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함의 소중함을 알면,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할까? 이왕이면 잘 소개하고 싶다. 나도 아는 선생님께 선물받았지만, 주변에 선물하기로 결심한 책은 올해 들어 처음이니까. '곰돌이 푸 놀아도 괜찮아' 식의 에세이에 편견이 있던 사람들에게, <무탈한 오늘>은 정말 괜찮은 에세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에세이의 정의를 찾아보니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견문이나 체험, 또는 의견이나 감상을 적은 산문 형식의 글' 이라 한다. 내게 에세이란 시 처럼 짧은 문장, 그렇지만 산문으로 이어지는 자기경험, 그리고 평화로워 보이는 사진. 이정도의 이미지다. <무탈한 오늘> 역시 이 형식안에 있으나 밀도와 조합이 좋다. 짧은 호흡의 단문들, 다섯마리의 개와 다섯마리의 고양이와 살고있는 가구공방 디렉터의 동물, 그리고 나무,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분명한 매력포인트인, 섬세하게 찍어낸 생명들의 사진.
> 작가?
작가는 20살에 대학에 입학해 22살에 퇴학당한다. 그리고 24살에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6개월만에 암 선고를 받는다. 이후 조직 3000cc를 덜어냈지만 수술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 가구공방에서, 5마리의 개 그리고 5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에세이긴 하지만, 사실상 삶을 바라보는 변환점이 되었을 저자의 과거는 이렇게 프롤로그에서 짤막하게 소개되고 끝난다. 그러니까, 자신의 성공경험 (대부분의 경우는 직업적, 경제적 성공에 대해서 자신의 노력을 어필하는 거겠지만, 요즘은 '힐링' 에 있어서도 성공과 실패가 있는 것 같다.) 을 이야기하는 건데, 결국 에세이란게 '나 이렇게 살고있으니 너도 이렇게 해보라. 이런 삶도 있다.' 는 어떤 메세지의 전달일텐데. 작가는 이 메세지에 집중하기 위해 자신을 덜어낸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 주변의 삶과 그들이 건넨 감정과 다정을 관찰하고, 소중하게 적는다.
이런 사람들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물론 이겨먹으려고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에세이에 편견을 가지고 있는 독자의 방어태세를 순식간에 녹여내고 몰입하게 한다는 뜻이다. 책을 읽으며 4번 정도 울었던 것 같다. (그 울음이 모두 감동만은 아니다, 충격도 있었다. 아래에 이 감상을 적겠다.) 삶의 구덩이에 한 번, 이 세상의 '무탈함' 이 내 것이 아니었던 순간을 한 번 겪되 그것에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기로 한다면 다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흔적을 우아하게 담는 존재의 안쪽은 무척 촘촘하고 단단할 것이라 믿고 있다' 는 본문(216p)의 말 처럼, 저자는 흔적을 받아들이되 우아하게 글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쪽의 단면을 살피는 독자인 나는 저자의 안쪽이 무척이나 촘촘하고 단단할 것이라 생각한다.
>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자격은 무엇일까
이 촘촘함과 단단함, 그러니까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란 주제에 대해 잠시 얘기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읽다 울었던 것 중 한 번은, 13년간 키운 강아지 뭉이를 비장암으로 떠나보내는 순간에 대한 글을 읽고서였다. 소설이라면 강아지 '뭉이' 의 이야기를 알게되고 '뭉이의 죽음'에 몰입해서 슬펐겠지만, 이 짧은 수필은 보편적으로 겪은 죽음과 장례의 순간을 생각하게 한다.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선고받고, 준비하고, 마침내 관을 짜 그 안에 외국 화폐, 주민등록 번호, 좋아하던 간식, 꽃 등을 넣으며 보내고 또 보내지못하는 그 일련의 과정. 그 과정을 보며 자연스레 내가 떠나보낸 상실을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사람처럼 사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덮고 울었다.
중학생 때 죽은 햄스터가 생각났다. 햄스터는 나와 거의 3년간을 함께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그렇게 슬프지 않았었다. 수명이 짧으니 죽음을 진작에 알고있었기 때문일수도, 미루고 미루다 만들어준 새 집을 딱 하루 쓰고 죽었는데도 나는 내가 다른 주인들보다 잘 챙겨주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기본적인 상식은 챙겼고, 아주 사랑스러워 했지만 소유물에 대한 감정과 다를 바 없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햄스터가 죽었을 때, 나는 부모님이 어린 내가 처음으로 가까운 존재의 죽음을 겪은 것에 대한 충격을 우려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애써 울었다. 그리고 아주 의식적으로 그래야 마땅했기 때문에 편지를 쓰고, 상자를 준비하고, 나도 그 상자에 그애의 간식과 편지와 살아생전 좋아하던 것들을 넣어주었다. 그리고 집 앞 언덕같은 산에 묻어주었다. 그 언덕은 이후 비가와서 땅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그 애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을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뭔가 상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으니, 어련히 있겠거니.
장례는 의식이라지만 내가 했던 과정은 사랑이 빠져있었다. 의식적으로 차린 예의가 있었지만 슬픔이 크지 않았다. 나는 슬픔에 거리를 둔다. 그렇기 때문에 외려 나랑 거리가 멀다는 게 확실한 슬픔에는 적당히 이입할 수 있어 눈물은 꽤 많다. 공감성이 없다는 어쩌구패스들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나의 사회성을 가식적으로 우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를 내놓을 만큼. 혹은 그 슬픔을 안고도 피하지않고 내가 죽는 날 까지 끌어안고 살아가는 다정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 감동이 아니라, 충격이었던 거다.
그리고 10분 정도 울다가, 이 세상에 얼마나 구린 사람이 많은데, 척이라도 잘 할 수 있으면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 같은 자기연민에 빠지는 꼴은 끔찍하니까. 다만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원초적인 질문은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변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보았는데, 나도 사랑하는 척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잘 숨기고 살아야한다, 라는 이야기. 혹은 사실 진정한 사랑 같은 건 미디어의 환상일 뿐이라 생각한다, 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혹은 유일한 관계에 대한 특별함 - 다른 사람과 유별을 두는 태도에서 오는 만족감으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온 것 같다. (난 폴리아모리를 존중하지만 솔직히 내가 될 자신은 없는데... 좀 더 찾아봐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이 책은 내가 이만큼 무언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고민했을 만큼 깊이있게 다정함의 밀도를 채운 책이다. 그 밀도의 몫은 말할 수 없는 생명들이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자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채주었기 때문에 완성된 것일테다. 삶의 구덩이에서 숨을 참고 몸 위로 흙을 덮은 뒤에, 다시 몸을 일으켜 살아간다면. 나도 내가 주고받은 다정함을 발견하고 잊지않아서 나의 나이테를 촘촘히 채울 수 있는 것일까. 반드시 죽음의 목전까지 다녀와 초월을 해야만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의 변환점은 언제일까 여지를 두고 우선은 내 일상을 촘촘히 채워가려 한다. 무탈한 오늘을 조금은 기쁘게 긍정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