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비가 내린다.
며칠째인지 모를 장마에 영주는 신경질적으로 이중창을 닫았다. 꽉꽉 걸어 잠그자 빗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안 그래도 날씨에 영향을 받는 편인데 계속되는 흐린 날씨가 우울함과 함께 편두통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하던 일은 마무리해야 했기에, 그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실상은 사생활과 일이 분리되지 않는 느낌이 강했다. 한창 바쁠 때에는 집에서조차 온전한 휴식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지금 하는 작업만 마무리하면 모든 일이 끝이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작업을 끝마쳤다.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영주는 잠시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다가 느릿느릿 일어났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텅텅 비어있었다. 며칠 내내 바쁘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느라 온 정신이 쏠린 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냉동고에는 먹다만 냉동만두라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으나 황폐하기까지 한 빈칸들 뿐이었다. 찬장을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 하다못해 끓여 먹을 라면 하나, 거기에 깨 먹을 계란 하나도 없다니.
인상을 쓰며 찬장과 냉장고 안을 노려본들 갑자기 먹을거리가 생겨날 리 없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빗줄기를 뚫고 나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영주는 배달앱을 켰다.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메뉴를 보다가 삼겹살과 목살을 시켰다. 요즘은 고기를 구워서 배달해 주기도 하니 참 편하다. 주문 후 잠시 동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져,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보니 40여분이 지나 있었다. 편두통은 잠을 많이 못 잔 탓이었는지 조금 나아져있었다.
영주는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멍하니 눈을 껌뻑이다가 혼잣말을 했다.
“배달 음식 왔겠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음식은 오지 않았다. 그가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에서 취소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좋지 못한 기상상태로 인한 배달 불가.
다시 한번 다른 가게에 비슷한 메뉴를 주문했지만 이번에도 취소를 당했다. 다른 메뉴들도 마찬가지였다.
영주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설을 중얼거리며 외투를 챙겨 입고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오니, 밖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차를 끌고 마트를 갈까, 생각했으나 마트에서 장을 볼 기운도 없었거니와 그 많은 사람들 틈을 헤집으며 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편의점이었다.
영주의 집에서 편의점까지는 7, 8분 거리였다. 우산을 펼치고 걷기 시작하자마자 발이 비에 폭싹 젖어버렸다. 그는 이 느낌을 싫어했다. 다시 한번 욕설을 중얼거렸다.
편의점에서는 내일까지 먹을 과자며 즉석밥이며 라면 등을 바리바리 샀다. 맥주도 몇 캔 샀다. 양손이 무거운 채로 우산까지 들고 돌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빗소리가 어찌나 큰지 전화벨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어찌어찌 힘겹게 전화를 받는 데 성공했다. 멀리 살고 계신 어머니의 전화였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우산을 놓칠 뻔하는 바람에 머리가 반쯤 젖어버린 건 덤이었다.
그는 욕설을 꿀꺽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머니?“
”응, 영주야. 너 밖이니?“
”네, 소리가 잘 안 들려요!“
”그래, 그렇겠다! 넌 이렇게 비가 오는데 밖엘 나갔니? 어릴 때도 비 오는 걸 그렇게 좋아하더니.“
”네? 제가요?“
빗소리에도 짜증을 부린 게 바로 한두 시간 전인데. 황당해진 영주가 되물었으나 어머니는 잘 못 알아들으신 듯했다.
”비 너무 맞지 말고, 감기 걸릴라! 얼른 들어가.“
”네, 집에 들어가서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는 전화를 끊고 짐 무게에 후들거리는 팔로 간신히 주머니 속에 휴대전화를 넣는 것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나머지 머리까지 젖어버린 것에는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뭔가를 반쯤 포기한 상태로 그는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아까와는 다른 골목으로 집을 향해 가는데, 어디서 높은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하하하!“
”얍! 얍! 얍!“
첨벙, 첨벙!
아이들이 잔뜩 고인 빗물을 밟으며 놀고 있었다. 서로 튀기며 장난치느라 비옷이 흙탕물로 엉망진창이었다. 남매인지 신고 있는 장화가 색만 다를 뿐 같은 것이었다.
저게 뭐 하는 짓이람.
영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애들이 노는 양을 지켜보며 계속 걸었다.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이미지에 그는 발을 딱 멈추고 말았다.
노란 비옷, 거꾸로 널브러진 우산, 물웅덩이, 혓바닥을 때리던 비의 감촉…….
어릴 적 자신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