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너랑 일 못 하겠어
갑에게 전하지 못한 프리랜서의 속마음
01
회사 밖의 삶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그러나 회사 밖에서 일하더라도 결국 누군가와 협업해야 한다. 물론 나이스한 클라이언트도 많다. 하지만 두 번 다시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 양상은 다양하다.
02
- 1번 유형. <튜닝의 끝은 순정 파>
"편집자님~ 3분 10초에 A 넣어주세요."
(별로인 것 같지만 넣어서 보내면) "죄송합니다. 넣어보니 흐름을 해치네요. A 그냥 빼주세요."
(빼서 보내면) "3분 10초 아무래도 허전하네요. B를 넣어볼까요?"
(역시 별로인 것 같지만 넣어서 보내면) "B 넣고 나니까 3분 18초에 C를 넣어야 될 것 같아요."
(그것도 넣어서 보내면) "그냥 다 뺄게요, 죄송합니다^^;;"
- 2번 유형. <쉬운 건데 빨리 파>
금요일 밤 11시.
"작가님, 전화를 안 받으셔서 문자 남깁니다. 수정사항과 추가내용 보냈으니 3차본 내일 오전 10시에 볼 수 있게 주세요. 한두 시간이면 금방 할 것 같은데, 어렵지 않은 수정이니 빨리 해서 전달 바랍니다. 수고 부탁드립니다."
확인해보면 본인들이 초기 구성해놓은 골자를 이제 와서 다 뒤집어엎는 것이라 최소 4시간 분량.
- 3번 유형. <모르겠고 당장 파>
(업무 의뢰가 들어왔을 때, 이번 주는 다른 일정이 있어 평일 오후 6시부터 12시까지와 주말에만 작업 가능하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고, 클라이언트가 괜찮다고 하여 일을 시작한 상황.)
"1차안 확인했는데 수정할 것이 있어서요. 메일 보내두었는데 오늘 업무시간 안에 2차 받을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렸듯 제가 이번주는 평일에는 오후 6시부터 12시까지만 작업이 가능해서요. 내일 오전 출근하시면 확인하실 수 있게 보내두겠습니다."
"아니~ 이 PD님이랑 일하기 진짜 힘드네. 지금 바쁘신 건 알겠는데요. 어떻게 PD님 일정에만 다 맞춰드려요."
"(협의된 얘기잖아요...) 저도 급하신 것 알고, 최대한 빨리 해서 넘겨드리고 싶지만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불가능해서요. 저녁에 최대한 빨리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모르겠고, 일을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럼 오늘 7시까지 보내주세요." (*물리적으로 한 시간 안에 작업 절대 불가능한 분량.)
- 4번 유형. <돈이 얼만데 뽕을 뽑아야지 파>
"1번 삽화는 좌우로 나눠 A, B 그려주시고요. 2번 삽화는 보내드린 인물사진 카드 뉴스처럼 보정해주시고, 옆에 C 살짝 그려주세요. C는 레이어 분리해서 웃는 표정, 우는 표정, 화난 표정 3개 넣어주시고요. 3번 삽화는 3등분해서 D, E, F 넣어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총 3장 요청드립니다."
10장 요청할 돈이 아까워 3장 안에 어떻게든 우겨넣어 작업물 받은 후, 내가 세 장 보내면 본인들이 분할 편집해서 최종 결과물 10장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놀라운 매직... 이게 말로만 듣던 창조경제인가?
03
최근 1, 2, 3, 4번을 한데 섞은 듯한 역대급 빌런을 만난 뒤로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보내지 못할 말들을 나에게라도 보내는 것이다.
- 정말 가지가지 하시네요 ^^
- 아니~ 니가 어제 이렇게 해달라며,,,
- 주 7일 24시간 컴퓨터 앞에서 대기할 순 없어요.
- 그럼 직접 하세용~♡
-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저도 사람이라 잠을 자고 밥을 먹는답니다!
- 다음 주 일정은 왜 물어보시나요? 어차피 실장님이랑은 두 번 다시 일 안 할 거니까 궁금해하지 마세요.
04
얘랑은 미래도 없고 건강도 없고 돈까지 없다 싶을 때는 할 말 다 하고 그만둔다. (31년 인생 통틀어 딱 한 번 그래봄.) 하지만 웬만하면 참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육체의 피로함. 하기 싫다는 감정. 그런 것은 금방 휘발된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피로와 감정이 재처럼 부서져 날아간 자리에, 단단하게 만져지는 결과만이 남는다.
솔직히 너랑은 일 못하겠다. 그치만 심호흡 몇 번 하고, 순간 욱하는 마음에 속아 결과를 잃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클라이언트에게 답장을 보낸다.
"넵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