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

by 한소로


쏴아아아.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늦여름 저녁의 더위 대신 서늘함을 가져왔다. 빗소리가 조용한 가운데 요란하다. 이런 날이면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뒷모습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그렇다, 뒷모습이었다. 우진은 그녀의 뒤에 서있는 것이 익숙했다.


그녀는 비를 좋아했다. 빗소리가 음악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할 때 가장 큰 창문에 가면 어김없이 먼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러 인기척을 내며 다가가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우진은 그녀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특출 난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투명한 피부와 우수에 찬 듯 서늘하고도 조용한 분위기가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오늘 저녁의 기온처럼, 기분 좋은 서늘함이었다. 우수에 찬 듯 보이는 것은 조금 처진 눈꼬리가 처연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내리는 빗줄기 속을 바라보는 그 눈을, 우진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왜 나는 안 돼?'


불쑥 물어보자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고백의 대답이 웃음이라니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목덜미까지 벌게진 우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에도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은 우진을 정답게 여기는 게 느껴지는 웃음이기 때문이었다. 조금 귀엽다는 듯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네가 언제쯤 알게 될까.'


그녀는 우진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오빠."


우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자애들이 종알댔다.


"또 창밖 보시네요."


"비 오는 거 진짜 좋아하시나 봐요."


"냅 둬, 청승이야."


마지막 말은 우진의 여동생인 유진이 한 말이었다. 우진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다 먹었어?"


"아까 다 먹었거든."


"그럼 나갈까?"


유진과 친구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유진과 승희는 화장실에 갔다. 테이블에는 지연과 우진만이 남게 되었다.


지연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우물거리듯이 말했다.


"저희 이제 영화 보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오빠?"


우진은 가볍게 지연의 앞이마를 툭 쳤다.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이제 선생님 아니잖아요, 과외도 끝났는데."


우진은 2년 정도 여동생 유진과 승희, 지연에게 과외를 했다. 여덟 살이나 되는 나이 차이임에도 동생의 친구들과 친밀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릴 적부터 봐온 아이들이기에 뭘 하든 귀엽게 생각되었다.


지연이 앞머리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이제 저희 대학생이니까 성인이라구요······."


우진을 올려다보는 눈이 말갛다. 커다란 눈동자가 작은 희망을 품고 반짝거리며 우진을 담고 있었다. 감정에 솔직하고 금방 발그레해지는 뺨이 귀여운 아이다. 우진은 그만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왜, 왜 웃으세요?"


우진은 대답하지 않고 손으로 지연의 앞머리를 흩어놓았다.


"아, 선생님!"


지연이 그의 손을 피하며 앞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그 사이에 유진과 승희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곧 영화를 보러 나간다며 일어섰다. 자리에는 우진만이 남게 되었다.


밖으로 나가며 다시 한번 뒤돌아 꾸벅 인사하는 지연에게 우진은 손인사를 했다. 찰랑찰랑한 긴 생머리가 눈에 어른거리며 잔상을 만들었다.


"네가 언제쯤 알게 될까······."


우진은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녀가 그때 왜 웃었는지 알고 있었다. 쏴아아아, 시원한 빗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창가에 앉은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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