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브라이오니다.
이 영상의 경지에 이른 아름다움과 공들임은, 늙은 브라이오니가 '고백하고 기록하며 참회' 하는 데에 '소설 쓰기'의 방식을 취한 것과 통일된다. 즉, 주인공 브라이오니의 자전적 소설에 대한 설득력을 위해 아름다운 영상미가 필요했다고 봤다.
어톤먼트는 스토리가 어렵지는 않다. 굉장히 심플한 편이다. 서로를 짝사랑했던 씨와 로비. 씨는 저택의 딸이고 로비는 그 집에서 일한 정원사의 아들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보내며 마음을 키워왔고, 로비가 케임브리지 의대에 진학하고 그만큼 떨어지고 나서야 각자의 마음을 지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발견한 어느 젊은 청춘남녀들이 그렇듯 정열적으로 사랑을 속삭이려 한다. 그러나 그 시작점에서,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어린 브라이오니의 시선으로 관객들은 이 젊은 남녀의 서투른 사랑을 목격하게 되고, 13살 아이에게 다소 날것으로 노출되어 버린다. 그것이 13살 브라이오니에겐 질투, 질투 이전에 '성'에 대한 공포로 이어진다. 결국 오해의 골을 해결할 새도 없이 폴 마샬이 브라이오니의 사촌 롤라를 강간한 사건에 대해 범인으로 로비를 지목하게 되면서 씨와 로비는 사랑을 확인하자마자 생이별을 하게 된다. 애타는 마음을 포기 않고 씨는 간호사가, 로비는 감옥에서 군인으로 축출되어 전쟁터에 나가게 되며, 끝내 둘 다 전쟁의 여파로 소망하던 재결합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이후 자신의 어린 날 치기 어린 진술을 후회한 브라이오니는 간호사로 일하며 속죄하듯 삶을 살다가, 소설을 쓰게 되고 이내 가장 첫 작품으로 시도한 씨와 로비의 이야기를 노인이 되어 마지막 작품으로 쓰며 속죄의 인터뷰를 한다.
시간선이 단편적으로 뒤섞인 이유
이 영화는 시간선이 아주 어렵지 않게 단편적으로 뒤섞여 있다는 특징이 있다. 관객에게 사건의 선후관계를 한번 되짚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를테면 다짜고짜 분수대에 들어가 홀딱 젖어 나온 씨와 그 앞에 선 로비의 정원에서의 장면을 브라이오니의 시선으로 보았을 땐 '둘의 맥락'을 이해할 수 없다.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젖은 씨의 모습은 조금 선정적이고, 둘의 관계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 뒤, 씨와 로비의 시점에서 다시 그 장면이 되풀이되는데, 둘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근한 관계이며 씨가 분수대에 들어간 것은 화분을 깨 먹어서 그 조각을 찾아오느라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이다. 그 장면에서는 씨와 로비의 이면적 관계 아래에 로맨스적 텐션이 있음을 느낄 수 있고, 씨가 조각을 찾으러 기꺼이 잠수하는 것은 사랑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기꺼이 간호사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저돌적인 성격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영화의 단편적인 시간 뒤섞임이 반복되는데, 후반에서 '브라이오니가 씨와 로비가 사는 빌라에 찾아와 자신이 잘못된 진술을 했던 데에 사죄를 하는 장면' 이 사전 설명 없이 (씨와 로비의 재결합에 대한 과정 없이)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이게 꿈이야? 진짜야? 하는 식으로 불쑥불쑥 전개된다. 이러한 전개는 한참 후에야 '노인이 된 브라이오니의 인터뷰'를 통해 소설이었다는 식으로 해소된다.
내 생각에는 이런 짧게 짧게 틱틱 걸려서, 사건의 전후를 되짚게 만드는 전개가 결국 브라이오니 시점에서 '메타픽션'으로 연재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장면을 '진짜'와 '가짜-소설'으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이건 '진실을 가리기 위한' 장치를 위한 구성은 아닐 것이다. 그냥 소설은 원래 읽다가 잠시 선후관계를 되짚으려고 앞으로 되돌아가고, 그런 영향도 있지 않나 싶은 거다.
여주인공인 키이라 나이틀리(세실리아 역)가 입은 이 실크 드레스는 메릴린 먼로가 '7년 만의 외출'에서 선보인 화이트 드레스, 오드리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소개한 검정 드레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 영화가 정말 '영상미만 좋은 영화' 일까?
나는 사실 어톤먼트의 스토리에 크게 감명받은 편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굉장히 심플한 편이라 생각하고, 두 젊은 남녀가 사랑을 꽃피우기도 전에 생이별을 겪어 애틋하게 끝나는 비극 자체에 대해서 크게 신선함을 느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어톤먼트가 '스토리는 그냥 그런데, 영상미가 죽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영상미의 당위성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찾았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스토리 자체로 먹먹하고 답답하다. 오해를 일으킨 사람이 마지막까지 살아 심지어 그들의 이야길 소설로 펴내고, 정작 당사자 씨와 로비는 다시 만나지도 못하고 전쟁의 여파로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플롯은 단순하고, 어떤 숨겨진 전말이 있지도 않다. 마치 열세 살 브라이오니의 시선을 따라가듯 쭉 흘러간다. 사실 단순한 스토리와 화려하고 뛰어난 영상미가 반대되는 가치는 아니지만, 이 영화는 이 평범한 스토리에 비해 과하게 아름다워 보인다. 의상도 보통이 아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로 2013년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은 코스튬 디자이너 재클린 듀런이 맡은 씨의 녹색 실크 드레스는 할리우드 드레스 순위에서 1위를 했단다. '1935년 꽃과 빛으로 가득 차고 행복이 넘친 시절과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무겁고 어두운 시절을 의상으로 대비시켰다.' 고. 그러니까, 어톤먼트를 봤다면 씨의 녹색 드레스를 모를 수가 없다. 이 집의 풍경은 어떻고? 우리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며 '서구권 새끼들 아시아에 공장 외주 주고 지네만 이렇게 아름다운 데에서 휴양하며 산다 이거지...' (물론 부유층이 누린 거겠지만...) 싶었던 그 화남과 열망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참 아름답다.
그리고 이렇게 까지 아름다운 영상미는, 이들의 비극을 둘도 없이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충분히 기여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이들의 이야기는 브라이오니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픽션 속 메타픽션. 영화 내에서도 시간선이 파편적으로 뒤바뀌는 것은 이미 앞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 미치게 아름다운 영상미는 결국 '그냥 미술감독과 조 라이트 감독이 자기만족을 위해 힘냈다'가 아니라, 이 어렵지 않은 '소설 속 사랑'의 당위를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물론 영화야 안 예쁜 것보다 예쁘게 잘 뽑은 게 좋지. 그런데 이 영화를 단순히 '스토리는 사람 미치게 하고 브라이오니는 나쁜 년인데, 영상미만큼은 끝내준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스토리와 영상미를 분리해서 보고 싶지 않았다... 가끔 영상만 좋고 스토리는 별로라든가, 인물들 때문에 겨우 살았다 같은 영화들이 많은데 이 영화는 굳이 그런 종류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영상미도 이 영화가 (브라이오니의 자전적) 소설 속 이야기임을 어필하기 위한 장치라고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브라이오니를 전적으로 변호하고 싶다. 이건 그녀의 속죄(atonement) 니까.
이건 사실 당연하게 관객끼리 합의가 될 줄 알았는데, 짧게나마 리뷰를 찾아보니 브라이오니를 '이 사건의 원흉'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굳이 쓴다. 브라이오니는 어렸다. 브라이오니의 판단 기저에는 '무분별하게 노출당한 젊은 남녀의 성적 행위와 편지'가 있었고, 그보다 앞서서는 '브라이오니가 준비한 연극 등에 무심한 반응을 보이는 가족과 친척들' 이 있었고, 그보다 중요하게는 '명명백백한 아동 강간 가해자인 폴 마샬(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있었다.
너무 많은 리뷰에서 브라이오니가 로비를 짝사랑했었는데,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것을 본 것에서 충격을 받아 홧김에 거짓진술을 확증처럼 해버린 것이라 생각해서 놀랐다. 배신감이야 있었겠고, 실연과 비슷한 종류의 슬픔도 있을 수 있었겠으나 그 행위가 질투로 절대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성적 행위에 대한 물리적인 거부감이 아니었을까...... 씨와 로비는 문을 잠그고 사랑을 나누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민한 소녀인 브라이오니가 '나는 봤어요.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하는 심리가 너무 이해가지 않나? 옳지 않음에 대해 빠르게 재단하고 싶은 욕구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심판관이 되어서, 빠르게 저 '변태'라고 정의한 남자를 끌어내리고 싶은 것이다. 그를 잠시나마 좋아했던 과거 따위 깔끔하게 묻을 수 있고. 내 빠르고 정확한 판단으로 어른들에게 인정도 받고. (경찰이 무려 내 얘길 들어주고, 증거로 채택해서, 판정하는데에서 오는 과시욕이나 떳떳함이 없었을까? 아마 목 빳빳이 들고 내가 변태를 잡았어. 그래, 이래야 했어. 했지 않았을까? 적어도 시얼샤 로넌은 확신 있어 보이는 얼굴로 말한다.)
이러한 배경을 다 자르고, 브라이오니가 위증을 해놓고 정작 본인들에겐 사과도 안 하고 나중에 소설을 써서 혼자 속죄해버리는 것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으나 그렇게 해선 이 영화의 속죄(atonement)가 일절 의미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정말 이게 머리 싸매고 답답하고 고통받으려고 보는 영화밖에 되질 않는다. 그렇게 보고 싶지가 않은 거다. 왜냐면, 누구나 어릴 때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부풀어진 거짓말을 해서 나를 드높이고 싶던 때가 있으니까.
아마, 이것이 사랑 영화라서 그 사랑 영화의 문법 안에서 브라이오니의 행동이 '질투의 반발' 쯤의 해석으로 넘어가기 쉬웠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a moment (사랑하는 순간.. 뭐 그런류)가 아니라 atonement라서, 속죄니까 결국 난 브라이오니를 주인공으로 두고 싶었고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면 이 영화의 답답함이 조금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그건 내 안의 치기 어린 어린 시절의 과오들을 받아들이는 게 되니까. 물론 나는 거짓말해서 미래가 유망한 젊은이를 감옥으로 보내지는 않았다만....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화 내에서 어른인 브라이오니는 '나는 누굴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어릴 때 잠시 풋 짝사랑 같았던 로비에게의 감정은 질투에 눈이 멀어 위증을 하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정도의 분노의 화신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인정 욕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어린이들의 사랑을 가볍게 보려는 건 아니지만, 괜찮은 어른을 동경하는 것과 로맨스적으로 사랑하는 걸 착각하는 경험이 아예 없는 일도 아니지 않나? 혹은 사랑이라 생각했다가 그 정도가 아니란 걸 스스로 깨달은 데에 대한 창피함을 느낀 적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을 알았을 때 나는 이 영활 조금 더 나쁘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위에 구린 영화 제목 말장난 시도는 사실 어톤먼트라는 이름만 봤을 때 이게 '순간? 감정? 그런 단어였던가?' 하고 봤었기 때문이다. 다 보고 나서야 이게 속죄라는 제목인 걸 알았다. 어 모먼트 뭐 이런 뜻인 줄.... 그제야 이 영화의 주제가 확 달라 보였던 것 같다. 아, 이거 씨와 로비는 '소설 속 인물'의 무게로 이해해도 되는구나. 싶었다. 왜냐면 난 그 씨와 로비의 이야기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아서.... 그 정도로 이해하고 나서야 더 만족했다. 하지만 키아라 나이틀리와 찰스 자비에의 표정들은 정말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