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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제 Jan 09. 2021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내’ 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되기를 바라고 싶은 사람들

(스포일러 많아요!) 


내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되기를 바라고 싶은 사람들  (4.0) 


'훌륭한 이야기는 지루한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인생이다.' 라고 히치콕은 말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걸 잘라내면 안됐다고 생각한다. 후반의 확장되는 코지 미스터리의 전개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어야하는 이유를 흐렸다. 그러므로 이것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의, 내가 속하고 싶은 이야기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







 이 영화는 2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 동안 그닥 지루한 장면 없이 사건을 파헤치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해결하는 내부고발물, 추리수사물이다. 고구마 줄기가 좀 상했네? 싶어서 캐다보니 모든 고구마가, 조금 더 살펴보니 밭의 땅 자체가 문제라는 격으로 전개가 확장된다. 페놀 유출 사건의 원흉이 회장 아들이야? 근데 알고보니 같이 일한 어리바리 대리나 존경했던 사람좋은 부장님이 조작을?! 더 알고보니 젠틀한 백인남성 사장의 회사 매각 수준의 음모?! 이런 식으로 계속 원흉의 얼굴이 갈아치워진다. 밭을 갈아엎어야 하는데, 손에 낫, 아니 녹음기 하나 쥐어진 상고 출신 여사원 셋이 이걸 해내야한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달리 해주지 않고, 억울하게 피해입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무력감에도 삼총사는 포기하지 않고 (주로 호텔에 몰래 침입하는 과감함이나, 저러고 있으면 회사일은 언제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탓에)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지는 수단을 아끼지않으며 용감하게 맞서고, 기어이 해낸다.





 '평범하고 용기있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부조리에 맞서는 이야기' 는 픽션을 가미한 이야기로서 쓰이는 이상 해피엔딩을 전제할 수 밖에 없다. 내부고발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아니므로, 대중영화라면 대중들에게 선한 주인공이 선한 영향력으로 승리하는 엔딩을 보여주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단순히 패배하고 말 픽션이라면, 어떤 요소가 그 패배에 기여했는지에 초점을 맞춘게 아닌이상 읽힐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고출신 여자애들이 대기업과 맞짱뜨는 영화의 엔딩이 해피엔딩임을 알고, 또 기대하고 들어간다. '난 절대 포기 안할거야!' 하고 울면서 외치는 이자영의 모습은 정말이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영웅이 아닌가. 이자영에게 부양할 가족이라도 있었다면, 이자영이 삼진그룹에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다면, 더 좋은 영향력을 끼칠 일을 하고싶단 바람에서 그냥 회사를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찾으러갔다면, ... . 이러한 인간적인 배경과 고민을 지운, 고민을 하긴 하지만 길게 하지 않고 포기도 하지않는 이자영과 친구들은 애초에 가상인물로서 절제된 설정과 배경을 갖고있고,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같은 해피엔딩으로 나아가는데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이 해피엔딩에 관객은 만족할 수 있을까? 1995 년이라는 시대상을 알고있으니, 2년 뒤에 찾아올 IMF 라는 예정된 재앙을 생각하며 그때도 삼총사는 이겨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는 않은가? 원하는대로 건조기 개발도 추진하고, 새로운 회계 프로그램도 짜내고. 하여튼 대리가 되어 커피타는 것 말고 큼직한 일들을 해나가는 그들의 추진력이 가로막힐 재앙 앞에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은 무얼 해낼까? 그때도 정리해고를 피하고 '정말로 멋진 커리어우먼' 이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런 재앙이 닥칠 미래를 생각해본다면 이들이 현재 이룬 해피엔딩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하고싶은 말은, 부조리에 대항하는 영화로서 설정된 인물들과 결말은 강하고 힘찬 해피엔딩 이어야겠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 제시하는 '회사도 살리고 꿈도 살린 커리어우먼' 으로서의 해피엔딩은 찝찝한 뒷맛이 있단 거다. 물론 내가 바라는 뒷맛을 없애려면 이자영이 이김에 (삼진뿐 아니라) 회사 부조리도 여사원 멸시문제도 척폐하고, 나아가 자본주의 철폐 혹은 회사 밖으로 나가 '더 큰 일' 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풀리겠으므로 기대치가 과도한 걸테다. 그렇지만 씩씩한 회사의 영웅 커리어우먼 대리 이자영은 내게 '그래, 이래야 겠지? 이걸 자영은 하고싶어했으니까. 그렇지만 정말 이거면 돼?'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렇지만 정말 이거면 돼?



 삼총사가 페놀유출 사건의 원흉을 되짚어 가는 과정은 관객들이 그들에게 몰입하게 하는 만큼이나 스스로 몰입하고 있다. 점차 진행되는 수사와 심화되는 사건의 전말에 따라 개성있던 인물들은 단순해진다. (왜 올림피아드 수상경력이 있는 수학천재지만 회사에서 진가를 못발휘하는 과다설정 심보람은 진짜 '람보야~' 하고 물고기에 정신팔려 일을 그르치는 사람으로 그려져가는가?) 인생의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남은 인생이 훌륭한 이야기라는 히치콕의 말처럼, 지루한 부분, 그러니까 캐릭터의 배경이나 그들이 겪은 차별을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차별들은 영화에서 단면적인 장면으로 드러나므로 없는 편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생각하게 되는게 있는데, 이 영화가 유머를 담은 열혈단신 추리물인지, 아니면 대기업의 횡포와 비리문제나 (현재진행형인) 그 시절의 여성혐오 문제를 다루려는 건지 알 수 없단 거다. 이들이 잘라낸 인물들의 '지루한 부분' 은 이 영화가 '상고 출신 여사원' 들의 이야기인 이상 그렇게 잘라내면 안됐다. 그걸 잘라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반드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일 필요가 없게된다. 그들이 억울하게 차별받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정유나의 말처럼 '싸니까' 그 차별을 감수해야했을 지점들이, 후반으로 갈수록 단면적으로 '힘없지만 용기있는 개인' 정도로 뭉뚱그려지고 흐릿해진다. 이 영화가 하고싶은 게 뭐지? 추리물로서는 무난하게 재미를 보장한다. 쓸모없이 들어간 장면도 없으므로 지루하지 않다. 그러니까 (여성주연의 영화가 어느정도 대중의 요소로 자리잡힌 게 사실이니까 일단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에 마이너스 요소가 아님을 전제한다면) 스토리 라인은 대중적인데, 이 대중성을 밀고나가고 싶지만 주인공이 사회의 비주류라는 점도 어필하고 싶어, 근데 그 비주류의 이야기를 전면으로 나가기엔 이 영화는 '회사와 맞짱뜨는 용감한 친구들' 이어야 해… . 결국 이 판타지는 전형적인 추리물에 '주인공을 비주류타입으로 바꾸어보았다' 정도가 된다고 느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왜 없겠어! 그런데 이 공허함은 마치, '여성혐오를 거부하는' 여자가 많이 나오면 '여성서사' 라는 단편적인 말들을 보았을 때 같다 . 난 '여성서사' 라고 홍보되는 것들이 다소 단편적이고 어쩌면 홍보되는 작품의 메세지를 곡해하는, 거친 잣대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런 간단한 잣대라도 나오게 된 배경과 의도를 알기에 아주 꼽게 듣지는 않는 편이다. 어쨌든 존나구리고 가오잡는데 내용까지 맛없는 마초물이 세상에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여성서사에 대한 의리는 있는데, 그 기준이 내 것 까지는 안된다는 거다. 나는 좀 더 실제 삶처럼 복합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꿰뚫어 보거나 혹은 유쾌함을 잃지않고 핵심적으로 짚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영화나 소설을 읽는다. 등 간지러워서 효자손 찾는 심정으로, '이거야!' 하는 순간을 언제나 바란다. 


 그런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은 어필하고 싶은 게 너무많아서 오히려 단순해졌다. 능력있지만 억울하게 차별받는 시대의 여성들이 누구도 하지못한 정의롭고 멋진 일을 과감히, 포기않고 해서 회사를 구한다! 맞짱깐다!! 재미도있게!! …  현재진행형으로 차별을 받는 이야기를 하면서 당사자가 유머로 승화하려 한다면 그건 차별이 극복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대중성을 욕심냈고 그러다보니 유머러스함을 필수적으로 넣고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고 출신 여성들' 의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뒤로 갈수록 희미해진다.물론 현실적인 불편함을 스크린으로 보지 못해 아쉽다는 미친 소리가 아니다. 성희롱같은 장면들이 장면이 아니라 인물들의 말로 암시되는 것 정도로 연출한 점은 분명 좋았다. 하지만 그게 다여서는 결국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것에 불과해진다. 


 물론, 이건 소설이 아니라 시간이 한정된 영화이고, 수사물의 형식을 띠는 이상 그에 초점을 맞춰 적절하게 장면들을 낭비도 없이 딱 알맞게 썼다고 느꼈다. 이 아쉬움은 오로지 나의 기대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이 아니어도, 이 이야기는 '평범한데 정의감 있는 개인' 이면 다 상관없었지 않나, 싶어지는 아쉬움 말이다. 실제로 막판에 이르면 '할 땐 하는' 과장님인지 상무님인지나, '어리바리하고 이자영한테 되도않는 갑질하려다 등짝맞는' 대리, ... 심지어 개미 주주들까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함께 모여 회사가 해외자본에 먹히는 일을 막는다. 이 근간엔 뭐가 있지? 애사심, 아니 애국심? 물론 90년대 후반, IMF를 맞기 전 성장과 경제호황에 대한 낙관론이 깔려있던 시대임을 감안해 그들의 애국심은 현실 고증에 가까운 것이었겠지만, 난 초반이 더 좋았다. 초반에 이자영이 페놀 유출사건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작동원리는 '억울하게 피해를 받고있는 시골 주민들' 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정의감의 근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후반 '외국인 사장이 삼진을 싼 값에 사들여서 일본에 팔아넘기려고 페놀유출도 내버려둔것' 이라는 음모로 전개될수록 희석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난 이 추리물 식의 '점점 더 큰 원흉' 을 찾는 전개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으로서의 의미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초반의 인물들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에, 전개 속에서 인물들이 난관을 겪을 때 마다 응원하고 싶어지고, 후반의 승리에 축하를 보내고 싶어진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물들이 후반에 갈수록 단순해지고 (어쩌면 초반 설정부터 그랬지만) 여성 출신인 점도, 상고출신인 점도 원인에 집중하여 무언갈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사회'고발물로서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있지만- 그들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중요한건 평범한 영웅들의 타자화가 아닌 평범한 관객인 내가 고무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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