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 대니얼! _ 스윙댄스로 말할 걸 그랬나요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꽤나 눈부신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나는 파트타임 알바를 하는 회사로 출근 전 1층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렀다.
“캔 아이 해브 원 핫 아메리카노, 플리즈?”
유학생들이 대체로 그럴까. 네이티브가 지천인 미국에서는 매일 하는 주문마저도 매번 사람을 긴장시켰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해야한다는 강박에 단어 하나하나 혀에 힘을 단단히 주게 되는 기현상.
그렇게 자연스럽게(?) 주문한 커피를 들고 나는 몇 층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같은 빌딩 내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은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들고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아주 쑥스럽게.
“하이!”
“…하이…”
“아임 대니얼. 앤…유어…?”
압도적으로 큰 키의 남성이었다. 카페에서 눈만 마주쳐도 반갑게 인사하는 미국인들 특성상 나도 쿨하게 이름을 밝혔다.
“아임 해나.”
그는 물어보지 않아도 줄줄 자기 이야기를 잘 하는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직업은 변호사. 그 빌딩 근처에 살고 보잉(Boeing) 소속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쓰리잡 뛰며 근근히 유학을 유지하던 나로서는 보잉 변호사라니 부럽기만 했다.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카페에 들르는 시간대에 그도 그곳 단골이었단 생각이 스쳤다. 아마도 눈에 띄게 큰 키 때문에 잠재의식 속에 기억돼 있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이왕 서로의 이름도 알았으니 카페에서 잠깐씩 만날 때 대화를 나눴다. 그도 내가 열혈 유학생임을 알게 됐고.
그러던 어느날 그가 저녁시간을 내어달라는 요청을 했다. 친해졌으니 저녁을 먹자는 것인지 데이트를 하자고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돼 알바를 하던 회사 사장님께 물었다. “차를 가지고 회사 빌딩으로 와서 픽업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하니 사장님이 1초도 고민 없이 정리를 해주셨다.
“That’s a date!”
얼떨결에 데이트 신청을 수락해 버린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약속한 날 나는 그가 픽업하겠다는 장소에 나갔고, 그런 나를 회사 동료들이 저만치 멀리서 키득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약속시각이 되자 뚜껑을 열어젖힌 빨강색 BMW 한 대가 서서히 내게로 왔다.
‘아니야, 아닐거야… 이건 아닌데… 차 뚜껑을 열고 가자고 이 상황에서??’
그 순간 차를 정차시키고 조수석 쪽으로 긴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 남자는 스트라이프 수트 차림이었는데, 키 큰 사람이 스트라이프 수트를 입으니 옷감에 새겨진 줄이 더욱 길게만 보였다. 바지는 심지어(!) 요즘이나 유행할 만한 통바지! OMG!
빨간색 컨퍼터블에서 내린 요란한 스트라이프 수트의 키 큰 남자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조수석쪽으로 와 친절하게 차문을 열었다. 내 머릿속엔 빨리 차를 타고 그 민망한 순간을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겨우 참으며 향한 곳은 LA 부자들이 살만한 타운이었다. “이곳”이라며 도착한 외관만 봐도 멋진 건물에서는 꽤 고급스러운 그루브의 음악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해나, 이곳이 내가 자주 오는 곳인데 오늘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칵테일로 목을 잠시 축인 후 그는 나를 2층으로 안내했다. 레스토랑과 바를 합쳐놓은 듯한 근사한 1층에 이어 2층에 대한 기대가 커져가고 있을 즈음, 그는 2층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또 하나의 대반전.
많은 사람들이 스윙(SWING) 댄스를 추고 있었는데, 엄청나게 빠른 비트에 맞춰 플로어는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내게 당연하다는 듯 춤을 권했다. 나름 춤이란 춤은 고루고루 섭렵(?) 했다고 자부하는 나였기에, 분위기상 못 춘다고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변호사라더니 대체 이 사람 정체가 뭐야?’ 하는 의구심이 머릿속에 가득찬 채로 나는 그의 현란한 스탭에 엇박자를 연신 내며 진땀을 흘려야 했다. 사람의 말로 치자면 그의 춤은 속사포 랩이었다. 한 곡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다. 민망함으로 어질어질 한 내게 그는 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해나, 나 사실 스윙댄스 전미 챔피언이에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기가 죽어 더 이상 춤을 출 수가 없어 관전모드로 급 변경했고, 그는 다른 ‘선수’들과 스윙댄스를 이어갔다. 구경꾼인 나는 플로어 위에서 날아다니는 그를 보았고, 그는 무척이나 황홀하고 행복해 보였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스윙댄스에 조금만 더 익숙했다면 그와 내가 인간적으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춤을 통한 교감이 어쩌면 버벅거리는 유학생의 영어보다 더 시원한 소통이 될 수 있었을까.
그때의 일로 스윙댄스 포비아가 돼버리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춤을 좋아한다. 특히나 춤을 출 때 거울 속 내 자신을 만나는 흥미로움을 즐긴다. 때론 애처롭고, 때론 당당하고, 때론 쑥스러워하는 그곳의 나를 제3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며 나의 몸짓 ‘언어’를 읽어본다.
힙합, 재즈, 발레, 지르박, 왈츠, 룸바, 차차차, 자이브, 그리고 한국의 전통무용까지. 장르가 다른 춤은 마치 다른 언어와 같다. 각기 다른 리듬과 비트는 각기 다른 언어의 문법과 인토네이션 같지 않은가.
춤은 메시지다. 사유하는 인류의 몸은 non-verbal 커뮤니케이션의 훌륭한 도구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뿜어낸다. 그는 그날 내게 춤으로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까. ‘나는 변호사이면서도 춤도 잘 추는 완벽한 남자야’ 정도였을지.
그날의 황당한 데이트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적어도 전미 챔피언의 스탭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현란한 스윙댄스는 멋졌음을 고백한다. 춤을 추지 않을 때와 춤을 출 때 그 경계선 전후의 색이 너무 달랐던 것이 문제였지만.
<사진: 영화 '라라랜드' 중>