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재난 아포칼립스에서, 감독이 죽이고 살린 인물들의 경계는 무엇일까.
별점: ***.5 (3.5)
무언갈 보거나, 듣거나, 마주하면 죽는다. 최근 <콰이어트 플레이스>, <버드 박스>, <레인> 등 이러한 설정의 영화가 많이 나온다. 일종의 지구종말 재난영화다. 기존의 <투모로우>나 <노잉> 같은 영화들이 거대한 자연재해로 인한 종말이었다면, 최근에 나온 이들은 자멸에 가까운 종말이다. 두 종말의 공통점은 아포칼립스 재난 상황에서 생존하려는 인물들의 욕구와 행동이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중심 축이라는 것이다. 또한 죽음을 피부에 가깝게 느끼며 동반되는 스릴 또한 큰 공통점이다. 그러나 두 종말 간엔 차이점이 명확하다. 자연재해로 인한 종말 영화는 재난의 거대한 스케일과 액션에 집중하는 반면, 갑자기 일상을 잃은 재난 상황의 종말 영화들은 대부분 극한에 몰린 인간 군상에 집중한다. 그중 <어둠 속으로>는 후자, 즉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인간들이 어떤 행동 양상을 보이느냐, 어떤 갈등을 보이느냐를 다루는 쪽이다. 특히 '보거나 듣거나 마주치면 죽는' 도구를 이용한 재난영화 중 하나이다. 이를 '오감재난 아포칼립스' 라고 멋대로 칭하겠다. 그중 <어둠 속으로>는 태양광, 즉 낮을 마주하면 죽는 설정을 가졌다.
아포칼립스 상황 속 인물들의 갈등, 심리싸움은 귀엽게 말하면 좌충우돌이고, 현상을 집어 이야기하면 정치다. 스케일 빵빵한 블록버스터 액션이 아닌, 죽음을 직면한 인간들의 갈등과 정치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장르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분명히 '할 말' 이 있을 것이다. 정말로 이것은 드라마다. 우린 뭘 느껴야 할까? <어둠 속으로>는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적어도 나는 이 답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찾으려 했고, 찾으려 했기 때문에 일단 찾았다. 왜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말하는진 끝까지 보면 아실 것이다.
<어둠 속으로>는 출발 전 비행기에 테렌치오라는 남자가 비행기를 납치하며 시작된다. 태양광을 보면 죽으므로, 러시아행 비행기에 탄 승객들은 엉겁결에 빛을 피해 끝없는 어둠 속으로, 서쪽을 향해 비행을 떠난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 비행기 안에서 대화하고 갈등하는 장면, 그리고 기름을 채우기 위해 내려 급하게 공항 주변을 수색해 다니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정적인 배경 속에서 인물들의 정치를 그려내며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자꾸만 각 인물의 과거와 배경을 꺼내온다.
솔직히 말하면 1화는 설정이 흥미로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 좀비물을 보는 이유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어서 보듯이 (물론 성찰을 찾아내는 것은 관객들의 역량이겠으나..) 나도 오우 다 죽는 종말 영화가 보고 싶은 걸 하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틀었다. 얘넨 빛 보면 죽는대! 하고. 그리고 2화부터 5화까지는 흥미로운 소재 빨로 버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루했던 거다. 각 인물들을 조명할 때 내가 큰 흥미를 못 느낀 탓도 있었다. 각자의 사연들을 어색하면서도 허심탄회하게 줄줄 얘기하는 승객들의 대화가 나는 달갑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가벼운 거 보려고 빛 보면 죽는대! 하고 들어왔는데, 그 죽어야 할 사람들의 죽음을 앞두고 스릴 넘치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력을 하나하나 조명하니까 조금 지루했다. <부산행>에서는 좀비가 된 사람과 좀비가 될 사람으로 나뉠 뿐이었지 않나. 그런데 이곳은 12명의 인물들의 삶을, 그것도 각 인물의 말과 선택으로 전부 보여주고 있으니, 액션을 기대한 아포칼립스로선 지루할 수밖에. (시체가 나와도 대부분 피도 별로 안 튀기고 얌전하게 누워있다.)
(여기부터 스포 주의!)
그러나 이러한 감상은 마지막화에 이르러 무척 흥미롭게 돌변했다. 지하 벙커를 목전에 두고 어이없게 손목이 수갑에 묶여, 결국 빛 앞에 두 발로 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 테렌치오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화는 사실 개연성이 엉망이다. 머리가 다쳤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전대를 꺾어 사고가 나는 것부터, 사고로 인해 이탈된 후발팀이 해뜨기 3분 남았다는데 타이어를 뜯어내고 부랴부랴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을 넘고 한참을 걷는데도 용케 3분이 안 넘었다는 것, 그 무리한 과정에서 후발팀 아무도 다치거나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 벙커가 돌로 내려치니까 문 열리는 것 …. 이렇게까지 인위적으로 의도한 결과물이 뭘까? 너무나 명확하다. 테렌치오의 죽음이다. 테렌치오는 그냥 길 가다 이탈되어서 죽은 게 아니다. 그는 다른 승객과의 갈등으로 그를 때려죽일 뻔했으나, 살아 돌아온 그로 인해 죄를 갖게 된 인물이다. 그 죄로 인해, '버튼을 누른 채로 기다려야 철조망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에' 후발팀을 위해 수갑을 차고 버튼을 누르며 기다리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이탈된 팀이 하필 사고가 났고, 하필 길을 잘못 들었고, 하필 되돌아서 올바른 길을 가는 대신 부랴부랴 해결해서 가버리는 탓에, 그러니까 이 엉망인 개연성의 끝에 그는 뜨는 해를 보고 죽는다.
이렇게까지 개연성을 망쳐서라도 죽여야 했던 그의 죄는 무엇일까? 버튼에 수갑을 채우게 된 죄는 단순히 살인 미수하고 숨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해서 전달하고 싶었을 주제의식이 그의 죽음이라 생각해보면, 메타적으로 그의 죄는 '기득권적 마초성'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의 명대사를 '살면서 주도권 한번 잃었다고 징징대는 백인 남자 무리라니'라고 뽑는다. 저 대사를 흑인 여성이 발화한다는 점에서도 이 영화는 인종차별에 대해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배경에는 벨기에 영화라는 동유럽권의 배경과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아이덴티티가 한몫했지 않나 싶다. 다만 작중 내에서 인물의 입을 빌려 발화되는 직설적인 표현의 단점이 으레 그렇듯 '과도한 사이다 기믹'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저 대사를 제외하면, 재난 상황 속에서도 정치질(주도권 싸움)을 하고 싶어 하는 백인 남성들의 모습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그렇게 스토리의 전개와 흐름을 만들다가, 어디서 직설적으로 이를 터뜨리느냐? 테렌치오의 죽음이다. 마초성의 죄로, 약자들(이탈된 팀)을 기다려 돕고 함께 살아남아 오는 벌을 받는 것. 그리고 그 약자들에게 의도치 않게 버림받고 쓸쓸하고 분하게 태양 앞에 서서 죽게 되는 것. 허무할 정도로 그에게 매몰찬 엉망인 개연성은, 비행기를 강탈하고서 까지 살아남고 싶었던 그를 벙커를 코앞에 두고 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렇게 시나리오 처음부터 분명 죽음이 예정된 존재였으리라.
물론 이 의견은 나의 한 가지 가설에 가까운 주장일 뿐이다. 영화는 인종차별을 은유에 가깝게 한 겹 아래에 숨겨 드러내고 있으며 (일단 인물들의 목표는 인종차별 철페가 아니라 태양광으로 부터의 생존이므로.), 앞서 죽은 다른 인물들이 모두 마초성을 가진 탓에 인과응보를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아이를 임신했고 성실하게 승객들을 위해 봉사한 승무원 가브리엘은 범죄자들을 낙오시키려다 엉겁결에 함께 버려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주장을 쓰게 된 이유는 테렌치오의 죽음이 마지막화에 위치해있었으며, 그의 일대기적으로 보여준 삶의 목적성이 너무나 명확했고, 무엇보다 영화의 개연성이 구린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으로>는 못 만든 드라마는 아니다. 스릴을 즐기기에도 손색없고 인물들의 개성도 뛰어나서, 처음엔 '내가 (주인공 아닌) 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왜 알아야 해?' 하다가도 '아 그래서 저런 선택을 쟨 하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비일상을 다루는 아포칼립스물임을 감안해도, 마지막화의 개연성은 의도적으로 엉망이었다.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관객이 이입하고 마침내 공감해서 내재화하도록 만드는 영화가 훌륭한 영화라면, 이 영화는 자연스러움에 대해선 확실하게 실패했다. 아마추어 작가가 이런 장면을 쓰겠어! 하고 보고 싶은 장면을 정해놓고 그 앞까지 연결이 안 되어서 지지부진하게 잇는 억지 장면을 쓰는 순간이 오버랩된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테렌치오의 죽음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아주 즐겁게 보았다.
그의 죽음이 마음에 든 이유는 단순히 이 영화가 마초성을 가진 백인 남자를 '죽여서'가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은 아무도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음에도 결국 그가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에는 정녕 손에 수갑까지 채웠을지언정 고의성이 없다. 고의적이지 않았음에도 죽음을 당하는 일은 약자들에게 너무나 흔한 일이지 않나. 약자가 강자로 탈바꿈해서 살인을 수행하는 존재로 심판하는 거였다면 이렇게 흥미롭지 않았을 텐데. 이 영화가 테렌치오에게 가혹하게 주고 싶었을 죽음의 '경험' , 그 속성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되돌아가 '오감 재난 아포칼립스'가 갖는 고유한 특징이라고도 생각했다. <버드 박스>의 마지막은 안전하게 살아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마지막 낙원 향처럼 느껴지는) 시각장애아동 학교를 발견하고, 주인공은 두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독립된 타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끝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주인공 가족은 청각장애 아동이 구성원인 가족이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데에 유리한 방법을 터득한다.
아포칼립스는 비일상이 전제된 공간이다. 그중 기존의 거대한 자연재해 아포칼립스 물은 누구에게나 재해가 공평해 보이지만, 실은 돈이 많은 권력자들이 방주를 타거나 벙커를 마련하는 등 기득권의 유리함을 배제하지는 못했다. (혹은 주인공이니까 살아남았다.) 이는 수많은 좀비물도 마찬가지다. 반면, 오감을 잃은 최근의 아포칼립스에선 애초에 일상에서 배제되었던 인물들이 생존하는 데에 유리한 구조를 가진다. 애초에 일상에서 배제된 자들이었기 때문에, 비일상에 훨씬 더 능란하게 적응하고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어둠 속으로>와 완전히 매치되지는 않는다. <어둠 속으로> 역시 운 좋게 비행기에 타게 된 소수의 승객이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그러나 <버드 박스>와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장애를 결여가 아닌 능력으로 대하는 주제의식을 가진다면, <어둠 속으로>는 인종차별 상황 속에서 주도권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모색하는 '비 주도권자' 들의 행동으로써 주제의식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일상의 세계 속에서 굳이 일상적인 것을 재생산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 일탈적인 파격이 우리를 기꺼이 '어둠 속으로' 이끈다. 테렌치오는 빛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죽었지 않나. 어쩌면 기꺼이 어둠 속으로 소속되자고, 찬란하게 북돋아주는...... 영화까진 아닌 것 같지만. 이 엉망진창의 마지막을 적어도 흥미롭게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즐거운 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