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독시 실사화, 무엇이 아쉬웠을까

10번 읽은 팬이 말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 영화가 실패한 이유

by 희라의 오늘배움

10번. 나는 적어도 원작을 10번은 완독했다.
일곱 번부터는 세지 않았으나, 내 기억으로는 10번은 가뿐히 넘겼고 20번은... 글쎄, 아슬아슬하다. 전독시가 원고지 기준으로 25,000매에 달하는 분량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한 셈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 작품의 팬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정도는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독시가 처음 실사 영화로 제작된다고 했을 때, 나는 탄식했다. 그냥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지, 왜 하필 실사 영화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첫째, 전독시는 길어도 너무 길다. 내가 또 다른 팬인 해리포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방대한 분량이다. 중간에 늘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영화 한 편에 담기엔 절대적으로 부족한 러닝타임이다. 해리포터조차 8편에 걸쳐 시리즈화되었는데, 전독시는 10편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둘째, 전독시는 판타지적 요소가 너무 많다. 실사화에는 기술적·서사적 제약이 많다는 의미다. 이건 단순히 “원작이 제일 낫다”는 수준이 아니라, 애초에 현실이 된 소설이라는 설정을 가진 이야기이기에 실사화에 적합하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냥 원작을 그대로 두지, 새로운 버전을 만드는 것 자체가 불만인지 묻는다면 꼭 그런 건 아니다. 전독시는 이미 웹툰으로도 만들어졌고, 이는 많은 환호를 받았다. 현재도 네이버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연재 중이다. 이 웹툰은 원작의 분위기와 설정을 잘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원작을 이미 읽은 팬들에게도, 이를 통해 입문한 뉴비들에게도 모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렇기에 차라리 이 그림체를 살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넷플릭스나 쿠팡플레이 같은 OTT 플랫폼에서 공개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원작의 열렬한 팬으로서 영화관에 갔다. 까더라도 보고 까자는 마음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에게 맡긴 채 혼자 심야영화를 보러 간 것이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러닝타임 내내,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사실 나는 실사 영화가 제작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몇 가지 각오를 하고 있었다. 첫째, 앞부분만 다루겠지. 요즘 영화 시장이 어려운 만큼 시리즈물로 만들기엔 투자가 쉽지 않을 테니 아마 한 편으로 끝낼 거라고. 그럼 소설의 지하철씬 정도까지면 시간상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원작을 압축하지 못할 테니 컨셉만 가져오고 내용을 바꿔 진행하겠지. 원작의 결말은 그 전개의 맥락이 없이는 도달도, 이해도 어렵다. 그렇다면 소설과 다른 결말이 나올 것을 예상했고, 신과함께처럼 컨셉만 따온 또 다른 영화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신과함께 또한 원작 웹툰과 영화 모두를 본 팬으로서, 이것이 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만 있다면, 원작과 달라도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각오를 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관에서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내 예측과 그대로 갔지만, 그 방식이 충격적이었다. 영화가 원작에 대해 ‘애정’은커녕,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캐릭터의 변화였다. 전독시의 첫 번째 매력은 바로 입체적인 캐릭터다. 단순히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으며, 각자의 서사와 고통을 지닌 인물들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가 이야기의 힘이다. 이 매력을 살리려면 해리포터처럼 원작의 성격을 충실히 재현하거나, 신과함께처럼 아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독시는 둘 다 아니었다. 캐릭터의 이름만 빌려와 전혀 다른 성격을 씌웠다. 이는 원작 팬은 물론, 작가에게도 모독이다.

예컨대 주인공인 김독자는 원작에서 현실에선 찌질하고 무력했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소설이 현실이 되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그 지식을 활용해 세계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이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자신을 구원한 소설에 대한 깊은 애정에 기반한다. 그러나 영화 속 김독자는 단지 어느 긴 소설의 독자이자, 악플러일 뿐이다. 그는 소설에서 얻은 지식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넘긴다. 이런 인물은 ‘전지적 독자’라기보다는 그저 ‘조금 더 많이 아는 사람’일 뿐이다.

이는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에서는 모든 주요 캐릭터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한 세계에서 살아남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냥 조연 1,2,3,4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성좌들도 소설 속에서는 각자의 성격을 지닌 존재들인데 영화에서는 아예 비춰지지도 않는 단순한 시청자로 보여진다. 유중혁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원작에서 그는 김독자 평생의 이상향으로 시나리오를 함께 헤쳐나가는 믿을 수 있는 동료였지만, 영화에서는 단순히 "소멸을 피하려면 살려야 하는 존재"로 축소된다.


다음은 소설의 핵심 장치들이 변질된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멸세사 작가와 김독자의 관계다. 원작에서 이들은 ‘1명의 독자를 위해 끝까지 연재한 작가’와 ‘1명을 위해 완결까지 따라가 준 독자’라는 감동적인 서사를 공유한다. 그래서 소설이 현실이 되었을 때 작가는 이에 대한 선물로 원작 텍본을 선물로 주었고 이를 통해 독자는 자신만의 스킬을 얻게 된 것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제목도 이 스킬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작가는 단지 악플러에게 복수하기 위해 소설을 현실을 바꿔버린 인물로 그려진다.

‘불살의 왕’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원작에서는 카르마를 통해 부활이 가능한 특성이지만, 영화에서는 그저 사람을 되살리는 능력처럼 다뤄진다. 설정의 골격은 가져왔지만 의미는 전혀 달라졌다. 이럴 거라면 굳이 같은 이름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감독은 왜 이렇게까지 원작을 바꾸면서 실사화를 고집했을까? 아마도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인기 있는 원작의 세계관을 가져와 신과함께처럼 재창조된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신과함께는 철저하게 새로운 노선을 택했고, 그 완성도를 통해 독자와 관객 모두를 설득해냈다. 작품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아이디어만 가져와 새로운 캐릭터와 스토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전독시 영화는 그와는 정반대다. 원작에 대한 애정도, 이해도, 존경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팬들이 분노하고 있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인터뷰에서 “작가도 OK한 각색인데 뭐가 문제냐”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원작의 매력을 외면한 각색은, 허락을 받았더라도 팬들에게는 또 다른 배신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원작에 대한 사랑이 부족할 때, 그 결과물이 어떤 식으로 어긋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제대로 된 완성도로 만들어졌다면, 전독시는 세계관의 깊이와 인물 간 서사만으로도 훌륭한 콘텐츠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전독시라는 이름만을 빌려, 그 본질을 훼손한 아쉬운 실사화로 남았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실망스러운 영화가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의 가능성마저 낮춰버렸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한 편의 실패가 아니라, 이 세계관 전체의 잠재력에 대한 평가를 왜곡시켜버린 셈이다. 팬으로서 아쉬움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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