별한 축복의 날. 하늘이 더 파랗더란다.
[춘계문답]에 나오는 왕유의 시처럼 딸이라 하면 봄꽃이라 생각할 터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강해지고 그 향기도 좋은 계수나무 계자를 써서 계향이란 이름을 지었단다. 생강과 계수나무는 껍질이 오래될수록 매워지는 성질이 있다. 심지가 곧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단단한 아이란다.
계향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흥효를 잘 따랐다. 특히 아버지가 책을 읽을 땐 책 읽는 소리를 잘 흉내 냈단다.
계향은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어머니, 왜 냉이는 뿌리까지 먹고 쑥은 이파리만 먹어? 하며 끊임없이 물어보는 아이였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계향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고 큰 소리로 따라 읽도록 했단다. 천지현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우주홍황 : 우주는 끝없이 넓고 크다.
여섯 살이 되자 계향은 동갑내기 단짝 친구가 생겼다. 이웃집 김처사(벼슬을 하지 ㅇ낳고 시골에 살던 선비) 댁 딸 귀복이었다. 귀복은 남루한 옷차림에 늘 굶주린 아이였단다. 김 처사는 계향의 집인 경당가로 와서 곡식을 얻어 가곤 했단다. 계향은 배고하하는 귀복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면서 친구가 되었다.
귀복이 엄마는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죽고 오라버니도 전염병으로 죽었단다. 조선 천지에 전염병이 돌아 집집마다 죽은 사람들도 늘었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염병' '염병'하고 욕을 하며 저주를 퍼부었단다.
과진이내 채중개강. 해함하담 잠우상. 이 말은 과일 가운데 진미는 자두(자두)와 능금이요, 채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겨자와 생강이라, 바다는 짜고 강물은 싱거우며, 비늘 달린 물고기는 물에 잠기고 깃 달린 새는 높이 난다.
어느 날 계향의 집에 홍효롸 함께 동문수학하던 벗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나라 걱정에 시름이 깊었다. 왜란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임금은 여전히 우왕좌왕, 백성들은 먹을 게 없어 굶어 주고 조정 대신들은 백성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욕을 내세워 당파 싸움에 몰두했다.
계향의 어머니는 오미자 착면을 만들어 여르날 시원하게 드리라고 아버지에게 드리곤 했단다.
녹고 가루로 앙금을 내고 묵을 만들어 국수처럼 썬 뒤, 오미자 국물 우려낸 것을 부어 잣을 띄운 음료란다.
아홉 살 때 계향은 아버지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이런 서실[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에서 계향은 소통파 [적벽부]를 붓글씨로 쓰거나 퇴계 이황의 시들을 좔좔 외웠단다.
계향은 할머니가 슬퍼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발시]라는 시를 지었다.
백발노인이 병에 지쳐 누웠는데, 자식은 만리 밖에 있구나.
자식은 만 리 밖에 있는데 어느 세월에 돌아오려는가.
왜란을 보면서 자란 계향은 남자 유생들과 공부를 하면서 구제에 대해 생각하며 자랐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 구제사업을 계향은 경의 실천이라 했다. 음식은 그 사람이라며 많은 허약한 늘 기력이 없고 손발이 시린 사람을 구제하는데 힘쓴 사람이 바로 장계향이었다.
난 어제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를 다녀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봉사를 다녀와 내가 조금 힘쓴 일을 너무 자랑하는 나를 말이다. 내가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를 시작한 건 작년부터다. 그러나 이 일을 하기 앞서 난 독거노인들에게 반찬 배달을 약 10년간 했다.
그런데 말이다. 어제 그 수혜자가 한 명 더 늘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음성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현괄 문고리에 반찬을 걸어 두고 오는 내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이 시대에는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너무나 복잡하고 위태롭다. 마치 임진란 때 왜적이 들어오는 것보다 더한 시국이 아닌지 모르겠다. 난 이 글을 쓰면서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얼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