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지속하는 사람들의, '운영진이 버린 망겜 왜 하세요?'에 대한 답
> 도대체 무슨 영화? (누구에게 추천하는지)
몇 년째 새 글이 올라오지 않는 블로그, 초등학생 때 그 말투로 남아있는 싸이월드 게시판, 옛날에 활발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아 광고성 글만 올라오는 카페, [지금까지 사랑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기한이 적힌 서버 종료 공지사항 …. 한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황폐해진 온라인 공간을 볼 때면 얼른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폐교된 모교를 추억 여행하듯 찾아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추억했던 것들이 그 자리에 더는 없고 심지어 같이 기억해주는 사람조차 없다는 걸 깨달을 때면, 조회수 1이라는 숨죽인 발자취만 남기고 떠나게 된다. 그게 우리가 한 때 향유했으나 폐허가 된 온라인 콘텐츠를 대하는 대부분의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버려진 옛날 게임을 쭉 해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추억을 다시 소환하는 레트로 감성이 아니라, 과거부터 지금까지 현재 완료 진행형인 사람들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용기를 내고 넥슨과 유저 간담회까지 열어서 12년 만에 패치를 일궈내는... 아니 심폐 소생하는 이야기다. 일랜시아라는 게임을 몰라도 한 때 고전 RPG 게임에 대한 향수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며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의 게임에서 종종 추억을 찾는 사람들에게 모두 보라고 하고 싶다. 우리가 외면한 폐허를 용기와 애정으로 가꿔가는 사람들의 진심을 보면, 유튜브에서 추억의@@겜 영상을 찾아보는 것보다 훠어얼씬 더 유의미하게 눈물과 웃음을 얻을 수 있다.
이 영화의 큰 매력 중 하나는 일랜시아 세계와 그 유저들 특유의 체념적인 유머다. 아무래도 게임 화면과 사람들의 인터뷰 장면을 오가다 보니 그 편집 점마다 내레이션 자막이 진행되는데, 이게 관찰일지 같은 느낌도 나고 해탈한 일기 같은 느낌도 난다. 왜냐면 대부분의 웃음이 사실의 나열에 가까워서.... 일랜시아는 배경음악을 켜면 겜이 튕긴다고 한다. (ㅠㅠ아) 하....... 하여튼 러닝타임이 80분 정도로 짧은 영화긴 하지만, 이 유머와 재치의 힘으로 토막토막 난 장면들이 수월하게 넘어간다. 자신의 소중한 망한 게임을 소개하는 장면들에서 교차하는 체념과 해탈과 끈기 있는 사랑을 봐주세요.
> 영화의 주제
영화는 취업난을 겪는 2030 세대의 공정성에 대한 갈망, 200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자본주의화되며 소수의 고자본 유저들을 타깃으로 굴러가는 사행적인 게임계 분위기, 행복에 대한 태도, 가상공간에서의 친구관계의 유효성 등을 모두 진지하게 다룬다. 일랜시아 유저들 인터뷰에서부터 확장되는 이 이야기들은 뜬금없이 무게 잡고 싶어서 심오 있어지는 게 아니다. 버려진 낙원에 몰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증언으로서 터져 나올 뿐이다. 아무래도 흔히 게임에 대한 이미지나 속성은 빡빡하고 경쟁적인 삶과 대조되는 휴식과 놀이일 것이다. 그러나 게임에서도 이제는 노력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정도의 경쟁은 피할 수 없고, 거기서 오는 피로감이 기존 게임과 신규 게임을 모두 갉아먹고 있다는 것도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순수하게 게임을 즐겼던 추억을 그리워한다면? 혹은 더 이상 그 사행성에 대한 회의감에 못 이겨 이 망가진 게임계를 개선해나가겠다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다면?
… 이렇게 말하니 이 주제에 대해선 이미 전자오락 수호대가 밀도 있고 재밌게 다루고 있는 거 같네. 실제로 전오수와 이런 용기와 게임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에 대한 궤를 함께하는 작품이 이 영화인 것 같다. 유저들의 인터뷰뿐 아니라, 개발자들(대부분 前자를 붙이고 나오신 분들이었지만)의 인터뷰에서도 그렇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게임회사 노조 개발자의 인터뷰다. 왜 노조를 하느냐, 라는 질문에 회사가 아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니까, 조금만 고치면 좋겠다는 애사 심이다.라는 답. 그리고, 노조를 설립할 때 용기 내는 것이 힘들었지 않았느냐 , 하니까.... 용기는 필요 없어요. 하고 담백하게 웃던 장면 같은 것.
어떤 부정의에, 아니 설사 의도적으로 악인이 행한 부정의가 아닌 관례나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과정은 참 멋진 일인 것 같다. 비록, 내언니전지현은 사재기꾼이고 일랜시아의 모든 유저들은 매크로를 기본으로 깔고 하지만 말이다. 버려진 세계라면 나름 아포칼립 스니까 소소한 수준의 범죄는 적응의 수단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 세계는 매크로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어중간하게 건드렸다가(패치했다가) 들쑤시면 오히려 더 안 좋지.' 같은 말을 하면서도 간담회를 위해 문제점과 개선방안 등을 차분히 정리해가는 그들의 대화에선 비장함이 느껴진다.
남들은 전부 추억으로 넘기고 막상 과거와 달라졌을까 두려워 들여다보지 않는 것을, 이 사람들은 지속하며 삶으로 이어하고 지내고 있다. 여기서 어떤 대가 없는 사랑과 용기를 느끼는데, 사실 용기는 외부자인 나의 시선이고 당사자들은 즐거움이 클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오랜만에 해볼까' 하는 그 시작점에서는 분명히 이 쓸쓸한 게임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겠노라는 비장한 각오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 영화가 자신의 속에 쌓아둔 수많은 주제 중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그렇게 느껴진다) 였을 감독에게도 분명 그런 각오의 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좋았다고 쓰고 싶었다. 추억을 과거에 두지 않고 지속하는 용기는, 영원을 약속할 수 있는 로망 어린 사랑의 근본 같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