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만난 건 캐나다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나는 경영학 전공과정을 졸업하기 위해서 봉사활동 점수를 맞췄어야 했기에 학기 말에 여러 활동에 참가했었다. 어느 날은 환경 친화적 콘셉트의 패션쇼 백스테이지 스텝으로 근무를 했었는데 그곳에서 페기를 알게 되었다. 페기는 자신을 대만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먼저 말을 건네 왔고 약간의 경계를 풀지 못한 채 어정쩡한 미소로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우리 둘은 태평양을 건너서 이 곳까지 왔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통성명을 하니 자연스럽게 현 거주지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묻게 된 우리는 놀랍게도 2번째 공통점을 발견했다. 집주인의 갑질 횡포에 보증금도 못 받고 쫓겨나듯이 나온 집에 2주 전까지 거주했었는데 내 다음 타자로 그녀가 그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놀라움 반 걱정 반의 마음가짐으로 그녀에게 나와 같은 상황을 마주하는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몇 마디를 해주었고 서로의 치부를 알게 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 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왜 해피엔딩보다 새드 엔딩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비가 많이 내려서 레인 쿠버라고도 불리는 그 소도시에서 우리는 날이 개고 햇빛이 깊게 내리쬐는 날에는 게스 타운 테라스에서 브런치를 함께 먹거나 잉글리시 베이를 거닐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보다 먼저 고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대만 간식들을 한 꾸러미 포장해서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나 또한 몇 달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새 출발을 하느라 정신이 없던 와중에 그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주고받다가 차주에 한국에 놀러 갈 거라는 깜짝 소식을 전해왔다. 공항에 마중 나갈 만큼의 여유는 없었기에 퇴근하고 명동 한복판에서 마주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그때의 나는 미슐랭에 등재된 톱클래스의 한정식을 대접할 수도 없었고, 서울 시민도 아니었던 나는 따뜻한 방 한 칸을 내어줄 수도 없었기에 미안함만 가득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만남 이후로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몇 년 후, 가족들과 첫 해외여행으로 대만을 가게 되었고 키티로 잔뜩 꾸며진 비행기에 올라탄 채로 상공을 가로지를 때 그녀를 잠시 떠올렸고 메신저에서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다가 이내 창을 닫았다. 그러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3일 차 일정 때 부모님을 모시고 북경오리 집을 가려고 했었으나 미리 예약을 해야지만 방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식당은 관광객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그것도 전화로만 예약을 받는다고 했다. 머무르던 숙소가 호텔이 아니어서 컨시어지에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운명적으로 SNS 메신저 창에 알람이 울리면서 페기로부터 대만에 왔냐는 메신저가 떴다. 그녀에게 바로 SOS를 쳤고 가장 좋은 자리에 사이드 디쉬로 김치까지 내놓아달라는 부탁을 해서 편안히 그 날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날 밤 그녀가 숙소 근처까지 오겠다고 해서 3시간 정도 카페에서 만났었는데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의 양손에는 가득히 선물들이 들려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그녀의 인자한 미소와 따뜻한 인정에 낯선 타국에서 처음으로 긴장이 풀렸다.
지금 페기는 대만에 계속 살고 있는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는지 알지 못한다. 바다를 바라보는 일이 있을 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저 너머의 그녀를 떠올리곤 한다. 넘실대는 파도는 모래사장까지 다가왔다가 이내 다시 바닷속으로 멀어지곤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용기를 내서 다가갈까 말까 하던 나를 투영하는 듯하다. 철썩거리는 파돗소리가 내 뺨을 찰싹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이를테면 '태평양을 건너서 만난 인연'에게 다시 용기를 내보라고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